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역사에 유례없는 '선양'의 역성혁명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조조는 역사적 평가에서 가장 불운한 인물이다. 당시 백성의 관점에서 살펴본다면 정치가로서 조조는 혼란의 시대를 바로잡은 영웅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여전히 조조라고 하면 호감보다는 반감이 앞선다.

악한 인물이 악평을 받는 건 억울할 것이 없다. 그렇다면 조조는 악한 인물인가.

 

▲ 중국 드라마 삼국지에서의 조조(왼쪽)와 사마의의 모습. 매우 의미심장한 장면이다. 조조가 사마의에게 "발바닥이 왜 하얀줄 아는가? 감춰져 있기 때문이지"라고 얘기하고 있다.

 

서기 195년 당시 낙양 일대 무정부 상태에서 고통 받던 백성들에게 조조의 입성은 드디어 살 길이 다시 열리는 순간이었다. 이각으로부터 탈출해 노숙자처럼 굶주리던 당시의 천자 헌제에게 더운 죽 한 사발을 올린 것 또한 조조였다.

삼국시대에서 양자강 이북의 중국 대륙은 조조의 영향권에 들어가면서 역내 질서가 바로잡히고 경제활동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정치면에서 조조는 절대로 악역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월이 갈수록 헌제를 압박해 아들인 조비 대에 이르러 마침내 양위를 받았다는 점 때문에 그는 불충의 대명사로 욕을 먹는다.

그렇다면 조조는 절대로 천자가 될 야심을 먹지 말았어야 했나. 현실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얘기다. 정치 역학이란 것이 그렇게 순진하지 못하다.

서한 동한 400년을 지속해 온 한나라 체제는 이미 쓴물단물 다 빠져나간 상태였다. 200년만에 한번 망한 적도 있는데 이걸 다시 일으켜세워 200년을 더 이어가다 이제는 농민봉기라는 최후의 상황도 맞았다. 기력이 다한 체제의 지속이 시대의 해법이 될 수는 없다. 당시 민중과 지식인의 입장에서, 다시 마음잡고 한 황제에게 복종하라면 상당히 맥이 빠졌을 것이다.

냉정하고 현실적인 평가에서 조조는 그다지 나쁜 점수를 받지 않는다. 그러나 정서적인 면에서 조조는 누가 봐도 확실한 악역이다.

지금 조조가 스스로 왜 욕을 먹는지 곰곰 생각해 본다면, 역시 천하통일을 못해 ‘승자의 역사’를 쓰지 못한 때문으로 자책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악평은 정치적이 아니라 정서적인 것이다. 사람들의 기분을 크게 상하게 했기 때문이다. 천하통일을 하고 못하고 문제가 아니다.

어린 임금을 허수아비로 마구 조종하고 강박하면서 부려먹는 일이 건안 연간에 매일 반복됐다는 점이 조조를 나쁜 인간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중국사에서 이런 식으로 새 왕조를 만든 사람은 조조-조비 부자 말고는 사마의-사마소-사마염 3대 뿐이다. 사마씨는 바로 조조의 위나라를 무너뜨린 장본인들이다. 조씨들이 한나라를 무너뜨린 똑같은 방식을 썼다. 조조처럼 나라를 세우면 저렇게 후세 두고두고 욕을 먹는다는 사실을 아직 몰랐기 때문에 같은 방식을 따라한 건지도 모른다.

마음대로 조씨 황제를 갈아치우고, 꼭두각시로 조종하고, 그리고는 선양이라는 형식으로 조씨를 쫓아내고 제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사마씨들은 조씨들이 저지른 일을 응징한 것으로 간주하는 정서 때문인지 그다지 욕을 먹지 않는다.

 

▲ 드라마 삼국지에서 반군을 이끌고 황궁에 들이닥친 사마의에게 위나라 태후가 황제만은 살려달라고 간청하고 있다. 앞선 한나라 황실에서 조조 일파가 황족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대접을 그의 후손들이 받고 있는 것이다.

 

제갈량이 끊임없이 북벌을 시도하는 바람에 위나라 정권이 끝내 사마씨 수중으로 들어가는 빌미가 됐다. 비록 제갈량이 한의 중흥은 이룩하지 못했어도 한을 망하게 한 조씨들에게 보복하는 건 간접 성공한 셈이다.

선양에 의한 왕조 교체는 삼국시대 무렵의 한-위, 위-진 뿐이다.

상고시대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물려주듯 덕 있는 새 임금이 혈통을 뛰어넘는다는 이론에 따른 것인데, 식자들은 그게 다 허위고 힘을 가진 자의 역적질이라고 비판을 한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왕조 교체하는 길은 조조의 방식이 백성들에게는 가장 평화적인 것이었다. 그 과정에 힘없는 왕실을 육체적, 정신적 학대하는 일이 생겨서 두고두고 욕을 먹게 됐다.

옛날 얘기를 사극으로 보는 시청자의 관점에서는 말을 달려 군대를 지휘하고 나라를 세우는 사람이 영웅으로 보인다. 신하로서 임금을 구박하고 괄시하는 인간은 남의 회사를 가로채려는 못 된 직원처럼 보이기도 하고 영 호감을 살 수가 없는 일이다. 시청자들은 대부분 사극 속의 잘 나가는 사람들과 자신들을 동일시하게 마련이다. 이름 없는 다수 대중으로 밭일하다 매 전투 때마다 영장 받고 입대하는 서민을 중심으로 사극을 만드는 작가는 없기 때문이다.

중국 역사에 최초의 왕조 교체를 남긴 주나라의 패업은 전쟁으로 이뤄졌다. 서쪽에서 흥기한 주나라가 점점 강대해져 마침내 무왕이 군사인 강태공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황하 유역의 은나라에 공격을 감행했다. 양군은 목야에서 마주쳐 주나라가 대승을 거뒀다. 무왕은 은나라의 수도 조가성으로 입성해 자결한 은나라 주왕의 목을 자르고 태자인 무경을 유폐했다.

조비가 헌제를 폐위시킨 후 산양공으로 보내 편한 여생을 보내게 한 것은 여기에 비하면 대단히 자비로워 보인다. 삼국지연의에서는 헌제를 죽인 것으로 묘사했지만 그건 정사와 다른 소설의 얘기일 뿐이다.

주나라는 800년 동안 천자의 지위를 누리면서 갈수록 힘이 약해져 예전 자신들의 본거지인 함양에서 크게 국력을 일으킨 진나라에게 무너졌다. 전국시대가 200년 지속되는 동안 주나라 천자를 인정하는 사람도 거의 사라졌다. 마치 행정구역을 진나라에 귀속시키듯 주나라 역사는 막을 내렸다.

그래도 수 백 년 천자가 물러나는데 힘 한번 안 써볼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주의 난왕은 각국에 연합군을 요청하고 군대를 일으켰다. 그런데 전비조차 부족했다. 채권을 발행해 군사를 모아 진나라에 맞섰다.

그러나 연합군의 손발이 맞지 않아 싸우지도 못하고 군대가 흩어졌다. 채권을 가진 사람들은 왕궁으로 몰려갔다. 난왕은 빚쟁이들을 피해 누각으로 도망가 그곳의 이름이 피채대가 됐다.

진나라 군대는 싸울 필요도 없었다. 돈 떼먹은 임금을 위해 죽기로 싸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때는 진시황제의 증조부인 진소양왕 치세다.

15년의 짧은 통일을 누린 진나라는 3세 자영이 패공 유방(한고조)에게 1차 항복하면서 망했다. 곧 이어 함양에 입성한 항우에게 다시 항복을 했는데 항우는 자영을 처형하고 아방궁을 파괴했다.

400년 후에는 유방의 자손인 헌제가 조조 아들 조비에게 옥새를 바치는 선양의 형식으로 대륙의 주인이 바뀌었다.

그러나 조조 자손들은 조조 조비가 한황제에게 했던 거의 똑같은 대접을 사마씨들에게 받다가 쫓겨났다.

하지만 사마씨들의 운명은 조씨들보다 더 혹독했다. 북방에서 밀려 내려온 이민족에게 도성을 뺏기고 황제는 이들의 술시중을 들다가 처형당했다.

이후 중국의 왕조 교체는 ‘선양’의 형식이 한 번도 이뤄지지 않았다. 200년 정도 통일 왕조가 지속되다 망할 무렵에는 곳곳에서 군벌이나 이민족의 소요가 끊이지 않는 혼란기가 찾아왔다.

혼란을 일소한 새로운 영웅이 대륙전체의 카리스마를 얻어 새 왕조의 창업군주가 됐다. 당나라의 고조 이연과 태종 이세민, 송나라 태조 조광윤은 모두 군벌 출신이다. 명나라 태조 주원장은 몽고의 원나라를 몰아내는 군벌 가운데 한 사람이다.

명을 대신한 만주족의 청나라는 이자성의 반란으로 무너진 명나라를 구원한다는 형식으로 자금성에 들어왔다. 만주족들이 직접 명나라 황제를 끌어내린 것이 아니다.

청나라는 자금성에 들어오자마자 자결한 명나라 숭정황제의 장례식부터 황제의 예법으로 치렀다. 그리고 이자성의 도적떼를 몰아낸다는 명분으로 중국 대륙을 차지했다.

이러한 왕조 교체의 사례들 가운데서는 오히려 조조의 방식이 가장 평화적이었던 것이다.

다른 사례들은 전쟁을 수반해 무수히 많은 백성이 죽고 다쳤다. 그런데 조조의 선위 방식은 백성들의 유혈희생을 전부 황제 한 사람에 대한 핍박으로 바꾸고 있다.

이 시대 일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사람에게는 심정적으로 조조의 무정함이 더욱 부각되게 마련이다. 하지만, 주나라와의 목야 전쟁에 수많은 은나라 조가의 백성들이 징발되는 것과 같은 고난은 낙양이나 장안, 허창 등 한나라 주요도시 백성들과는 무관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400년이나 내려온 사직을 조조 시키는 대로 곱게 내준다는 건 옛날 사람들 정서체계에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긴 했다. 한나라 헌제의 부인들이었던 복황후와 동귀비가 국권회복을 하려다 친정아버지들과 함께 목숨을 잃었다.

황실 지친들에게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혹독한 고난의 과정을 거친 역성혁명이었지만 대중들은 고단한 일을 면했다. 남쪽과 서쪽에서 손권, 유비와 대치한 것은 별개의 상황이다.

한국사에서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건국이 조조와 같은 방식이다. 고려태조 왕건이 후삼국의 수 십 년 내전을 거친 것과 달리 조선 건국 과정에서는 대중들의 수난이 아니라 왕씨들의 고난이 부여됐던 것이다.

 

▲ 드라마 '정도전'에서 창왕 폐위를 정몽주에게 항의하는 정비 안씨. 삼국지 위나라 태후와 비슷한 처지다. 그녀는 후에 옥새를 이성계에게 내주는 일까지 해야 했다. 선양을 통한 역성혁명에서는 특히 왕실의 여성들에게 괴로운 일이 맡겨졌다.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은 진정한 영웅인데, 최영을 죽이고 공양왕을 몰아낸 이성계는 배신자라는 역사의 원망도 따라다니고 있다. 따지고 보면 이것은 백성이 편안한 반대급부일지도 모른다. 조조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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