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漢文)을 깊게 공부한 적은 없지만 삼국지와 관계된 글은 용케 알아본다. 난해한 문장 속에서 낯익은 이름들이 곳곳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어느 음식점에서 곰탕을 먹다가 테이블 위 장식용 글이 삼국지 일부인 것을 알아본 적도 있다.

 
우리은행 1층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다 공간을 화려하게 장식한 동양화를 보게 됐다. 밑에 적힌 문장이 또 낯설지 않다 생각했더니 제갈량의 출사표였다. 아시아적 충성심의 상징인 출사표가 왜 금융기관 본점 입구의 핵심테마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반가운 기분은 여전했다.
 
한문을 잘 모르니 해석한 부분만 읽었는데 “곽유지와 비의시랑 동윤 등은” 하는 대목에서 약간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원문을 보니 “侍中侍郞郭攸之費褘董允等”이었다. 해석이 잘못된 것이다. 사람이름인 비위를 관직으로 오역하면서 “비위와 동윤”이 “비의시랑 직에 있는 동윤”으로 됐다.
 
제법 많은 비용을 들여 설치한 장식물인 듯한데 웬만한 삼국지 애호가라면 알고는 그냥 지나가기가 좀 뭣한 실수다. 물론 그림만 보는 사람들에게는 아무 상관없다.
 
삼국지 연의로만 보면 제갈량이 사망하면서 촉한이 바로 망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이 때가 시간적으로는 절반정도에 불과하다. 그의 사후에도 꽤 오래 촉한이 건재했다는 얘기다.
 
‘포스트 공명’시대를 이끌어간 장완 비위 동윤 세 명상(名相)의 공이다. 이 중에서도 특히 비위는 자객에게 암살된 것이라니 유비 관우 장비를 숭상하는 선비들에게는 참으로 아쉬운 대목이다. 이들 세 재상마저 세상을 뜨고 제갈양의 군사적 후계자 강유가 무리한 북벌을 지속하면서 촉한의 쇠락이 가속화됐다.
 
삼국지 연의의 저자 나관중도 제갈량 사후에 대해서는 집필 흥미를 크게 잃어버린 듯 분량을 크게 줄인 바람에 시간적 착시가 심화됐다. 그러나 이 시기는 중국 이야기 특유의 과장이 크게 사라지고 극히 사실적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100만이 난무하는 원정 병력도 8만, 4만 등으로 급감하고 있다.
 
우리은행 1층의 출사표는 두 개 가운데 먼저 쓰인 ‘전 출사표’다. 훗날의 선비들이 더욱 눈물을 흘린 것은 ‘후 출사표’라고 전해지고 있다. 예전에 후 출사표 내용을 건성으로 본 적이 있는데 내 소감으로는 제갈양이 1차 북벌 실패 후 촉한 내부에서 정치적 도전을 받았던 듯하다. 자신에 대한 비판에 반박하는 느낌이 강했다. 어떻든 제대로 읽어본 사람들은 후 출사표에서 더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이와 달리 ‘전 출사표’는 선제 유비(소열황제)를 모시고 촉한을 개국한 자신의 일대기가 묘사돼 있다. 관점에 따라서는 상당히 훈계조로 보이기도 한다.
 
왕조시대 신하들이 아무리 제갈량을 숭상하기로 임금 앞에서 출사표의 말투까지 흉내 냈다면 바로 목이 뎅강 달아났을 법도 하다. 후주 유선이 ‘상부(相父)’라고 예우했다는 제갈량이니까 지닐 수 있는 위엄이다.
 
▲ 남만원정에서 제갈양이 맹획을 생포한 '칠종칠금'의 고사를 묘사하고 있는 신윤복의 고사인물도 한 부분. /사진=뉴시스
 
프로야구에 비유하자면 에이스 선동렬(제갈양)을 뒷받침한 이강철, 조계현에 필적할만한 비위인데 관직이름으로 오역된 것을 보니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렀다.
 
이런저런 객담의 한 줄 요약은 내가 스마트폰을 쓰지 않음으로 인해 발생 가능한 일이었다는 것이다. 이른바 ‘실버 폰’을 쓰고 있는 나로서는 건물 1층의 작은 구석까지 들여다 볼 여유가 남달리 많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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