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레이만 1세의 관용과 영토없는 미니국가 몰타 기사단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조자룡이 유비 아들 아두를 품에 안고 조조의 백만대군 진영을 무인지경처럼 돌파해 나가는 모습을 조조는 산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조조는 예전에 유비 휘하 또 다른 장수 관우를 끝내 자기 사람으로 만들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지금 직접 목격하는 조자룡의 놀라운 무예에 다시 한 번 사람 욕심을 내지 않을 수 없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다른 구단 에이스들을 빼가듯, 유비 휘하 맹장들을 특히 탐을 내던 조조다.

즉시 영을 내렸다. “조자룡에게 활을 쏘지 말고 반드시 생포하라”

이 명령 덕택에 조자룡은 적진을 완전히 벗어나는데 성공했다. 이렇게 살아 돌아간 조자룡은 10년 후 한중대전에서 조조를 또 만났다. 이 때도 조자룡은 포위된 유비군의 노장 황충을 구하기 위해 눈부신 일기당천의 무예를 과시했다. 전황을 보고하는 전령에게 유비가 “너희 장군이 어떻게 싸우더냐”라고 묻자 전령은 “장군의 칼이 번쩍일 때마다 배꽃 잎이 흩날리는 듯 하더니 그때마다 적장의 목이 떨어졌습니다”라고 말했다. 조조로서는 10년 전 당양에서 괜히 대범한 모습을 과시했다가 거듭 조자룡에게 쓴 맛을 본 것이다. 조조가 아무리 교활한 인간이라 해도, 중국 대륙의 최고 권력자에 걸맞은 인품을 과시한 측면은 있다.

그런데 이 얘기는 허구다. 정사에는 없고 소설인 삼국지연의에만 나온다는 것이다.

조자룡이 유비 아들과 부인을 보호했다는 역사의 한 구절을 가지고 나관중은 애를 품은 조자룡이 적진 한가운데 있는 것으로 설정해버렸다. 그러나 나관중 스스로도 좀 너무 심하게 상황 설정을 했다고 느꼈는지 조조의 대인적인 인품을 넣어서 “화살 쏘지 마라”는 명령으로 상황을 수습했다.

너무나 용감한 적에 대해서 존경심을 표현하는 것이 소설에서만 나오는 얘기는 아니다. 개인적 감정이 아니라 국가의 임무를 맡아 전쟁에 나선 전사들에게 적군이란 업무상의 상대방인 측면도 있다.

권투 경기가 끝나면 두 선수가 가식 없는 우정의 표현을 주고받는 것은 치열하게 싸운 상대일수록 적개심보다 공감대나 존경심이 생기기 때문이다.

 

조금 구차한 사족이지만, 우리나라 국회에서 격렬한 몸싸움을 하던 여야의원들이 놀라운 공생 정신(?)을 보여준 적이 있다. 10년 전 쯤, 국회에서 법 개정을 막으려는 야당의원들이 상임위원장 석을 느닷없이 점거해 버렸다. 밤늦도록 몸싸움 설전을 주고받다가 다음날까지 소강상태의 대치가 이어졌다. 점심시간엔 양쪽 관계자와 취재진이 모두 사라지고 회의장엔 양당의 당번의원 두 명, 그리고 나 한 사람만 있었다.

당번의원들은 더 이상 논쟁 따위는 집어치우고 담소만 나누고 있었는데, 내 눈에 위원장 석에 여당의원이 앉아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내가 “탈환하신 겁니까” 묻자 위원장석의 여당의원은 “아니, 화장실 간다고 그래서...” “이런 건 도와줘야 되잖아”라고 대답했다.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 원정 때 안시성 하나를 넘지 못해서 끝내 철군하고 말았다. ‘정관의 치’로 유명한 중국 사상 최고 성군 당태종에게 거의 유일한 실패다. 당태종은 끈질기게 당군을 물고 늘어진 안시성주 양만춘에게 비단 백필을 남겨 용맹함과 충성심을 치하했고 양만춘 장군은 성루에서 당태종에게 송별의 예를 갖췄다는 얘기도 전한다. 하지만 이는 완전히 확인된 얘기는 아닌 것 같다.

서양사에서도 용감한 패자에 대해 승자가 베풀어준 관대함이 역사에 커다란 자취를 남긴 사례가 있다. 약 500년 전에 벌어진 일의 결과로 마침내 2015년 현재도 건재한 하나의 주권이 탄생했다.

▲ 몰타 공방전을 그린 마테오 페레즈 달레시오(1547~1616)의 작품.

술레이만 1세는 투르크 제국의 위대한 대제로 평가받는 사람이다. 그가 통치한 16세기는 지중해를 둘러싸고 이슬람의 투르크 제국이 교황과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대표로하는 기독교 세계와 수 백 년째 지속하던 시대다.

중동 뿐만 아니라 북아프리카까지 이슬람의 집을 확대하고 비엔나를 압박하고 있던 술레이만 1세에게는 제국의 코앞인 에게 해에 눈엣가시가 솟아있었다. 투르크 바로 앞의 로도스섬이 가장 투철한 기독교 신앙으로 무장한 성 요한 기사단의 본거지였던 것이다.

1522년, 즉위한 지 2년이 된 술레이만 1세는 이 섬을 점령하는 것으로 위대한 대제의 첫 정복과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600명도 안되는 기사가 5000 명의 주민과 함께 지키는 이 곳을 점령하는 전쟁은 당초 예상과 달리 너무나 치열했다. 투르크 제국은 300여척의 배에 10만 명의 대군을 투입해 넉달을 싸운 끝에 코 앞의 섬에서 ‘이교도’들을 몰아낼 수 있었다.

기사단 측의 사상자가 4000명으로 방어 병력의 대부분에 해당하지만 투르크의 사상자는 무려 4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종교가 결부된 전쟁은 패배한 적에 대한 무자비함이 신에 대한 헌신으로 간주되던 시대다. 그러나 술레이만 1세는 뜻밖의 모습을 보였다. 그는 패장인 기사단장에게 “나는 이겼소. 하지만 당신과 당신 부하들처럼 용감하고 의로운 사람들을 집에서 쫓아내야 하는 사태에 진심으로 슬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소”라고 말했다. (시오노 나나미, “로마 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

성 요한 기사단의 기사들은 무기를 가지고 섬을 떠나는 것이 허용됐다. ‘무인의 명예’로서 패자에 대한 최고의 예의를 보여준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드라마의 대단원과 달라서 이러한 선심의 발동이 모든 일을 종결짓지 않는다.

이때 술레이만 1세가 기사들을 살려줌으로 인해 그는 43년 후 이들과 다시 한 번 전쟁을 벌여야 했다.

그 세월동안 28세의 젊은 황제는 7순을 넘긴 노인이 돼 있었다.

프랑스 출신의 기사 라 발레트는 43년 전 로도스 섬을 떠난 기사단의 일원이었다. 그도 동갑인 황제와 마찬가지로 28세의 젊은이가 71세 노인이 됐다. 로도스 섬을 떠난 후 8년의 떠돌이 생활을 했던 기사단은 마침내 스페인의 카를로스 1세가 제공한 몰타 섬에 정착했다.

몰타 섬은 투르크 제국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역시 북아프리카 이슬람 세력권에는 코앞에 있었다. 로도스 섬에 비해 말할 수 없이 열악한 환경이지만 라 발레트는 기사단의 단장이 돼서 혼신의 힘으로 새 근거지를 개척했다.

라 발레트는 로도스 섬을 떠나던 그날부터 한 시도 투르크와 다시 싸우는 날을 잊은 적이 없었고 그 날이 마침내 다시 찾아왔다. 1565년, 5만명의 투르크 군이 몰타 기사단을 완전히 몰아내기 위해 몰타 섬으로 몰려왔다. 지키는 기사의 수는 500명에 불과했고 농민들을 합해도 1만명을 넘지 못했다.

더욱 절망적인 것은 기독교 세계 모두 이미 기사단의 운명이 끝난 것으로 여겨 원군을 보낼 엄두를 못 냈다는 점이다.

하지만 라 발레트를 중심으로 한 기사단은 요새 하나가 무너지면 다음 요새에서 농성을 하고 최후의 기사 1인이 쓰러질 때까지 맞선다는 투지로 싸웠다. 라 발레트는 기사들이 투구에 깃털을 다는 것을 금지하고 전신 갑옷도 불허했다. 투구와 가슴을 보호하는 갑옷만 허용했다. 연락하는 일 아니면 말도 못 타게 했다. 바위섬을 지키는데 필요한 것들만 남기고 기사의 위풍당당하지만 불필요한 겉모습을 모두 버렸다. 여기에 불만을 가진 젊은 기사들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몇 십년 세월 고향한번 못가본 기사단장 라 발레트 앞에서는 부질없는 투정에 불과했다.

이 전쟁에서는 술레이만 1세가 친정을 안 한 탓인지, 투르크 군 수뇌부의 협력도 차질을 빚고 있었다. 500명의 기사 중 300여명의 기사가 전사한 끝에, 마침내 몰타 기사단은 투르크 군을 물리쳤다. 이번에는 승리해서 본거지를 지켜낸 것이다.

승리한 라 발레트에게 유럽 각국의 축하가 쏟아지고 교황은 추기경의 성직을 주겠다고 제의했다. 라 발레트는 “추기경의 성직보다 섬을 재건하는 지원이 절실하다”며 사양했다. 3년 후 그는 타계해 섬에 묻혔다.

기사단은 중세의 유럽과 투르크 대결이란 세계 정세가 제국주의 시대로 접어든 1798년까지 몰타 섬을 지켰다. 나폴레옹이 이들을 섬에서 축출할 때 까지다.

그러나 몰타 섬을 떠났어도 기사단은 사라지지 않았다. 지금도 로마의 주소지에 건재할 뿐만 아니라 하나의 주권주체로서 우표를 발행하고 외교사절을 둬서 타국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국가와 마찬가지의 위상을 지니고 있다. 불교국가인 태국과 회교국가인 요르단을 포함해 105개 국가와 외교관계를 맺고 있으며 헌법과 법원도 갖추고 있다. 이제 군사적 활동은 완전히 사라지고 의료 활동 등에 헌신하고 있다.

▲ 지금도 건재한 몰타 기사단의 모습. /몰타 기사단 홈페이지.

500년 전, 승자인 술레이만 1세가 영웅적인 패자들에게 존경심을 표현한 일이 이렇게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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