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0년 전, 미세한 구리 함량 변화가 불러온 화폐경제의 격변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1만원권의 제조원가는 2007년 71원이었고 지금도 100원을 넘지 않는다고 한다. 5만원권은 100원을 조금 넘는다고 한다. 물질적 가치로는 100원에 불과한 종이 한 장이 현대 통화정책의 힘을 빌려 5만원의 힘을 내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과 같은 화폐금융이론, 통화정책, 조폐 기술이 없었던 고대에는 동전의 물질적 가치 자체가 그 돈의 액면가와 비슷했다. 구리로 돈을 만들었는데 구리가 필요할 때 돈을 녹여 써도 손해 볼 것이 없는 시대였다. 심지어 기원전 3세기 중국의 전한시대 초기에는 동전의 뒷면에 아무런 글씨도 넣지를 않은 까닭에 서민들이 동전을 긁어 구리가루를 얻는 일이 흔해졌다. 그래서 뒷면에도 글자를 넣기에 이르렀다.

▲ 한나라 개국 태조 고조 유방.

항우와 천하통일을 다툰 한나라 개국 고조 유방은 늘 물자 부족에 시달렸다.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면서 주조한 화폐를 계속 쓰고 있었는데 이 돈의 발행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마침내 구리함량을 12수에서 3수로 줄이기로 하고 “진나라 돈이 너무 무거워 서민들이 쓰기에 불편해서”라는 이유를 달았다. 하지만 본심은 구리를 아끼자는 것이었다. ‘통화발행량 x 9수 = 잉여 구리물량’이란 기대를 하면서다.

그러나 전혀 계산에 넣지 않은 현상이 발생했다. 사마천은 사기의 평준서에서 “법도를 준수하지 않고 오직 이익만을 도모하는 돈 많은 장사꾼들은 돈을 엄청나게 끌어 모아 시장의 물건들을 사재었으니, 물가가 크게 뛰어 쌀 한 섬은 만전, 말 한 마리는 백 만전에 거래됐다”고 꼬집었다.

구리 함량을 줄인 가벼운 돈을 만들었다는 건, 화폐 발행을 더욱 쉽게 했다는 얘기다. 이는 곧 화폐의 증발(增發, 늘려서 발행하는 것), 다시 말해 통화 공급량을 늘렸다는 것. 비유하자면 한(漢)나라 인민은행이 금리를 내린 것과 마찬가지다. 중앙은행의 금리 인하란, 시중의 금리가 목표한 수준에 이를 때까지 돈을 더 발행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중앙은행 포고문으로 ‘오늘부터 금리를 이 수준으로 한다’고 명령하는 것이 아니다. 돈의 공급을 늘리면 돈의 가격인 금리가 떨어지는 수요와 공급의 원칙으로 정책을 운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마천이 묘사한 정책 후폭풍을 보면, 경제 펀드멘털에 적절한 ‘금리 인하’는 아니었던 것이다. 실물 경제의 통화수요를 초과한 과도한 통화 공급으로 인해, 생산성을 무시한 투기행위가 만연했으니, 이게 바로 인플레이션이다. 지금부터 2300년 전 중국의 역사책에, 무분별한 통화 정책이 인플레이션을 초래하는 과정이 기록돼 있는 것이다.

이 현상이 더욱 악화되면 1920년대 나치 집권 직전의 독일처럼 손수레에 월급을 받아와서 이발소에 한아름 안고가 머리 깎은 비용으로 내게 된다.

초한지에 등장하는 무수한 공신 가운데 한신, 번쾌와 같이 전선에서 이름을 떨친 명장들이 중앙은행 총재까지 겸직했을 리는 없다. 소하, 장창, 진평과 같이 명재상으로 이름을 날린 사람들이 화폐 분야를 소관 했거나 최종 결재권을 행사했을 것으로 보인다.

싸구려 화폐의 폐단을 근절하기 위해, 고조는 천하통일 후 사치행위를 금하고 세금을 과중하게 부과했다. 통화정책이 잘못돼 투기가 만연한 건데 ‘시민의식 개조’와 조세정책으로 대응에 나선 것이다. 이런 대응이 먹혔을 리가 없다.

한나라 조정에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와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 같은 사람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한편으론 ‘양적 완화’라고 열심히 돈을 찍어대고 한편에선 그 돈을 쓰면 세금을 더 걷겠다고 소비세를 올리는 모양이 딱 닮은꼴이다. (며칠 전 BBC는 이런 부조화를 이유로 아베노믹스에 대해 ‘당초부터 성립할 수가 없는 정책이었다’고 혹평했다.)

 

▲ 최경환 경제부총리와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 /사진=뉴시스

 

3대 효문황제에 이르러서는 정치가 크게 안정됐지만 잘못된 통화정책으로 텅 빈 나라 곳간은 여전했다. 그래도 문제가 있는 건 깨달아서 구리함량을 3수에서 4수로 끌어올렸다. 돈 만들기가 조금 어려워진 것이니 오늘날의 금리 인상에 해당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 정책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이 때까지 한나라는 민간의 화폐주조를 허용하고 있었다. 구리만 있으면 누구나 돈을 만들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돈에 들어가는 구리 함량이 낮다는 건 무분별한 통화 공급이다. 한나라 초기 국가의 최대 위협이었던 오초7국의 난이 일어난 배경에도 잘못된 통화정책이 자리하고 있다. 반란 주역인 오나라 유비는 영지에 구리가 풍부한 동산(銅山)을 갖고 있었다. 마음껏 돈을 발행해 마침내 황제보다 더 많은 현금을 보유했다. 원래부터 야심만만하던 인물이 무모한 결단을 앞당기게 됐다.

4대 효경황제는 마침내 민간의 화폐주조를 금지했다. 중국 내 통화 공급은 격감하게 됐다.

역사에서는 3대 효문황제가 여씨들의 반란을 평정했고, 5대 효무황제가 흉노를 원정한 것만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흉노원정, 장건의 서역 개척 등 대형 프로젝트들이 가능하게 탄탄한 정부 재정을 만들어 준 임금은 바로 효경황제다.

이 모든 얘기는 사기의 평준서에 담겨 있다. 평준서(平準書)라는 이름은 물가를 균일하고 공평하게 관리한다는 뜻이다. 사마천은 역대의 황제들이 정한 구리 함량 변화와 관련 정책들이 시중의 재화 유통에 미친 영향을 실감나게 묘사했다.

유가(儒家)를 자처하는 사마천이지만, 오늘날 화폐경제학에도 어긋나지 않는 안목을 과시하고 있다.

오늘날이나, 2300년 전이나, 또는 그보다 더 이전시대나 돈의 원칙은 이렇게 일관된 것이다.

앞서 일본의 정책당국자들을 언급했지만 한국이라고 해서 형편은 그다지 달라 보이지 않는다. 매달 한국은행에는 금리를 내리라는 유무형의 정책적 요구가 밀려들고 있다. 한편으론 주민세에 담배세에 서민들과 관련된 세금들은 곳곳에서 들썩거린다. 돈을 풀어대면서도 그 돈을 쓰면 세금을 더 걷겠다고 한다. 당초에 돈을 풀 때, 서민대중이 아니라 특정 계층이 쓰라고 풀어 댄 건지도 모르겠다. 최경환 경제부총리도 한고조 유방의 치세에 태어났다면 크게 한 자리 차지하지 않았을까.

한나라 황제의 눈길이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까지 미치기는 어려웠을 것 같다. 요즘 금융시장에서 한은의 존재란 것이 워낙 찾아보기 힘들어서다. 이상하게 한국은행 출신 총재들이 등장하면 한은은 더 찾아보기 힘들어진다. 한은 취재 14년 동안 얻은 인상이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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