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의 왕과 왕세제, 왕세자는 영국 찰스 왕세자와 다른 삶 살아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압둘라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이 90세로 서거하자 그의 이복동생 살만왕자가 왕위를 이었다. 살만 새 국왕도 79세의 노인이다. 살만 국왕의 뒤를 이을 왕세제는 이미 고 압둘라 국왕이 임명했는데 이들 형제의 막내 무크린 왕자다. 무크린 왕세제의 나이는 언론마다 다소 차이 나게 전하고 있는데 69~70세다.

앞으로 살만 국왕의 뒤를 이를 왕세제 또한 이미 칠순을 넘긴 노인인 것이다. 왕의 아들이 아닌 동생이 후계자로 예정돼서 왕세자가 아닌 왕세제로 호칭한다.

 

▲ 지난해 11월 호주의 G20 정상회담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신임 국왕이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당시 살만 국왕은 왕세제였지만 고령의 압둘라 국왕을 대신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세계 역사상 최장 세자로 지내고 있는 영국의 찰스 왕세자는 “내가 각별히 조심하지 않으면 나의 시간은 곧 사라지고 말지도 모른다”고 승계에 대한 조바심을 드러낸 적이 있다.

모왕(母王)이 살아계시는데 불효막심하기 이를 데 없는 이런 소리를 했을 때 찰스 왕세자의 나이는 64세였다. 올해 67세가 되는 찰스 왕세자는 이제 막 사우디아라비아의 제1왕세제가 된 무크린 왕자보다도 어리다.

서거한 압둘라 국왕이 지난 2005년 왕위를 승계한 나이가 80세다. 여기에 비하면 찰스 왕세자는 아직 혈기왕성한 젊은이다.

그런데 찰스 왕세자가 안고 있는 최대 문제는 어머니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장수가 아닌 듯하다. 영국이나 다른 영연방 국가에서는 찰스 왕세자가 다음 왕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민심이 강하다. 다이애나 왕세자빈의 불행한 최후가 찰스의 불륜에서 출발했다는 점을 영국인들이 용서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불륜의 상대방은 지금 왕세자의 부인이 돼 있다. 사나운 여론 탓인지 왕세자빈에 해당하는 웨일스 공주라는 호칭은 받지 못하고 콘월 공작부인에 머물러 있다.

 

▲ 2012년 엘리자베스2세 여왕 즉위 60주년 콘서트에서의 여왕과 찰스 왕세자. 여왕 즉위 60주년이란 찰스의 왕세자 책봉 60주년이란 의미도 된다. 3년전 모습이다.

 

사우디의 왕과 왕세제, 왕세자들은 찰스 왕세자와 근본적으로 다른 삶을 살고 있다. 입헌군주국 영국에서 왕과 왕세자가 하는 일은 거의 없다. 품위 있게 국가를 대표하기만 하면 된다.

왕정국가인 사우디의 왕족들은 이런 호사와는 상당히 거리가 멀다. 왕은 통치를 해야 되고 왕세제, 왕세자 등 저군(儲君)들도 국정에 참여해야 한다. 지금 중동에는 이슬람국가와 각국의 민주화 내전, 그리고 유가 급락 등 중대한 문제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사우디의 국왕은 이런 일들에 핵심적인 책임을 지고 있다.

사우디에서는 건국 군주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 국왕이 아들에게 물려준 후에는 줄곧 부자세습이 아닌 형제세습을 하고 있다. 형이 서거하면 동생이 승계를 한다. 그래서 이미 고희(70살) 희수(77살)를 넘긴 나이에 등극하는 일도 생겨난다.

왕의 동생이 승계하는 형종제급 제도는 새 임금도 경륜이 많아서 국정에 큰 혼란이 없다는 장점이 있다. 새 사우디 국왕을 국제 무대의 ‘뉴 페이스’라고 만만히 볼 넋 나간 외교관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미 팔순을 넘긴 살만 국왕은 1980년대 아프가니스탄의 반소련 반군인 무자헤딘을 지원하는 일도 맡았던 사람이다. 웬만한 서양 외교관들이 역사책으로 공부한 현장에 이미 그는 당사자로 있었다는 얘기다.

동양에서도 아주 과거에는 형종제급이 흔했었다. 왕의 동생들이 많아도 기본적으로 왕의 아들이 승계하는 적장계승은 유학이 기본 정치 이념이 되면서 자리를 잡았다.

적장계승의 단점은 임금이 갑자기 어려져서 국정에 혼란을 초래한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중국에서는 주나라가 은나라를 대체하면서, 한국에서는 고려를 거치면서 조선에 이르러 완전하게 적장계승이 자리를 잡았다.

즉위 초 혼란에도 불구하고 적장계승을 선호한 것은, 권력 승계와 관련한 분란을 원천차단하기 때문이다. ‘형이 죽으면 그 다음은 내 차례’라는 꿈에 젖은 왕자가 많으면 분란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이원복 화백은 자신의 저서 ‘먼나라 이웃나라’에서 형님 임금이 죽자 후계자 동생이 “아니 형님, 왜 이제서야... 아니지, 벌써 가시는 겁니까”라고 횡설수설하는 장면으로 형제계승의 폐해를 풍자하고 있다.

잘났던 못났던 헌법으로 왕통을 정해놓고 부족한 점은 조정의 시스템으로 보완해 간다는 것이 적장계승의 이념이다.

▲ 공자가 성인으로 존경한 주공 숙단. 어린 조카 성왕을 지키기위해 형제들의 반란을 진압하고 적장계승의 원칙을 세웠다.

기원전 11세기 주나라의 희단은 문왕의 아들이고 무왕의 동생이다.

아버지 문왕은 어느 날, 무왕을 비롯한 모든 아들을 불러놓고 엄숙한 선서를 했다. 희단과 관숙 채숙 확숙 등 모든 왕자가 모였다. 문왕은 “은나라의 형종제급은 나라를 망치는 제도이니 주나라는 적장계승을 따른다”고 선언했다.

사실 이러한 주나라의 기본 질서는 모두 희단이 설계한 것이다. 부왕이 “너희들은 왕이 될 생각하지 말고 성심껏 조카 임금을 보필하라”고 명을 내릴 때 다른 형제 관숙 채숙 확숙은 얼굴에 불만이 가득했다. 과연 이들은 훗날 은나라를 멸한 후 반란을 일으켰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형의 아들을 위해 형제들을 토벌한 희단이라고 해서 조카인 성왕과 행복하게만 지낸 것은 아니다. 희단은 자신의 봉지인 노나라를 아들 백읍고에게 맡기고 자신은 조정의 섭정으로 성왕을 보필했다. 성왕이 장성해 정권을 돌려받은 후 숙부인 희단을 의심했다. 마침내 숙단이 멀리 망명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어느 날 성왕이 궁궐의 창고에서 단단히 밀봉된 서류함을 찾아냈다. 열어보니 희단의 기도문이 들어있었다. 성왕이 어릴 적, 중병을 앓았는데 희단이 “왕은 어려서 아무 죄가 없습니다. 죄를 지은 저의 목숨을 가져가시고 왕을 살려주소서”라며 하늘에 기도한 것이었다. 성왕은 눈물을 흘리면서 숙부 희단을 귀국시켰다.

4대 성인의 하나인 공자가 성인으로 존경한 500년 전의 인물 주공(周公)이 바로 희단이다. 성인이 성인으로 받들었으니 주공 희단이야말로 유가(儒家)의 큰 시조다.

수양대군이 반란을 일으킨 후 한때 주공을 자처했지만 탐욕으로 가득한 인간은 성인의 흉내조차 낼 수 없는 법이었다. 조카인 단종의 왕위도 빼앗고 무참하게 시해해 대대로 추악한 이름만 전하고 있다.

앞선 고려에도 수양대군 비슷한 임금이 있다. 숙종이다.

조카인 어린 헌종이 당뇨로 고생하는 것을 불쌍히 여기기보다, 형님 선종에 대한 원망이 더 앞섰다. 왕위를 아들보다 아우인 자신에게 줘야 했다는 것.

몸도 약한 헌종은 무시무시한 숙부가 정변을 일으키자 왕위를 물려줬다. 16개월 후 승하한 헌종의 나이는 열 네 살이었다.

고려 후기의 유학자 이제현은 숙종의 처사에 대해 매서운 비판을 가했다.

“사람들은 여러 왕대에서 형제끼리 왕위를 주고받는 데 익숙해져 어린 아들을 세우는 것을 잘못으로 여겼는데 어찌 그렇게 생각하는가. 근친 중에 주공과 같은 이가 없고 신하들 가운데 곽광과 같은 사람이 없어서 정치를 보좌하지 못한 것이다.”

주공과 같았어야 할 사람이 숙종인데 조카의 왕위를 뺏기에 이르렀다.

고려 초기만 해도, 2대 혜종 이후 계속 정종 광종이 왕위를 이었다. 혜종 정종 광종은 모두 태조 왕건의 아들이다. 빈번한 형제승계로 아직 유학의 영향이 미약함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후대로 갈수록 적장계승이 마땅한 원칙이 됐음을 이제현의 언급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적장계승의 또 하나 장점은, 연이은 국상을 면할 수 있다는 점이다. 100살 노왕이 승하하시고 승계한 동생 임금이 탈상도 하기 전에 99살 노환으로 돌아가시는 경우는 적장계승에서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과 같이 급변하는 시대에 5년 10년은 커녕 당장 내년의 정세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왕정이 지금 같은 형태로 지속될지 가늠하기도 힘든데 무슨 30년 후를 내다보겠는가. 차라리 경륜 있는 동생이 일단 맡아주는 것이 더 현명할 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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