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가장 큰 의미였던 자식으로 절대 권력인생 최대의 좌절 경험

[초이스경제 장경순의 만필세상] 임금이 정승 판서를 마음대로 바꿔도 함부로 바꿀 수 없는 것이 세자다. 첫째, 저 못난 자식 그나마 세자에서 쫓아내면 온 세상이 하이에나처럼 덤벼들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절대 권력을 갖고 있는 임금이다. 이런 막강한 힘으로 세자를 세자답게 만들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임금이 태자나 세자와 같은 저군(儲君)을 바꾸기에 이르는 것은 두 가지 이유가 다 사라졌을 때다. 우선, 임금이 자신의 한계를 인식해 더 이상 내 자식 다른 사람 만들기를 포기했을 때다. 폐세자의 결심은 여기서 비롯된다.

그 다음, 저군의 지위를 박탈하더라도 세상이 이 자식의 여생만큼은 보전해 줄 장치를 마련하고서 폐세자를 실천한다.

임금이 한계를 인식한다는 건 ‘하늘의 자식’으로 스스로 여기며 살아온 생애에 정신적으로 가장 큰 좌절을 의미한다. 내가 없는 세상을 생애 처음으로 심각하게 고민하게 된 결과, 마침내 눈물을 쏟으면서 자식의 용포를 벗겨내는 것이다.
 

▲ 1998년 KBS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태종이 폐세자를 명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실록에서도 태종이 폐세자를 정하고 대신들 앞에서 목이 맬 정도로 통곡했다고 한다./CNTV 화면캡쳐.


조선 태종 이방원을 봐도, 폐세자라는 사건이 이 혈기왕성하던 군주의 생애를 얼마나 급속도로 단축시키는지를 알 수 있다.

즉위 18년만인 1418년 6월 3일 대신들을 모아놓고 세자 이제를 폐하고 충녕대군을 세자로 삼았다. 함부로 입을 열지 못하던 대신들이 임금의 뜻을 확인하고 “신 등이 이른바 어진 사람을 고르자는 것도 또한 충녕 대군을 가리킨 것입니다”라고 말을 꺼내자 왕은 통곡해 흐느끼다가 목이 매었다고 실록에서 전한다.

역사에서 훌륭한 선택을 한 순간으로 의심의 여지없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그와 별개로 큰아들을 내치는 아비의 비통한 심정이 생생하게 담겨있다. 폐세자 이제는 이틀 후 양녕대군으로 강봉됐다.

이 때부터 태종의 일생 시계가 급속히 돌아간다. 두 달여가 지난 8월10일, 세자에게 양위했다. 왕권을 노린다는 명목으로 많은 공신 뿐만 아니라 네 명의 처남, 한 사람의 사돈대감을 처형한 이방원이다. 그런 사람이 세자 책봉 두 달 만에 왕위까지 물려줬다.

태종이 승하한 것은 이때로부터 4년 후인 1422년 5월 10일이다. 우리 나이로 쉰여섯. 한 차례 정변을 성공시키고 두 차례 군사반란을 몸소 진압한 당대 영웅으로는 많다고 할 수 없는 나이다.

특히 그의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폐세자 이후의 약 4년 동안 급속도로 진행됐다. 삶의 커다란 축을 상실한 모습이 상상된다.

▲ 청나라 전성기를 이끈 4대 황제 성조 강희제의 초상. 8살에 즉위한 그는 20세 때 사랑하는 아내 효성인황후가 목숨을 버리며 난산 끝에 낳은 아들 윤잉을 바로 태자로 책봉하고 평생의 희망으로 삼았다. 그러나 54세때 윤잉을 폐태자하면서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다음해 윤잉을 복위시키며 심신의 안정을 되찾았지만 57세때 다시 폐태자하기에 이르렀다. 윤잉을 폐위하면서 강희제는 황태자를 정하는 제도마저 없애버렸다.

청나라의 애신각라 윤잉은 4대 황제 성조 강희제의 적장자다. 모후 효성인황후는 강희 13년인 1674년 난산 끝에 윤잉을 낳고 숨을 거뒀다. 강희제는 죽은 아내를 위해 다음해 강보에 쌓인 윤잉을 황태자에 책봉했다. 의정회의로 후계를 정하던 만주족 풍습에 어긋나는 결정이었다. 그만큼 세상을 떠난 아내와 막 태어난 그녀 소생에 대한 애착이 담겨 있다.

윤잉 또한 강희제에게는 태자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강희제 삶의 가장 큰 의미가 담긴 아들이었다.

그러나 강희 47년, 황제는 윤잉을 폐태자했다. 윤잉의 외척이 모반을 벌이다 들통난데다 근신해야 할 윤잉이 부정한 행각을 저지른 탓이다. 혐의는 상당히 뚜렷해 음모론을 들이댈 여지도 없었던 듯 하다.

강희제는 50 중반을 넘어가는 시기에 생애 최대 시련을 맞게 됐다. 여덟 살에 즉위해 한 치 빈틈없던 통치가 근본부터 휘청거렸다. 그렇다고 병이 심각한 건 아니어서 강희의 치세는 앞으로도 한동안 지속돼야 했다.

이 아들 내버리면 살아도 살아있는 삶이 아닌 것을 깨달은 황제는 마침내 쫓아낸 아들 윤잉을 다음해 복위시켰다. 안정을 되찾아가던 정치는 3년 후인 강희 51년 다시 엄청난 사건을 맞았다. 윤잉이 사사로이 군권을 발동했던 것. 모반에 해당하는 행동이었다.

강희는 두 번째 폐태자를 하면서 아예 황태자라는 자리를 없애버렸다. 이 후 청나라 황실은 황제가 생전에 작성한 전위유서를 승하 후 발표하는 방식으로 후계를 이어갔다.

이 때부터 강희의 삶은 자신의 사후를 준비하는 일에 집중됐다. 평생의 가장 큰 희망을 내던진 강희에게 죽음은 이제 그리 멀지 않은 일이 됐다. 태종 이방원에 비하면 긴 편인 10년을 더 살았지만 더 이상 삼번을 진압하고 몽고와 대만을 평정한 대제의 모습은 남아있지 않았다.

이 기간, 강희가 비운 국정의 공백은 비밀 전위 유조 속의 후계자인 4황자 윤진(옹정제)이 매웠다.

강희와 윤잉의 갈등은 근본적으로, 황제와 태자 두 주권이 충돌한데서 비롯된 면이 크다. 임금이 장수를 하는 경우 발생하는 현상이다. 태자 주변에 모인 태자당의 규모도 커지면서 마침내 왕권과 충돌하고 만다.

조선의 영조와 사도세자, 한무제와 여태자도 이런 경우다. 여태자는 참소에 몰려 역모의 혐의를 뒤집어쓰자 한무제 주위 간신들을 없애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그러나 역부족으로 황제 친위군을 이기지 못하게 되자, 자결했다. 한무제는 아들과 여태자의 모후 위황후가 죽은 후에야 억울한 전말을 알게 됐다. 관련자들을 처형함은 물론 최종적으로 후계자가 된 소제의 모후 구익부인도 자결하게 만들었다.

▲ 올해 1월 이복형인 압둘라 국왕의 서거로 즉위한 사우디아라비아의 살만 국왕. /사진=뉴시스

지난달 29일 사우디아라비아의 살만 국왕이 왕세자를 갈아치웠다. 그러나 이는 위에 소개한 경우와 상당히 다르다.

우선 살만 국왕이 물러나게 한 왕세자는 우리 역사의 표현대로 하면, 왕세제다. 왕의 이복동생인 무크린 왕자다. 책봉한 사람도 살만 국왕이 아닌 지난 1월 서거한 압둘라 국왕이다.

압둘라 국왕이 서거하자 제1왕세자(이 경우도 역시 왕세제에 해당한다) 살만이 승계해 왕이 됐고 제2왕세자였던 무크린이 제1왕세자로 격상됐었다.

왕의 동생 무크린 왕자가 제1왕세자에서 물러나자 제2왕세자 무함마드 빈 나예프가 제1왕세자로 격상됐다. 그는 살만 국왕의 조카이며 아버지 나예프 왕자는 살만 국왕의 동복형제다. 제2왕세자에 임명된 건 살만 국왕의 아들 무함마드 빈 살만이다.

살만 국왕과 나예프 왕자, 제1왕세자와 제2왕세자 모두 사우디 왕실의 주류로 분류되는 수다이리 왕비의 자손들이다.

살만 국왕이 왕실의 주류 혈통을 중시하는 것 뿐만 아니라 정책에서도 상당한 변화가 예상된다. 전임 압둘라 국왕은 여성의 참정권을 늘리는 등의 진보적 행보를 보였다. 이런 기조가 지속될 수 있을지 주목되는 가운데 살만 국왕은 예멘에 대한 공격적인 군사 작전으로 전 세계의 눈길을 끌었다.

동양 역사에서 폐세자는 임금이 자신의 죽음을 알리는 첫 번째 신호였다. 이와 전혀 달리 사우디아라비아에서의 이번 폐세자는 국왕이 ‘내 통치는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알리는 신호가 되고 있다.

 

 

 

저작권자 © 초이스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