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나라 명제 조예는 제갈양의 수차례 걸친 공격을 물리친 임금이다. 삼국지 연의의 독자들에게는 얄미운 악역이지만, 한 나라의 임금으로서는 외침을 물리친 훌륭한 임금으로 평가할 만 하다. 그는 조조의 손자요, 조비의 아들이다. 조예가 태자이던 시절, 부황(父皇) 조비와 함께 사냥을 나갔다. 달아나는 어미와 새끼 사슴을 발견하고 조비가 먼저 어미를 쏘아 잡았다.
흔히 간신이라고 하면 가느다란 눈초리에 굽신굽신하는 비굴한 자세를 가진 모습을 떠올린다. 그러나 현실에 있어서 이처럼 ‘간신’이라고 이마에 써붙이고 다니는 경우는 없다. 오히려 위풍당당한 풍채를 가진 자들이 자신의 외모로 얻은 호감을 나쁜 일에 활용해 간신의 반열에 올라간 사례가 수두룩하다. 또한 충신이냐 간신이냐는 구분 또한 매우 주관적이다. 대개 국가의
예전에 ‘청와대 비서실’이라는 책을 참 재미있게 읽었다. 이 책에 빠져있던 2002년 나는 신생 경제일간지의 한국은행 출입기자였다. 그 무렵 한국은행에서 행사가 있었는데 마침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인물을 만날 수 있었다. 김정렴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었다. 김 전 실장은 원래 한국은행 출신으로 이날 한은의 원로로서 참석했다. 마침 그때 한은 기자들의 담임
한참 게으른 생활을 누리던 2년전, 대학시절 선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년 교수님이 정년퇴직하신다.” 나도 한번 외국가서 공부해 보고 싶다고 두번이나 태평양을 왔다갔다 하면서 박사 공부는 아예 등록금에다 생활비 지원받았다고 큰 소리쳤었다. 그러나 공부체질이 박사할 정도까지는 아니어서 1년 만에 짐 싸갖고 돌아오니 찾아 뵐 면목이 나지 않아 흘려보낸 세월이
전국시대 위(魏)나라의 창업군주 문공에게 빗발치는 상소가 쏟아졌다. 중산을 평정하러 간 악양이 적국과 내통할 자라는 것이었다. 악양의 아들이 중산에서 높은 벼슬에 있었기 때문이다. 월등한 군사력에도 좀체 승전보가 전해지지 않자 더욱 뚜렷한 내통의 증거로 간주됐다. 그러나 악양은 이 모든 것을 일축하고 커다란 승리를 거뒀다. 돌아와 승리를 보고하는 자리에서
청태종의 아내 효장문황후 박이제길특씨는 중국 역사상 마지막 태황태후의 지위를 누렸다. 황제의 할머니로 군림한 마지막 여인이란 얘기다. 75세의 생애 동안 6살 아들 순치제가 황제가 되고 8살 손자 강희제가 뒤를 이을 때마다 이들의 최고 수호자 역할을 했다. 연거푸 어린 임금이 등장하는데 권력의 탐욕스런 이빨을 드러낸 약탈자들이 없을 리 만무했다. 특히 손자
갑자기 무서운 표정으로 모든 사람들의 앞에 나타난 이복형. 전쟁터에서 전사한 부왕의 유언을 밝히는 자리였다. 부왕 누르하치의 유언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어머니 오라나랍 씨를 순장하라는 것이었다. 생전에 부왕이 가장 뜨겁게 사랑한 어머니였다. 그런 여인을 “질투로 변란을 꾀했다”며 자결을 명하다니... 이제 14세에 불과한 도르곤이 부왕에 이어 생모를 잃게
병자호란의 와중에 인조를 더욱 괴롭힌 것은 오랑캐에 대한 공포다. 조선의 임금과 왕자들이 수도 없이 읽었을 역사 책 속 오랑캐 모습은 오로지 잔인무도함 뿐이다. 미녀 포사에게 푹 빠졌던 주나라 유왕은 침략해 온 견융병들에게 살해됐다. 중국의 삼국시대를 통일한 진나라는 3대 황제 회제가 5호16국 시대에 흉노족의 포로가 돼 살해됐다. 뒤를 이은 효민제도 포로
우아한 미모의 여배우 송선미가 파격 연기를 했다고 한다. 꼭 그래서 보게 된 건 아니지만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보니 마침 그 드라마, ‘꽃들의 전쟁’과 마주치게 됐다. “이게 그 드라마야?” 하면서 야생 다큐하는 채널로 곧 돌리려다가 어떤 인물이 등장하는 화면에서 그대로 정지하게 됐다. 아직 설명도 없고 누군지도 모르겠지만 풍기는 분위기가 꽤 낯익은 카리스
요즘 은근하게 눈길을 끄는 사극이 JTBC에서 하는 ‘꽃들의 전쟁’이다. 선이 굵은 배우들이 대거 출연해 제법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인조의 역을 맡은 이덕화가 삼전도에서 청태종 앞에서 항복하는 장면은 드라마 속 인조라는 인물의 향후 성격 설정에 큰 영향을 주는 부분이다. 여기서 받은 엄청난 수모가 그의 성격 굴절까지 가져와 아들을 죽이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삼국지에서 조조의 관상을 본 허소가 “치세의 능신이요, 난세의 간웅”이라고 했다. 이 말에 조조는 크게 기뻐했다. 그가 난세의 간웅인 것은 역사가 입증했지만, 만약 훌륭한 한나라 황제를 만났다면 과연 능신이 됐을까. 이 말 또한 사실일 가능성이 높음을 입증하는 인물이 있다. 조조보다 400년 정도 앞선 시대, 한나라 개국황제 고조 유방의 참모 진평이다. 꾀
“침방에 계실 때 무슨 일이 제일 하시기 어렵더니이까.” “중누비, 오목누비, 납짝누비 다 어렵지만 세(細)누비가 가장 하기 힘들었더니이다.” 영조와 그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 사이에 오간 대화다. 이 얘기는 고종이 그의 궁인에게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가 무수리가 아니라 침방나인이었다고 하면서 전해 준 얘기라고 한다. 엄마의 얘기를 듣고 영조는 그 자리에서
조선의 효종대왕이 병자호란 때 받은 충격은 부왕인 인조 이상이었다. 그는 친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강화도에 미리 피난 가 있었지만, 그곳에서 북방 기마민족에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는 강화도에 청나라 군대가 밀어닥치는 참패를 생생히 경험했다. 강화도가 함락되면서 인조도 항복의 결단을 앞당겼다. 소현세자와 효종(봉림대군) 형제는 전쟁 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는
인사에 있어서 절대로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는 이명박 정부는 지금도 엄청난 ‘MB맨’들을 공공기관 곳곳에 남겨 놓고 있다. 이들이 그런 고위직을 차지하는데 있어서 정당한 평가가 있었는지에 대한 국민들의 의구심은 끝도 없다. 그래서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자 ‘MB 낙하산’을 싹쓸이해 달라는 요구가 빗발치고 있다. 소위 금융4대천왕부터 손을 보자는 이런 요구는
4대 성인이라고 하면 석가모니, 공자, 그리스도, 마호메트를 일컫는데, 만약 공자에게 성인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공자 시대에 그리스도와 마호메트는 아직 탄생하기 전이고 석가모니는 열 두살 정도 연배가 위다. 그렇다고 해서 공자의 대답이 “석가모니”일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두 분은 같은 시대를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공자가
1960년대 생인 나의 어릴 때 동네는 경복궁 영추문 맞은 편 통의동, 그러니까 백송나무 동네다. 골목 속에서도 또 다른 작은 골목을 들어가면 일제시대 풍의 집들이 쭈욱 붙어있었다. 지난 달 근처에 일이 있어 가보니 내 어릴 때 집골목이 그대로 남아있다. 꽤 컸던 것으로 기억나는 골목이 겨우 1.5미터 폭에 불과하다. 이런 작은 골목에 번데기 장사 아저씨가
아들 결혼 소식을 대기업에 알려 물의를 빚었던 동반성장위원회 간부가 사표를 냈다. 이런 사실이 언론에 보도된 날에 바로 물러난 것이다. 공직자로서 그릇된 처신을 한 건 분명하지만 개인적으로 그가 어떤 인품의 소유자인지는 알지 못한다. 얼마 전에 이 사람보다 훨씬 더 고위층이라 할 수 있는 인천 교육감이 아들 청첩장을 학교에 돌리다 물의를 빚기도 했다. 그는
“충격” “이럴 수가” “헉!” 요즘 기사 제목에 흔히 들어가면서 독자들한테 별로 좋은 소리 못 듣는 어휘들이다. 그런데 오늘도 모 포털사이트의 옴부즈맨 코너에 들어가니 저런 기사들을 ‘다른 기사로 대체 서비스 중입니다’라는 관리자의 안내를 볼 수 있다. 여전히 저렇게 제목을 단다는 얘기다. 본지 뉴스를 편집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우리 기사 제목들을 한번 나
고려의 6대 임금 성종(成宗)은 조선의 9대 성종과 마찬가지로 국가의 제도적 기틀을 마련한 성군(聖君)으로 평가받는다. 이같은 평가는 이미 ‘성종’이란 묘호에 담겨있다. 두 임금은 성군이면서도 38세 젊은 나이에 승하한 것도 똑같다. 큰 차이라면, 조선의 성종이 연산군의 아버지로도 알려진 반면, 고려 성종은 아들이 없어 5촌 조카 목종이 뒤를 이은 점이다.
영조와 사도세자(장조)의 비사에 대해서는 세자의 광태(狂態)에 따른 비극이란 주장과 정권유지를 위한 음모의 희생자란 주장이 대립하고 있다. 양쪽 얘기를 모두 참고하면서 한중록을 읽어보면 눈길 가는 부분이 세자의 온양행이다. 세자빈 혜경궁 홍씨(경의왕후로 추존)는 “온양에 그 무슨 볼 것이 있으리요” 해서 세자가 아무런 민폐도 안 끼치고 금새 다시 서울로 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