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국의 판서가 벌꿀 따위나 들고 다니느냐"는 일갈에 담긴 사연

[초이스경제 장경순의 만필세상] 원로 연기자 신구는 영화 ‘반칙왕’에서 파리채 하나로 아주 막강한 인상을 남겼다. 영화의 대전환점, 송강호가 마스크를 쓰고 숨겨진 정체성을 찾는 순간이다.

▲ 연기자 신구. /사진=뉴시스

아버지 신구에게 새로운 결의를 다짐하는 엄숙해 마땅할 자리였다. 그러나 프로레슬링 마스크를 쓴 아들을 보자마자 신구 노인은 “임마 언제 사람될래!”라며 파리채를 마구 휘둘렀다. 송강호는 진지한 얘기 한마디도 못 꺼내고 아버지로부터 급히 피신했다.

요즘 젊은 영화팬이나 시청자들은 신구라고하면 망가지기 잘하는 노인으로 기억하기 쉽다. 그와 관련해 떠오르는 대사는 “니들이 새우 맛을 알아?” 그리고 “4주후에 봅시다”가 있다.

하지만 그는 원래 노재상 전문 배우였다.

1973년 KBS 드라마 ‘이율곡’에서 이율곡으로 나왔고 1976년 같은 방송국 ‘황희’에서 황희로 나왔다. 무려 40년 전인데 이미 그때부터 노인 역에 잘 나왔다.

1980년에는 노재상에다 명장의 이미지를 더 해서 김종서로 나와 수양대군 김흥기와 대결을 펼쳤다. 이 때 여진족 추장이 김종서에게 바친 딸 야화가 정애리다. 이혼법원의 동료법조인이 30년 전에는 세대와 국적을 초월한 부부였던 거다.

1976년 ‘황희’가 방영될 때 나는 국민학교 5학년이었다. 이 드라마에서 우리역사에 왕이 세 명이나 살아있던 적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세 명의 전하는 ‘태상왕(태조 이성계)’ ‘상왕(정종)’ ‘주상(태종)’으로 구분했다.

태종 이방원에는 남성우, 태종비 원경왕후 민씨 박원숙, 태조 이성계로 문오장이 등장했다. 이 드라마에서 받은 인상이 너무나 강렬해서 나는 성장해서 역사 공부하는 내내 이 인물들이 등장하면 ‘황희’의 연기자들이 자동으로 연상됐다.

태종이 처가인 민씨 집안을 숙청했을 때 원경왕후 박원숙이 “주상은 어디 갔느냐!” 일갈하면서 대전의 문을 벼락같이 열어젖히던 장면은 40년 전 느낌 그대로 남아있다. 왕이 왕후로부터 도망간 대전은 그 때 비어있었다. 태종역의 남성우는 1970년대의 유동근에 해당하는 배우다. 굵직한 외모와 부리부리한 눈초리, 무게감 있는 목소리가 군왕의 카리스마에 제격이었다. 몇 년 앞선 드라마 ‘강감찬’에서는 거란 성종의 40만 침략에 맞선 고려군 총사령관 강조로 등장했었다.

사극은 전쟁 장면이나 후궁 암투 같은 요소가 있어야 흥행이 된다고 하지만, 유명한 소재로 만든 사극만 한 두 개 본 사람들 얘기다.

진짜 사극을 성공시키는 건 시청자에게 친근한 카리스마를 주는 연기자다. 아무리 평생을 책만 읽고 상소문 올리면서 등청 퇴청으로 지샌 사람의 일생이라도 맛깔스런 연기의 소유자가 맡으면 사극 팬들은 그대로 몰입이 돼 최종회를 함께 한다. 수양대군의 역적질을 다룬 ‘왕과 비’는 ‘한명회’ 최종원의 등장 씬에서 리모컨을 이리저리 돌리던 시청자들을 붙잡는 접착력을 발휘했다.

성군 세종의 32년 성치에는 황희와 함께 또 한명의 명재상이 등장한다. ‘맹고불’ 맹사성이다. 청렴한 그의 자가용은 가마도 아니고 말도 아닌 누렁 소였다. 온양 고향을 갈 때도 소를 타고 갔다. 지나가는 고을 수령이 “곧 좌의정 맹사성 대감 지나가실 텐데 썩 못 비키냐”고 호통을 쳤다. 부총리 리무진 지나가실 길에 허름한 중고차 탄 노인을 쫓아낸 것이다. 허름한 중고차가 바로 부총리 리무진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수령은 관인을 연못에 빠뜨릴 정도로 영혼을 상실했다고 한다.

나이는 맹사성이 세 살 위지만 벼슬은 황희가 영의정으로 좌의정 맹사성보다 높았다.

▲ 세종조 명재상 황희 초상.

‘이조상신사(윤갑식 편저. 명문당. 1975년)’라는 책에 황희와 맹사성의 일화가 소개돼있다.

6진개척의 영웅 김종서가 판서 직을 제수 받고 함경도 변방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김종서는 황희정승이 해수(咳嗽. 기침병)로 고생한다는 얘기를 듣고 벌꿀을 구해왔다.

그러나 젊은 판서의 정성을 대하는 노정승은 까칠하기 이를 데 없었다.

“빈청에는 예빈시가 있으니 배가 고프면 음식을 시켜 먹을 것이요, 병이 나면 약을 지어 먹을 것인데 일국의 판서가 뭐 할 일이 없어서 벌꿀을 들고 다니느냐”고 크게 꾸짖었다.

지켜보는 맹사성 정승에게 김종서가 참으로 측은해 보였다. 금덩어리도 아닌 벌꿀로 밉지 않은 처세를 좀 한 것인데 저리 난리를 칠 것이 또 무언가. 김종서가 물러간 후 황 정승에게 “너무 과하지 않소?”라고 따졌다.

“김종서 사람됨은 맹 대감이나 내가 잘 아는 바 아니요? 대감하고 내가 죽으면 나라 일 맡길 사람이 김종서 밖에 없지 않소? 우리는 지금부터 그 사람을 옥으로 두들겨 만들어야 하니 한 마디 좀 한 것이지”라고 황희가 대답했다. 세종 성군이 신하들에게 훗날을 당부한 어린 단종을 죽음으로써 끝까지 지키려한 충신 김종서가 이렇게 단련됐다.

중국 ‘정관의 치’ 당태종에게 방현령과 두여회가 있다면 조선 세종에게는 황희와 맹사성이 있다.

황희는 태종에게 발탁됐지만, 양녕대군의 세자 폐위를 반대하다 파직 당했다. (양녕대군이란 군호는 폐위 후 주어진 것임을 덧붙인다.) 세종이 자신의 즉위를 반대한 인물을 오히려 24년 정승, 18년 영의정으로 중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나는 황희의 중용에 대해 태종 이방원이 제왕학의 기법을 구사한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후대에 쓸 만한 인재라면 지금 벌을 줬다가, 아들이 왕이 됐을 때 다시 불러들여 은혜를 베풀면서 충성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당태종 이세민은 오랜 세월 전쟁터를 함께 달린 명장 이적을 갑자기 사천지방으로 좌천시켰다. 발령을 내리면서 이적이 조금이라도 불만의 기색을 보이면 그 자리에서 참하라고 명했다. 태자(고종)에게는 “네가 즉위한 후 이적을 다시 중용하면 그는 너의 은혜를 충성으로 보답할 것이다”라고 일러줬다. 이적은 인사 발령을 받자 집에도 들르지 않고 사천을 향해 떠났다. 그리고 고종 즉위 후 돌아와, 고구려를 무너뜨리는 원정의 총사령관이 됐다.

조선 태종 이방원이 황희에게 이런 제왕술을 구사했다는 얘기다. 황희에 대한 태종의 본심이 드러나는 대목이 있다.

보위를 세종에게 물려주고 상왕을 거쳐 태상왕이 된 1422년, 세종과 신하들이 있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 도형·유형으로 안치된 사람들은 나의 백년 뒤(사후를 뜻한다)가 되면, 주상이 반드시 부왕 때의 죄인이라 하여 놓아주지 아니할 것이다. 그러므로 일찍이 황희와 이직을 불러 서울로 돌아오게 한 것이다.”

황희의 복직은 세종 즉위 후에 이뤄졌다. 태종은 황희에게 벌을 주면서도 아들이 다시 불러 쓸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정통 사극에 솜씨가 있는 연출자가 황희와 맹사성을 제작해 1976년 신구의 후계자를 찾아줬으면 한다. 추천을 해보자면 단골 ‘쿠데타 컴비’ 서인석 이덕화는 어떨까.

이전 만필에서 나는 서인석, 이덕화 두 사람이 고려, 조선, 대한민국을 오가며 세 차례나 쿠데타를 합작했다고 소개했었다. 쿠데타만 하지 말고 태평성대의 정책 파트너도 해 볼만 하다. 두 사람 다 역사 속 다양한 인물을 소화해내는 연기력과 시청자들에 대한 친근한 카리스마의 소유자다. 두 정승처럼 서인석 이덕화도 세 살 차이다.

▲ 이덕화는 1970년대 MBC 이계인과 함께 양대 '불량청소년'이었다. 이계인에게는 '제3교실'이란 고정무대가 있어서 매주 이정길 교사에게 쫓겨다녔지만 이덕화는 주로 TBC 일일극에서 예쁘고 가난한 여주인공 누님을 더욱 힘들게 하는 말썽꾸러기였다. 그러나 연륜이 쌓이면서 다양한 성격묘사를 탁월하게 해내고 있다. 사진=뉴시스
▲ 임금으로만 나왔던 서인석이 드라마 '정도전'에서는 최영으로 모처럼 노대신의 면모를 과시했다. /사진=KBS 화면캡춰.

관련기사: 역대 최강의 쿠데타 콤비 서인석-이덕화

 

실록이나 이런저런 경로로 전해 내려오는 얘기들을 모아보면 훌륭한 사극 캐릭터가 탄생하지 않을까. 황희와 맹사성 정도 인물이라면 해당 문중이 갖고 있는 자료도 풍부할 것이다.

최근 황희와 관련해 해당 종친회가 발끈하는 일이 있었다. 아무리 역사의 위인이라도 해당 문중이 조상에 대해 더 많은 자료를 보관 숙지하고 있게 마련이다. 잘못된 사실을 앞장 서 바로잡는 일은 종친활동의 순기능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것을 후손들의 명예까지 결부 짓는 건 오늘날 민주세상의 원칙에 어긋난다. 훌륭한 조상이 후손 명예를 높인다면, 그런 조상 없는 사람은 인생을 불명예스럽게 출발하는 것인가.

누군가 나의 조상을 왜곡하고 있다면, 충분한 근거로써 그 작자의 무지함을 드러내 망신을 당하게 하는 선에 머무르는 것이 마땅하다. 영화에서 우리 조상 나쁘게 나왔다고 소송을 건다면 동탁 진회 위충현 등 무수한 간신 역적이 등장했던 중국에서 ‘삼국’ ‘대청풍운’과 같은 걸작을 어떻게 만들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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