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직된 친명외교, 주범은 인조 개인이 아니다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만약 지금의 한국 국민들이 1636년 조선시대의 임금이나 대신으로 태어났다면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9년 전 청나라와 맺은 화친을 완전 무시하고 전쟁을 감수하느냐 아니면 청이 새롭게 요구해 온 대로 조선이 앞장서서 청나라 왕을 황제로 추대하고 이제 형제의 의가 아닌 군신의 예로 받들어 모시느냐다.

전자는 실제로 인조의 조선 조정이 선택한 사실이다. 그 결과로 병자호란의 혹독한 수난을 겪었다. 지금의 한국 사람들 절대 다수는 인조가 후자를 선택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만약 지금의 한국 사람들이 1636년 조선시대에 살았다면 이론의 여지없이 청나라의 신하 국가가 되는 것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였을까.

국사, 세계사를 공부한 지금의 지식은 당연히 갖고 있지 않다는 전제조건이다. 지금 우리가 보여주는 행태 그대로 그 시대에 대입하면 인조와 다른 결론이 나왔겠냐는 것이다.

내가 봐서는 별로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사람들의 역사 지식은 지우고 성향만 그대로 남겨놓고 타임머신을 태워 그 시대로 보내면 삼전도 패전의 역사는 그대로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 드라마 '꽃들의 전쟁'에서 이덕화가 인조를 연기하고 있다.

 

지금 인조가 바보였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일수록 보여주는 모습이 당시의 척화론자들과 더욱 닮았다. 인조한테 한바탕 욕을 퍼붓던 사람이 중동에서 무슨 일이 나면 “무슨 비전투부대냐. 미국에게 보답하기 위해 최정예 전투부대를 보내라”는 걸 보면 한국 사람들 수 백 년이 지나도 참 일관적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다.

척화론을 굽히지 않다가 삼전도의 패전 후 모진 박해를 받은 사람들이 충신으로 평가되고는 있지만 전쟁 전에 이들이 보여 준 사고방식은 상당히 실망스런 면도 섞여 있다. 이들의 상소  중에는 임진왜란에 대해 “임진년의 일은 조그마한 것까지도 모두 명나라 황제의 힘”이라는 주장도 들어있다.

수 십 년 지난 시대 서포 김만중이 “한양이 무너졌는데도 백성들이 조선 왕실을 버리지 않고 의병 투쟁한 덕택”이라고 평가한 것과 비교해도 개탄을 금할 길이 없는 사고방식이다.

이 사람들이 갖고 있던 세계관에서 저런 자기비하적인 생각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당시 청나라와 명나라의 군사력은 14만 대 300만이라고 했다. 이것은 나름 객관적인 분석이고 특히 임진왜란의 기억도 있는 조선 식자층의 체감 비교는 이보다도 더 훨씬 컸을 것이다.

‘청나라 대 명나라’는 지금의 ‘중국 대 미국’과는 비교할 바도 아니고 ‘우크라이나 대 러시아’ 정도로 보이지 않았을까. 그러니 저렇게 눈앞의 청나라 군대를 외면하고 오로지 명황제 칭송만 하고 있는 것이다.

인조는 이런 신하들이 주류를 이룬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다. 실록에서 상소에 비답하는 모습을 보면 그나마 인조가 신하들에 비해 균형 잡히고 냉정한 판단의 소유자다.

청나라 용골대와 마부대가 사신으로 왔을 때 기개를 드러내려는 신하들은 사신의 목을 베라는 상소를 줄지어 올렸지만 인조는 그때마다 “경의 기개가 가상하지만 사신을 대하는 일은 좀 더 지켜보도록 하자”고 타일렀다. 척화 신하들이 주화파의 거두 최명길을 ‘왕따’라도 시키듯 툭하면 벌을 주라는 상소를 올릴 때는 상소문의 언사가 거칠다며 몇몇 신하를 벌주기도 하면서 물리쳤다.

훗날 봉림대군 세자 책봉 때도 인조의 이런 면모가 보인다. 전날 엄청난 논쟁 끝에 인조가 책봉을 밀어붙이자 다음날 신하들은 돌변해서 “잠저에 계신 세자저하의 예우와 경호를 대폭 늘립시다”고 호들갑을 떨지만 인조는 이런 요청에 일일이 “그 반으로 정해서 시행하라”거나 묵살하는 식으로 찬물 끼얹기를 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사세 판단이 정확하고 절대 정국 운영에 무리를 하지 않았던 사람으로 보인다. 다만, 그가 집권하게 된 양대 요인 중 하나인 친명 사대 때문에 국제 정세에 대한 판단을 과감하게 정책에 반영하는 데 제약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병자호란의 전조는 1635년 저 멀리 몽고 초원에서부터 시작됐다. 청 태종의 이복동생인 도르곤이 북원을 공격해 원나라 황제들이 쓰던 옥새를 차지했던 것이다.

 

▲ 청태종 홍타이지의 이복동생 도르곤은 북원 정벌에서 원나라 황제가 쓰던 옥새를 얻었다. 이를 계기로 홍타이지는 조선에게 자신의 황제 추대를 앞서줄 것을 요구했고 이것이 병자호란의 직접 계기가 됐다. 중국 드라마 '대청풍운'에서 도르곤(오른쪽)으로 등장한 장펭이가 전투를 지휘하는 모습.

 

대원제국의 옥새는 청 태종 홍타이지에게 새로운 야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용골대와 마부대 두 장수를 조선에 사신으로 보내 조선이 앞장 서 자신을 황제로 추대해 주기를 요청했다. 청나라는 이 때 이미 많은 몽고 국가를 속방으로 두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양떼를 몰다가 말 타고 나가 싸울 줄만 알았지 예법은 커녕 글은 근처에도 안가는 무리들이다.홍타이지는 조선이 격식을 갖춰주면 즉위식이 구색을 갖출 것으로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보다는 정묘년 화친을 파기할 구실로 이런 요구를 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이 사신이 도착한 것이 1636년 2월16일이다. 병자년 들어서도 그 때까지 조선 조정은 인열왕후 국상과 같은 일에만 매달려 있었고 만주족과의 전쟁은 9년 전 일로 여기는 분위기였다.

난데없이 사신들이 나타나면서 한양 천지가 완전히 뒤집혔다. 정묘년 화해에 불만이 많았던 척화파들은 이를 계기로 ‘금’과의 단교를 주장했다. 이들은 청이라는 국호를 쓰는 자체가 황제라고 인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청의 국서 접수 자체를 거부하자 2월26일 사신은 화가 나서 귀환 길에 올랐다. 이들은 가는 도중 조선 조정이 평안도에 “전쟁에 대비하라”고 보내는 서신까지 빼앗게 된다. 이 서신은 조선이 정묘년 화해를 깼다는 구실이 됐다.

그 해 내내, 인조는 전쟁이 나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신하들을 불러 고민했다. 그러나 신하들의 상소는 어떻게 전쟁을 준비할 것이냐 보다 ‘금’에 대한 척화파의 기개를 어떻게 보여주느냐에 더 몰두했다.

간간이 사신의 왕래는 그치지 않았다. 청의 심양에 갔던 조선 사신은 금나라 왕을 청나라 황제로 표기하고 조선에 대해 형제의 예를 버리고 군신의 예로 ‘너희 나라’로 칭한 국서를 받고 전전긍긍했다. 이들은 마침내 청의 국서를 숙소에 버려두고 귀국해 인조에게 말로 전말을 보고했다.

건수를 찾던 조선의 신하들은 또 다시 좋은 표적을 찾았다. 홍타이지 면전에서 국서를 내던지지 않았다 해서 사신을 참하라는 상소가 빗발쳤다. 이들은 “오랑캐와의 화친을 내던진 후 싸워보자는 장한 분위기가 전국에 가득하다”고 강변했다. 그 결과를 몇 달 후 직접 확인하게 될 운명이었다.

폭풍전야라는 말처럼 전쟁이 기정사실화되고 나면 천지는 오히려 조용해진다. 2월 청의 사신을 박대한 이후 내내 인조는 척화파들의 말의 성찬 속에서 지내왔다.

9월, 앞서 사신으로 왔던 마부대가 의주의 임경업을 찾아왔다. 구실은 인삼 값을 준다는 것이었다.

이 자리에서 임경업은 조선 조정이 청나라, 조선 조정의 표현으로는 금나라 왕에게 보내는 격서를 전하려고 했다.

마부대는 “우리나라는 제단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지내고 이미 대호(大號. 황제)를 칭하였는데 어떻게 조선을 위해 옛 칭호(왕)를 다시 쓸 수 있겠는가”라며 “황제가 여러 왕자들과 더불어 매번 이르기를 ‘조선은 아녀자의 나라인데 무엇을 믿고 저러는가’ 하고 항상 웃는다”고 비웃었다.

대책 없이 11월이 되자 인조는 마침내 이대로는 안된다는 판단을 하기에 이르렀다. 청나라가 약간의 화해를 암시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다시 사신을 보낼 준비를 시작한다. 하지만 이 또한 “또 다시 화해를 청한 자에게 사약을 내립시오”라는 논쟁으로 옥신각신한다. 심지어 국서에 ‘청’이라는 국호가 들어간 것까지 시비거리가 됐다.

사신이 출발한 후인 12월4일에도 돌아오게 하라는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로부터 9일 후 도원수 김자점으로부터 청군이 안주에 나타났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최고의 기동력을 자랑한 청나라 팔기군은 김자점의 보고가 조정에 도달했을 때 이미 도성에 바짝 근접하고 있었다. 외교를 재개하는 사신은 보낼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13년 전, 인조가 반정을 일으켰을 때 유폐돼 있던 인목대비는 교서를 통해 그의 반정을 승인했다. 교서에는 “우리나라가 중국 조정을 섬겨온 것이 200여 년이라, 의리로는 곧 군신이며 은혜로는 부자와 같다. 그리고 임진년에 재조(再造)해 준 그 은혜는 만세토록 잊을 수 없는 것 ... 광해는 배은망덕하여 천명을 두려워하지 않고 속으로 다른 뜻을 품고 오랑캐에게 성의를 베풀었으며, 기미년 오랑캐를 정벌할 때에는 ... 끝내 전군이 오랑캐에게 투항함으로써”라고 비난했다.

태생적으로 친명사대로 시작할 수밖에 없는 정권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사실 인조나 인목대비의 개인적 선택이라기보다는 당시 조선 식자층 주류의 본성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광해군의 정권이 취약했던 건 주류의 본성을 거슬렀기 때문이다. 동생의 복수를 갚고자했던 능양군(인조)에게 취약한 정권은 왕위를 노려볼 계기가 됐다.

반정을 통해 보위를 차지한 그에게 ‘주류에 거스르지 말라’는 생존의 필수조건이 됐다. 아무리 세상이 어찌 돌아가든 주류가 그것을 외면한다면 비교적 세상을 정확히 들여다보는 왕조차도 선택의 여지가 없다. 조선의 식자층이 세상을 제대로 들여다보기 위해서 병자년 무고한 민중들이 고난을 치러야 했다.

병자년의 죄인이라면 인조 개인이 아니라 조선의 잘난 척하던 여론주도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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