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타자 피하고 강정호 고르다가 주자 일소 2루타 맞아

▲ 강정호가 2루타를 작렬하는 순간. 노란색 원 안은 우중간 담장을 향해 날아가는 야구공. /MLB.com 동영상 화면캡춰.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인기 만화 드래곤볼에서 사이아인 베지터는 ‘나쁜 남자’의 전형이다. 목표를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 주위 사람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다.

그런데 그것이 자신의 탐욕을 위해서가 아니다. 우주 최고의 싸움꾼이라는 명예를 위해서다. 그래서 강한 적이 나타나면 더욱 투지를 불태운다. 누가 봐도 명백한 악역 베지터가 독자들에게 은근히 호감을 사는 이유다. 만화 주인공이자 최강의 전사 손오공에 대한 베지터의 경쟁심은 두 말할 것도 없다.

인터넷 공간에는 드래곤볼 캐릭터를 가지고 야구타순을 만든 것이 있다. 이 패러디는 야구의 특성과 드래곤볼 캐릭터들의 특성을 잘 살린 데다 기발한 재치를 더해서 많은 인기를 끌었다. 4번 타자는 손오공, 5번 타자가 베지터다.

여기서 베지터가 하는 말. “카카로트(손오공을 베지터는 이렇게 부른다)를 고의4구로 거르면 피가 거꾸로 솟는다.”

야구에서 고의4구는 박빙의 승부에서 승리를 굳히려는 작전이다. 무시무시한 강타자를 피하자는 것이다. 자신을 피하는 상대투수를 보면서 타자는 뿌듯한 자부심도 느낄 수 있다.

2006년 제1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미국 메이저리그 선발팀은 어디서 듣도보도 못 했을 법한 한국 팀이라는 선수들과 대결했다. 그런데 이들의 상식과 달리, 경기 중반까지 1대3으로 한국 팀에게 제압당하고 있었다.

이 선수 저 선수가 전부 ‘Lee’라는 이름을 달고 나와 누가 누군지 헷갈리는데 그중에 1루수 ‘Lee’는 20승 투수 돈트렐 윌리스에게 1회 투런 홈런도 기록했다.

1루수 ‘Lee’ 이승엽이 또다시 타석에 등장했다. 투아웃에 주자가 2루였다. ‘명색이 메이저리그인데’라는 허세를 부릴 때가 아니었다.

메이저리그 포수가 벌떡 일어서 4개의 공을 받는 장면은 한국의 야구팬들 모두 짜릿한 감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전 세계를 완전 압도하는 야구 종주국 미국 대표팀이 저토록 이승엽에게 겁을 먹다니.

다음 타석에 대타로 등장한 최희섭은 3점 홈런을 터뜨려 점수는 6대1로 급격히 벌어졌다.

고의4구 작전에는 다음 타자의 투지를 끌어올리는 부작용이 있다. 물론, 고의4구 작전이 실패했을 때 원인이 급상승한 투지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실력 때문인지 판명하기는 어렵다.

22일 오전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와 시카고 컵스의 경기에 한국 프로야구 출신 강정호가 선발 출장했다. 두 번째 타석에서 모처럼 안타를 쳤지만 6회까지 여전히 16타수 2안타 0.125에 불과했다.

7회 5대5 동점에서 피츠버그를 상대하는 시카고 투수는 제이슨 모테. 2012년 42세이브로 구원왕이 된 베테랑이다. 투 아웃 주자 1, 3루에서 타석에는 피츠버그 5번 타자 스탈링 마르테. 사실 모테에게 별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다음 타자가 강정호였다. 5번 거르고 1할대 6번타자를 아웃잡으면 벗어나는 위기상황이다. 과연 마르테는 고의 4구로 걸어나갔다.

이게 강정호에게 “나를 증명할 시간이 왔다”는 투지를 되살려줬다. 한마디로 “나를 만만히 봐? 미안허지만 너는 오늘 좀 맞아야 쓰겄다”는 멘탈이 작동했을 법하다.

강정호는 시속 155km에 달하는 직구를 받아쳐 우중간으로 넘어가는 3타점 2루타를 작렬했다. 순식간에 팀에 8대5의 리드를 안겨준 것이다.

 

▲ 제이슨 모테의 표정은 '잘못된 선택'이 어떤 것인지를 잘 표현해 주고 있다. 10여초전 5대5였던 좌측 상단 점수는 8대5로 바뀌었다. /MLB.com 동영상 화면캡춰.


피츠버그 불펜의 난조로 9회 4점이나 내준 바람에 피츠버그의 승리는 날아갔다. 하지만 강정호 덕택에 한국 야구가 시원한 승리를 하나 얻었다. 한국 야구에서 홈런 40개를 쳤어도 메이저에서는 만만히 고를 상대라고 무시하던 오만함에 통쾌한 한 방을 먹여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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