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때의 명재상 황희는 앞선 태종 18년, 양녕대군 폐세자에 반대해서 쫓겨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세종은 자신의 승계를 반대한 황희를 오히려 중용해 역사에 길이 빛날 성군과 명재상으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이 고사의 이면에는 황희를 쫓아냈다는 태종 이방원의 연출 흔적이 강하게 남아있다. 죽기 직전의 태종은 세종에게 “황희는 일에 익숙한 구인이므로 가히
‘개부건아’(開府建牙)라는 말이 있다. 뜻 자체는 관부를 개설하고 깃대를 세운다는 말이다. 이 말을 처음 구경한 건 역사소설 ‘강희대제’에서다. 청나라는 앞선 명나라와 달리 황제의 아들들에게 상당히 많은 일을 시킨 왕조다. 명나라의 경우, 태자를 제외한 황자들은 향후 정변을 일으킬 우려가 있는 인물들로 봐서 정치 참여를 금지시켰다. 각자의 봉지에서 안락한
한문(漢文)을 깊게 공부한 적은 없지만 삼국지와 관계된 글은 용케 알아본다. 난해한 문장 속에서 낯익은 이름들이 곳곳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어느 음식점에서 곰탕을 먹다가 테이블 위 장식용 글이 삼국지 일부인 것을 알아본 적도 있다. 우리은행 1층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다 공간을 화려하게 장식한 동양화를 보게 됐다. 밑에 적힌 문장이 또 낯설지 않다 생각했더니
11월말 미국 대학가는 한국과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스포츠 축제가 있다. 대학 풋볼 리그에서 이날만큼은 라이벌 관계에 있는 대학들이 일제히 맞대결을 펼치는 것이다. 북 캘리포니아에서는 스탠포드 대 버클리(올해는 예외적으로 10월에 이미 열렸다), 동부에서는 하버드 대 예일, 텍사스에서는 오스틴과 A&M, 남 캘리포니아에서는 UCLA와 USC, 중부에서는
고 호암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기일이 전에 없이 엄청난 뉴스의 발원지가 되고 있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 맏형 이맹희씨 간의 상속다툼이 이병철 회장 추모를 둘러싼 삼성그룹과 CJ그룹간의 힘겨루기로 양상으로 변했다. 선영 일대의 사진을 놓고 군사작전을 설명하는 듯한 브리핑도 있었던 모양이다. 언론은 이런 소란과 관련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라며 입을
5~6년 전만 해도 친구들 모임에서 정규재라는 사람을 아는 이는 나 혼자였다. 무슨 대화 중에 나는 친구들에게 아주 글을 잘 쓸 뿐만 아니라 지식이 해박한 언론인이라고 소개했다. 지금은 친구 모임의 절반 정도가 이 분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 각종 토론회도 자주 나오고 논란이 되는 문제에 앞장서기를 주저하지 않은 까닭이다. 정규재 한국경제신문 논설실장은 20
순환출자는 경제 정의 뿐만 아니라 재벌 자신의 경영권 안전을 위협하는 요소이니 이를 해소하는 것이 마땅하다. 상당수 사람들은 예전에 형성된 순환출자는 그간의 ‘공’을 생각해서 용인하자는데, 이것은 경영권의 불안을 그대로 끌고 가자는 소리다. 2004년말, 외국계 펀드 하나가 삼성물산 주식을 사들이겠다고 소문을 퍼뜨린 것이 삼성전자 M&A 소동을 불러일으켰고
태종실록 1401년 1월25일의 기록이다. “공(公)·후(侯)·백(伯)의 호(號)를 고치었으니, 참람되게 중국을 모방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의안공 이화는 의안부원대군, 태종의 친형인 익안공 이방의는 익안부원대군으로 고쳐 불렀고 완산후 이천우는 완산군, 평양백 조준은 평양부원군이 됐다. 공, 후, 백은 중국 주나라 춘추시대의 봉건제 기준에서 정
21세기 남자의 하나로서 김태희가 좋은 이유는 물론 한 두가지가 아니다. 하지만 그걸 다 일일이 기사로 쓸 수는 없다. 대부분이 감성적인 이유이기 때문이다. 이성(理性)적 이유로 김태희가 좋아질 때 기사를 쓸 수 있다. 이는 이성과 감성의 입장이 일치하는 매우 만족스런 경우다. 요즘 TV를 켜놓고 다른 일을 하다가 귀가 번쩍 뜨이는 카피가 하나 있다. “프
요즘 사람들은 예전부터 내려오던 역사적 관점과 반대되는 시각에 매료되는 경향을 자주 보이고 있다.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란 속설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만큼 승자의 관점에서 각색 왜곡됐을 소지가 많다. 전해 내려오는 역사관을 뒤집어서 보려는 노력은 분명히 필요하다. 하지만, 여기에도 부작용이 있다. 역사적 진실에 최대한 접근하려는 진지한 노력이 아니라 그냥
중국 산서성 태원(현재이름 산시성 타이위안)은 전통적으로 무를 숭상해 강력한 군사력을 배출해 낸 곳이다. 전국시대 7국을 통일하려는 진나라에 가장 강력하게 맞섰던 것은 바로 이 지역을 지배한 조나라였다. 조나라 무령왕은 거추장스런 중국식 복장을 버리고 이른바 ‘호복(오랑캐 풍의 복장)’이라는 통이 좁은 바지를 백성들에게 입게 했다. 그는 중국 최초의 강력한
GS그룹의 허창수 회장 일가 어린이들이 미성년 갑부 순위를 휩쓸었다. 초등학생 나이에 보유 주식이 500억원에 이른다. 그게 다 무슨 일 하는 회사 주식인지 알기도 어려운 나이다. 정작 그 회사에 돈을 벌어주는 서민들은 한 달 한 달 이자내고 세금 내기도 눈물 나는데 말이다. 먹고 살기 고달픈 나날 중에 재벌가 어린 애들의 보유재산이 얼마라는 얘기는 발표될
나이 들어 오랜만에 경복궁을 갔었다. 한참 북쪽 끝으로 가다가 정말 오감으로 괴기가 느껴지는 곳에 발걸음이 멈췄다. 인근의 국가 중요시설을 경비하는 병력이 머물고 있었다. 음산한 기운의 정체가 바로 이들이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렇다고 이 글에서 얘기하려는 내용 때문이라고 주장할 자신은 없다. 한참을 둘러보니 작은 전각이 하나 있었고 그 앞에 있는 안내문
“오라버니 마마, 소인에게 땅을 물어 주시옵소서.” “오호! 공주가 땅을 해 뭣 하는고. 그래 그럼 어디를 얼마만큼 준다?” 한바탕 껄껄 웃은 왕의 눈에 큰 솔개 한 마리가 북쪽에서 나타나 동쪽으로 둥근 원을 그렸다. “저어기, 저 솔개가 원을 그린 아래는 다 네 땅이니라.” 사극에 가장 많이 등장한 것으로 추측되는 조선 숙종이 친동생 명안공주와 나눈 대화
춘추시대 인의의 상징 송양공이 초나라 장왕의 포로로 잡혔다. 초나라는 임금을 인질로 송나라에 가혹한 요구를 해왔다. 일찍이 송양공과 함께 서로 임금 자리를 양보해 명망이 높았던 형 목이가 이번에는 두말 안하고 비어있는 임금 자리를 차지했다. 그는 초나라 사신에게 “전 임금을 너희가 어찌하든 우리 알 바 아니다”고 전했다. 양공을 붙잡아도 별다른 이익이 없게
우리 역사에서 고려 태조 왕건은 후덕함이 특히 돋보이는 영웅이다. 신라의 경순왕이 항복한 후 그를 태자보다도 높은 정승공으로 후히 대접했고 심지어 평생의 숙적 견훤마저 ‘상보(尙父)’라는 존칭으로 예우했다. 고려 왕족을 멸족시킨 조선태종 이방원과 뚜렷이 비교되고 있다. 또한 난세에 적진으로 도망가는 장수가 있으면 가족을 따라가게 할지언정 보복처벌을 하지도
2005년, 노무현 정부의 공정거래위원회가 재벌 기업의 ‘지배구조 매트릭스’를 처음 발표했다. 공정위 공보관은 당시 정부와 사이가 좋지 못했던 몇몇 언론, 특히 A일보가 곱지 않게 보도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의 A일보 보도는 그에게 전혀 뜻밖이었다. 이른바 진보를 강조하는 몇몇 언론은 따라올 수도 없게 상세하고 알기 쉬운 보도로 순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