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6대 임금 성종(成宗)은 조선의 9대 성종과 마찬가지로 국가의 제도적 기틀을 마련한 성군(聖君)으로 평가받는다. 이같은 평가는 이미 ‘성종’이란 묘호에 담겨있다.

 
두 임금은 성군이면서도 38세 젊은 나이에 승하한 것도 똑같다. 큰 차이라면, 조선의 성종이 연산군의 아버지로도 알려진 반면, 고려 성종은 아들이 없어 5촌 조카 목종이 뒤를 이은 점이다.
 
고려 성종이 병이 위중해 신하들이 대사령을 내려 하늘의 도움을 받자고 청했다. 성종이 이에 답했다.
 
“인명은 하늘에 달렸는데 어찌 죄 있는 자들을 용서해 억지로 연명을 하겠나.”
 
나 살자고 죄지은 자들을 거리에 풀어놓을 수 없다는 뜻이었다. 고려 후기의 위대한 유학자 이제현은 이에 대해 “죽어가면서도 함부로 대사령을 내리지 않았으니 이는 생사의 이치에 밝은 식견을 가졌음이라”고 찬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역사에서 어진 임금이 세상을 버릴 때 감옥의 죄수들을 대한 모습이다.
 
▲ 드라마 '천추태후'에 나온 고려 성종대왕의 모습. 고려 때는 임금의 중병을 고치는데 하늘의 힘을 얻기 위해 죄인을 방면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성종은 "나 살자고 죄인을 풀어줄 수 없다"며 이를 거부했다. 혹자가 새 임금 등극 기념으로 관행적으로 권력형 죄인까지 다 풀어준 것처럼 얘기하는 것과는 엄청난 거리가 있다.
 
최근 임태희 전 대통령 실장이 “과거에도 보면 새 임금이 나오면 옥문을 열어 준다고 하지 않나”라며 이상득 최시중 천신일 등 이명박 대통령의 측근들에 대한 사면을 주장했다고 한다.
 
우리 역사책 어디를 들여다봐야 어진 새 임금이 권력형 비리를 저지른 자들을 풀어줬다는 얘기가 나오는지, 기자의 지식으로는 도저히 찾을 길이 없다.
 
오히려 고려 성종처럼 임종을 앞둔 마당에도 “나 살자고 죄지은 자들을 풀어줄 수 없다”고 일축하는 면모만을 확인했다.
 
성종의 사례에서 보면, 과학의 발달이 미흡했던 과거에는 은혜를 베풀어 하늘을 감동시켜서 임금의 수명을 연장하려고 했던 적은 있는 듯하다. 하지만 지금 이명박 대통령은 퇴임을 앞뒀을 뿐이지 이 대통령의 건강이 어떻다는 얘기는 전혀 나온 적이 없다.
 
설령 이 대통령의 건강에 이상이 있더라도 전임 대통령에 대한 최상급의 의술로써 고칠 일이지, 감옥에 있는 대통령의 형을 풀어줘서 고칠 세상도 아니다. 그렇게 해서 하늘이 감동할 지도 의문스럽기 이를 데 없다.
 
정말로 국가에 유능한 인재여서 선대 임금이 일부러 죄를 주고 후대 임금이 용서하는 식으로 충성을 이끌어낸 사례는 많다. 앞선 만필에서 소개했던 조선 태종·세종과 황희의 고사다.
 
이 경우를 지금에 들이대려면 이상득, 최시중, 천신일 같은 사람이 새로운 박근혜 정부에서 대단히 크게 쓰여야 할 인재들이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리 많이 쳐봐야 세 명을 넘지 않을 것 같다. 풀어주려는 사람도 다음 정권에서 중용되라는 의도를 가졌을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권력형 죄인을 풀기는커녕 오히려 유명(遺命)으로 더욱 단단히 묶어놓는 경우는 들어본 적이 있다. 태종 때의 권신 이숙번이다.
 
아들 세종에게 황희는 다시 중용하라 권유한 태종이 이숙번에 대해서는 “절대 다시 불러들이지 마라”는 유명을 남겼다. 권력을 남용한 자는 세종에게 큰 짐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세종은 아버지의 당부를 철저히 받들었다. 다소 지나친 것은 아니었나 할 정도다. 태종 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한양으로 불렀지만, 일을 마치자 다시 그를 유배지로 돌려보냈던 것이다. 개국 초 일을 잘 알기로 이숙번 만한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불렀지만, 이는 극심한 ‘희망 고문’이 됐다.
 
권력형 비리를 저지르는 인간은 그 습성을 평생 버리지 못함을 누구보다 잘 아는 태종이었다. 그런 자가 옛 주인(태종)없는 세상에서 만만한 어린 임금에게 삼국지 조조 같은 횡포를 부리는 꼴을 우려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근대화 이전 우리 역사는 전부 미개하고 말도 안되는 몰상식이 횡행한 것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한민족이 서구에 비해 뒤떨어진 체제를 갖춘 것은 제국주의 시대 이후 300년 정도에 불과하다. 나머지 수천년 동안 저들을 크게 앞서는 인문의 전통을 지녀왔다. 진작부터 우리 역사에는 오늘날에도 놀라운 수준 높은 정치 메카니즘이 작동해 왔다.
 
염치없고 역겨운 짓을 하는 핑계로 함부로 우리 옛 임금을 들먹거리는 소리를 듣다보니 저절로 펜을 잡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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