이왕 사토 총재와의 여행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내 일생에 ADB시절 만큼 각국을 많이 돌아다닌 적도 없었다. 여행 자체가 업무의 일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컨설테이션트립(Consultation Trip), 즉 정책협의여행이었다. 지금 생각해 봐도 ADB내에서 한국 측 이사의 위상은 대단했다. 한국을 포함해 무려 7개국을 대표하는 자리였다. 한
1995년10월 ADB(아시아개발은행)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의 내 마음은 착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재정경제원에서 완전 도태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장래에 대한 믿음, 즉 재경원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란 확신이 있는 것도 아닌 상태에서 먼 나라로 기약없는 행로를 떠나고 있었던 까닭이다. 게다가 필리핀 아키노공항(마닐라공항)에 도착하니 열대지방 고유
뉴욕 재무관의 위상이 대단하다고 느껴서 일까.1990년이 되자 외교부가 뉴욕주재 한국대사관 재무관자리를 건드리기 시작했고 내겐 예기치 못했던 고통스런 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외교부가 갑자기 해외 주재관 실태조사를 벌이면서 뉴욕 재무관을 대사관 소속이 아닌 뉴욕 총영사관 소속으로 바꾸겠다고 통보해 온 것이다. 사연인 즉 이랬다. 당시 미국에는 재무부 국장 출
해외 파견 생활을 하다보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본국의 명령에 따라 뜻하지 않은 출장길에 올라야하는 경우가 있다. 또한 간혹이긴 하지만 누구나 가고 싶어하는 인기지역에 출장을 다녀오라는 명령이라도 떨어지는 날이면 이는 그야말로 ‘일거양득’이다.나 또한 뉴욕 재무관으로 근무할 때 이런 행운의 주인공이 된 적이 있다. 1989년8월 이규성 장관 시절이었다. 재
나는 뉴욕에 갈 때부터 다부진 마음을 먹고 있었다. 볼거리도 많고 배울 것도 많은 선진도시 뉴욕에서 가족과 함께 사는 동안 할 수 있는 것, 배울 수 있는 것은 모두 해보고 배워보고 돌아오자는 것이었다. 교육 문화생활 스포츠 그리고 여행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다양한 생각을 갖고 사는 미국이라는 미지의 세계에서 우리와
뉴욕은 없는 게 없는 도시이듯 뉴욕재무관을 하다보면 한국 거물이란 거물은 다 만날 수 있는 곳이었다. 장관급 고위공무원은 물론이고 국회의원과 거물 정치인 등 이른바 한국에서 힘깨나 쓴다는 VIP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수시로 몰려들고 드나들던 곳이 바로 뉴욕이었다. 이들은 뉴욕을 방문할 때 자기 본연의 출장 목적 외에도 다른 사연을 하나씩 달고 오는 경우가 많
1988년 3월 나는 부푼 꿈을 가득 안은 채 뉴욕재무관 근무길에 올랐다.그토록 뉴욕은 내게 희망의 도시였다. 무엇보다 재무부 내에서 뉴욕재무관 자리는 어느새 주영 재무관자리를 뒤로 밀어내고 가장 인기 있는 요직으로 부각되고 있었다. 뉴욕재무관을 거치고 와야 장관을 할 수 있다는 얘기가 흘러 나올 정도였다. 실제로 훗날 장관자리에 오른 강만수, 윤진식 씨
일단 국장승진의 꿈을 이루고 나니 아득했던 지난 10여년간의 과장시절 일들이 온갖 추억으로 다가왔다. 고시 동기들에 비해 국장 승진이 다소 늦었던 것을 빼고는 과장시절까지만 해도 내 처지가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행정관리담당관을 시작으로 증권2과장 이재3과장 보험2과장 국유재산과장 국고과장 등 주요국의 주요과장 자리를 거치지 않은 곳이 없었을 정도로 많은
당시 장관께서 직접 날 불러 국장승진도 통보해주고 뉴욕재무관 발령까지 내 주셨다고 하니까 국고국장께서도 마치 자기일인 양 기뻐하며 날 축하해 주셨다. 나 또한 그간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내가 국유재산 처리와 관련해 청와대에 보고하러 다니면서 장관과 첫 인연을 맺었던 일, 그리고 최근 차관이 날 기획관리실로 발령 내려다 내가 거부하는 바람
1986년 국고과장으로 발령받고 나니 더 큰 명령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국고과장 자리 또한 그 역할이 막중했다. 특히 국가의 현금을 다루는 부서가 돼 놓다보니 수시로 긴급히 예산집행이 필요한 부처의 공무원들이 돈이 급하면 우리 과에 찾아와 지원을 요청할 정도로 타 부처 공무원들에 대한 영향력이 만만치 않았다. 그럼에도 통상적으로 국고과는 조용한 부서였다.
내가 보험2과장을 맡아 3년 반쯤 각종 손해보험제도개선에 매달려 있는 사이 세월은 어느덧 1980년대 중반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 무렵 재무부 내에선 대국대과제도 도입에 따른 조직개편이 있었고 나 또한 새로운 자리를 찾아 이동해야 했다. 나와 동기였던 과장들 중 몇몇은 국장급으로 승진해 갔지만 나와는 아직 거리가 먼 얘기인 것 같았다. ‘나는 왜 이리도 승
선진국 형 자동차 보험 제도를 만들어 놓고 보니 이제 역 선택이 생기는 게 문제였다.이를테면 안국화재에 보험을 가입한 A라는 운전자가 사고를 내고 보험료 할증이 붙을 라 치면 이듬해에 다른 보험사로 옮겨 가입하면 속수무책 할증을 부과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여기에 보험에 가입한 운전자중엔 사고시 임의로 병원을 선택해 병원과 짜고 과다보상을 받는 사
1982년2월 보험2과장으로 부임하고 나니 내 자리에 맨 먼저 찾아온 손님은 안국화재(현 삼성화재) 보험대리인(모집인)이었다.대리인은 내 앞에 와서 다짜고짜 보험과장님이니까 보험부터 하나 가입해달라고 채근했고 직원들도 과장님이 보험을 들지 않으면 누가 가입하겠느냐며 보험 대리인 편을 드는 통에 마지못해 보험하나를 가입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하지만 어찌하랴. 국가의 녹을 먹고 사는 공직자가 일을 하기 싫다고 일손을 마냥 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부실상호신용금고를 정리하다 억울한 모함을 받아 검찰조사까지 받고 심드렁해진 나는 다시 기운을 내서 새로운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다행히 우리 과에는 실력도 쟁쟁하고 유능하면서 소신도 강한 사무관들이 나를 든든히 받쳐주고 있었고 팀웍 또한 척척 잘 맞
1981년이 되자 내 신상에 또 한 차례 변화가 생겼다. 증권보험국소속에서 이재국으로 발령이 난 것이다.그런데 이번에도 내게 내려진 것은 벼락치기 발령이었다. 내가 부산에서 휴가도중 증권2과장 발령장을 받았듯이 이재국 발령 또한 내가 지방에 있을 때 긴급호출 방식으로 이뤄진 것이다. 그 무렵 나는 외부감사법을 만들어 국보위 박태준 위원장을 설득하여 이 법안
증권2과장으로 부임해 ‘주식회사 외부감사법’이라는 대작을 만들어 놓고 내 깐엔 ‘큰일을 했다’며 들떠 있을 무렵 또 하나의 ‘중대 미션’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채권 발행시장정책을 바로 세우는 일이었다. 주식 발행시장도 정비해야 할 게 많았지만 채권 발행시장이 더 큰 문제였다. 당시 채권 발행시장은 그야말로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한 회사가 채권을
증권2과장으로 발령났다는 소리에 휴가도 중단한 채 기대에 부풀어 출근했는데 내게 처음 떨어진 업무가 황당했다. 공인회계사 시험감독부터 나가라는 것이었다. 주식 채권 등의 발행시장 업무를 관장하는 줄 알았는데 업무파악도 하기 전에 시험감독이나 나가라니, 어이가 없기도 했고 김이 새기도 했다. 그러나 내막을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내가 부임하기 전에 공인회
내가 서기관 승진과 함께 첫 발령을 받은 행정관리담당관 자리는 겉보기와는 달리 할 일도 많고 중요성도 클 뿐더러 나름대로 보람도 있는 보직이었다.게다가 나 또한 비록 남들이 우습게 보는 부서라도, 예산과 인원이 턱없이 부족한 부서라도 구성원들이 단합만 하면 못할 게 없고 ‘세상 모든 일이 다 자기하기 나름’이라는 신념도 갖고 있었기에 행정관리담당관실 업무에
이쯤해서 잠시 재산관리국 시절 있었던 얘기를 하나 더 소개하고 넘어가야겠다.한 달간 인도에 연수를 다녀온 얘기를 하기 위해서다. 남들이 아무리 외면하는 일이라도 그것을 하게 되면 의외로 얻을 게 많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인도 연수가 그랬다. 당시 UN아시아개발행정센터(ACDA)에선 재무부 공무원 1명에게 1개월짜리 인도 하이더라바드(Hyderabad
재무부내 대표적인 한직부서이자 기피업무였던 국유재산 관련 파트는 그러나 내겐 많은 것을 안겨주었다.무엇보다 여의도 넓이의 700여배나 되는 국유재산을 찾아내고 이들 재산을 철저히 관리하기 위한 첨단 시스템까지 도입하고 나자 나와 내가 속해 있는 재산관리국도 더 이상 예전의 위상 그대로가 아니었다. 아울러 국유재산과 관련된 기사가 신문에도 나오고 청와대도 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