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무부가 기획원과 다른 점은 또 있었다. 바로 체육대회에 대한 열정이었다. 그중에서도 추계 체육대회 때 벌어지는 국별 대항 축구시합은 시합 성적에 따라 해당 부서의 위상을 단숨에 바꿔놓을 정도로 그 중요성이 상상을 초월했다. 당시 재무부를 비롯한 각 부처는 춘계와 추계로 나눠 체육대회를 갖고 있었다. 이는 정부가 공무원의 건강유지책으로 실시하는 ‘체육의 날
이제 와서 돌아보건대 나만큼 새로운 조직을 만들고 종전에 없던 일을 새로 만들어 해 본 사람도 드물겠구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토록 나는 어딜 가나 새 조직에 가서 새 업무를 하는 일과 인연이 참 많은 사람이었다. 1960년대 포병소위로 복무할 당시 전역을 수개월 앞두고 사단 창설 작업에 참여한 것을 비롯해 1998년 금융감독위원회 상임위원자격으로
1975년4월, 6년간의 경제기획원 생활을 접고 드디어 재무부 근무길에 들어섰다. 막상 재무부 발령을 받고 보니 만감이 교차했다. 희망부처에 왔다는 안도감과 앞으로 새로운 근무지에서 어떻게 하면 잘 적응하고 인정도 받을 것인가 하는 불안감이 번갈아 마음을 뒤흔들었다. 그럴수록 마음을 추스르고 다잡았다. “내가 얼마나 가고파하던 부처인데...내 이곳에서 마지
네덜란드 유학에서 복귀해 투자진흥국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을 무렵 또 하나의 중요한 선택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원래부터 가고 싶어 했던 재무부로부터 러브콜이 온 것이다. 하루는 재무부 총무과장이 “이 사무관, 재무부에 와서 근무해 볼 생각 없어”하는 전화를 걸어왔고 이 말을 듣는 순간 내 귀는 확 뜨였고 마음은 벌써 콩밭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게
1974년 말 네덜란드 유학길에서 돌아온 나는 다시 경제기획원 경제기획국으로 복귀했다. 유학전에 모시던 경제조정1과장이 경제기획관으로 승진해가면서 유학에서 복귀한 나를 경제기획국 투자1과로 데려간 것이다. 그분은 곧이어 투자진흥국장으로 또한차례 영전하면서 나를 다시 투자진흥국으로 이끌어 주었다. 그리고 투자진흥국은 당시 기획원 내에서 경제협력국과 함께 양대
네덜란드 유학중 주말이나 방학엔 여행도 실컷 다닐 수 있었다. 심지어 졸업논문마저 유고슬라비아 여행(field trip)을 하고 그 나라에 대한 논문을 써야 했으니 한편으론 여행 또한 학습의 연장이기도 했다.우선 주말엔 깨끗한 열차를 타고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차창을 통해 즐기며 다이아몬드의 도시 암스테르담을 비롯한 네덜란드 구석구석을 돌아다녔고 그 때마
1973년 중반 나를 태운 항공기는 잠시 도쿄 공항을 거쳐 밤새 지구 반 바퀴를 날아간 끝에 네덜란드 스키폴(Schiphol)공항에 당도했다. 스키폴공항의 다른 이름은 암스테르담공항이다. 이른 새벽 스키폴공항 상공에서 내려다 본 네덜란드의 첫 모습은 그야말로 별천지나 다름없었다. 마치 꿈속의 나라, 아니 동화속의 나라에 온 것 같은 착각마저 들게 할 정도로
내가 경제기획원에 근무할 당시인 1973년까지만 해도 우리는 UN(국제연합)의 원조를 받고 있었다. 더불어 공무원들 중엔 해외 장학금을 받고 미국 유학을 갈 수 있는 기회가 종종 주어졌다. 그러나 주로 이과대학 출신에게 유학비가 할당되다 보니 문과출신이 주로 근무하는 경제기획원 공무원에겐 그림의 떡이나 다름없는 유학지원제도였다. 상황이 이쯤 되자 기획원 직
경제조정실에서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무렵 나를 바쁘게 하는 일이 하나 더 생겨났다.다름 아닌 서울대 행정대학원 선배가 경영하는 행정고시학원에서 날더러 퇴근 후 저녁시간을 이용해 학생들을 가르쳐 달라는 강의 요청이 들어온 것이다. 이를테면 부업형 아르바이트 제안이었다. 금요일과 토요일에 재정학과 경제학을 각각 2회 4시간씩 정기적으로 강의하고 일요일에도
1970년 행정고시에 합격하고 나니 어디서 나타났는지 여기저기서 ‘마담 뚜’ 들이 귀신처럼 알고 접근해 오기 시작했다.또한 그들의 수첩엔 누구를 통해 정보를 캐냈는지 고시합격생들의 인적사항이 조목조목 적혀 있었다. 나를 포함한 행정고시 9회 동기생들 중 누구하나 마담 뚜들의 표적이 아닌 사람은 아무도 없어보였다. 게다가 우리 땐 행정고시 합격자 수가 한 기
이왕 경제기획원 초년병 시절 얘기가 나온 김에 공무원 생활 초기에 경험했던 추억 한가지를 더 소개하고 넘어가려 한다. 바로 1970년 벌어졌던 을지훈련 얘기다.이미 앞선 글에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내가 기획원에 공직 첫발을 내디딘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예비군이 만들어지고 을지훈련이라는 게 시작되었다. 또한 나는 이 훈련에 기여한 공로로 부총리 표창까지 받은 바
인턴시절 열심히 일한 보람은 아주 컸다.우선 경제기획국 상사들이 나를 아껴주고 신뢰했다. 특히 직속상관이었던 이진설 자금기획과장의 관심은 각별했다.그는 내가 1969년 사무관이 아닌 주사발령을 받게 되고 이에 불만을 품고 응시한 행정고시 시험에도 낙방해 실의에 빠져 있을 때 2개월간 야근도 덜 시키고 일도 적게 배정해가며 내게 최대한 공부할 시간을 많이 주
이쯤해서 다시 경제기획원에 첫발을 내디뎠던 초년병 시절 얘기로 돌아가려 한다. 비록 인턴사원 신분이었지만 할 일도 많았고 할 말도 넘치고 추억이나 사연도 절절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나와 서울대 행정대학원 친구들이 경제기획원에 입문한 1968년은 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한창 추진될 때였다. 그러다 보니 어느 부처 할 것 없이 중앙 부처들은 눈코 뜰 새 없이
1967년3월, 무사히 군복무를 마친 나는 곧바로 서울대 행정대학원에 복학했다.2년 전 나와 함께 행정대학원에 합격했던 동기중 몇 명은 벌써 고시에 합격해서 공직에 진출해 있었고 나 또한 그들에 뒤지지 않겠노라며 열심히 공부에 매진했다. 행정대학원에 가서는 경제학과 영어공부에 더 몰두했다. 행정학은 범위가 워낙 넓어 산만했지만 당시 유훈 교수와 훗날 경제부
나는 지금도 경기도 여주 인근을 지나칠 때마다 이곳에서 군 생활 말년에 혹독한 기동훈련을 하다가 큰 고생을 했던 추억에 잠기곤 한다. 당시 훈련과정에서 우리는 보병부대를 지원하러 나갔건만 보병대대가 우리를 배제한 채 움직이는 바람에 보급이 끊겨 훈련 성과는 커녕 큰 고생만 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1966년 겨울이었다. 사단 김장을 무사히 마치고 나니 내
1966년 여름 32사단 창설 멤버로 투입돼 옛 상관들과 다시 만나 추억어린 군 생활을 하고 있을 무렵 계절은 어느새 김장철에 접어들고 있었다.사단급 거대 부대에서 김장을 담그는 일은 군사작전만큼이나 중요하고도 큰 행사로 여겨졌다. 창고 크기로 몇 칸을 담가야 할 정도로 양이 엄청나서 배추는 경기도 인근 한강에 가져가서나 씻을 수 있었고 육젓이며 고추 마늘
2~3주간의 꿈같던 미군부대 연락장교 파견생활을 마치고 다시 포병사령부로 돌아와서는 한동안 평범한 군 생활이 이어졌다. 그렇게 한 몇 개월이 흘렀을까.나를 둘러싸고 난처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당시 우리 사단의 곽철종 사단장이 임기를 마치고 국방대학원으로 전출을 떠나게 됐는데 보좌관 1명을 데리고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그 보좌관으로 나를 지명
한신 중장과 보일 중장의 방문이 있고 나서야 나는 이곳 352 OP가 VIP OP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다. 이 OP는 서울과 수도권은 물론 미군사령부와도 가까운 서부전선에 위치해 있는데다 관측소가 있는 꼭대기까지 차로 올 수 있어 VIP방문이 끊이지 않던 곳 중 하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덕분에 관측소 생활도 심심찮게 할 수 있었다. VIP들이 방문할
대학 3학년이 되자 병역의무의 일환으로 ROTC에 지원했다.내가 1학년 때 ROTC 제도가 처음 생겼으니 나와 동기들은 3기로 입문할 수 있었다. 정광수 전 LG부회장과 이상철 한국체육대 총장, 최승익 전 강원일보사장, 그리고 군대에 계속 남아 군단장까지 지낸 서경석 중장이 102 고려대 학군단 동기들이다.비록 눈이 나빠 육군사관학교 시험에선 떨어졌지만 R
보성읍사무소 병사계 직원이 병역을 연기해 준 덕택에 나는 다시 대학생활에 매진할 수 있었다. 대학 생활 중 내게 가장 추억에 남는 친목 모임은 ‘경진회’였다. 1961학번 동기 중 고려대와 서울대 연세대 상경계열에서 각 10명씩 30명이 모여 만든 친목모임이 바로 ‘경진회’였다. 경제학과 경영학을 최고의 학문으로 밀고 나가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모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