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을 포기하더라도 군주의 '한마디'를 중시한 600년 대륙 통치

[초이스경제 장경순의 만필세상] 4대 성인의 하나인 공자가 성인으로 숭상한 인물이 주나라 주공 희단이다. 은나라를 무너뜨리고 천자가 된 주나라 무왕의 동생이다.

주공의 업적은 주나라의 대륙지배 청사진을 마련한 것 뿐 만이 아니다. 무왕이 죽은 후 무왕의 어린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성왕을 섭정으로서 일체 사심을 품지 않고 정성껏 보필한 것이다.

하도 오래 전이니, 이 시대 얘기에는 전설과 역사가 혼재돼 있다. 여기서 우리가 역사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호풍환우(呼風喚雨)하는 기괴한 이야기들을 빼고, 그 이전 이후의 전해지는 사실들과 앞뒤가 일치하는 것이다.

혹자는 주공이 정말 충심이 가득해 어린 조카를 보필한 것이냐, 이미 조카가 숙부를 제어할 만큼 능력이 있어서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그런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이렇게 반문하는 사람들은 유력한 비교 사례로 조선의 패륜역적 수양대군과 고려의 숙종을 제시할 수도 있다. 정말 조카가 어리다면 삼촌이란 작자들은 절대 권력을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사례가 된다.

하지만 사기에서 이 시대 얘기들을 찾아보면 성왕이 즉위할 때 정말 어린 아이였다는 정황은 분명하다. 단순히 주공 세가에서 주공의 충성심만 강조하기 위해 나오는 것이 아니다.

▲ 춘추5패의 두번째인 진문공은 진(晉)나라를 춘추시대 최대강국으로 이끈 임금이다. 임금이 되기 전 오랜 망명세월을 가졌으며 한식의 유래가 된 개자추의 임금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진나라는 스스로의 국력으로 동성동본인 주나라 왕을 수호하는 패업에 앞장섰다. 그러나 진나라의 건국은 엉뚱하게도 주나라 성왕의 어린시절 장난에서 비롯됐다. /사진=김구용 열국지 수록 삽화.

노나라 시조인 주공과 무관해 보이는 진(晉)나라 세가에 성왕의 어린 모습이 또 등장한다.

성왕이 즉위한 지 얼마 안 돼, 주나라 북쪽의 당(唐)나라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섭정을 맡고 있던 주공이 이를 진압했다.

어린 성왕은 어느 날, 동생 우와 함께 마당에서 놀고 있었다. 아이들의 놀이에는 어른이 되기 위한 훈련의 뜻이 담겨있다. 이것은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동물에 공통된다.

사냥 훈련, 뛰는 훈련이 모두 어린 생명들의 놀이에 담겨 있다. 다만 어른들이 생업으로 할 때와 같은 처절함이 없을 뿐이다.

어린 임금의 놀이도 조정에서 대신들과 국정에 임하는 자세를 흉내 내는 것이었다. 성왕은 오동나무 잎을 따서 규(珪)라고 불렀다. 규는 조정대신들이 성왕에게 봉지를 받을 때 들고 있는 것이다.

성왕은 동생에게 “이것으로 너를 봉하노라”라고 말했다.

이를 지켜 본 사관이 성왕에게 “날을 택하여 우를 제후로 봉하소서”라고 청했다.

어린 성왕은 “장난으로 한 얘긴데”라고 답했다. 사관은 “천자께서는 농담을 하셔서는 아니 되옵니다. 말씀을 하시면 곧 사관이 그것을 기록하고 예의로써 그것을 완성하고 음악으로 그것을 노래하옵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우는 진짜로 제후가 됐다.

나는 이 대목에서 주공 뿐만 아니라 당시 주나라 조정 신하들 상당수가 왕을 어리다고 생각해서, 저마다 왕에게 통치의 진지함을 일깨워주려고 작심하고 있지 않았나라는 추측을 한다.

어쨌든 우는 이제 당숙 우가 됐다. 이 일을 계기로 성왕은 일거수일투족을 신중해야 한다는 큰 교훈을 얻었다. 성왕은 바로 다음 대인 강왕과 함께 주나라 전성기를 이끈 임금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런데, 주나라 천자의 직할에서 당을 떼어낸 효과가 만만치 않았다. 세월이 가면서 그 효과는 점점 더 커졌다.

당은 주나라 북쪽 오늘날의 산시성 일대의 지역이다. 오늘날 애플 제품을 생산하는 팍스콘 공장이 있는 타이위안도 여기 속한다. 생산력이 왕성할 뿐만 아니라 이민족과 접경하면서 무(武)를 숭상하는 기풍으로 강병의 원천이 되는 지역이다.

건국 초부터 나라가 컸던지 당숙 우에서 몇 대가 내려가 당나라 임금이 동생에게 곡옥을 별도 영지로 줬다. 제후국 안의 제후국이 된 것이다. 나중에는 곡옥의 제후가 당나라 제후보다 더 힘이 커져서 당나라 땅 모두를 차지하게 됐다. 나라 이름도 당이 아닌 진(晉)이 됐다.

춘추시대가 전국시대와 다른 점은 우선, 춘추시대 제후들은 수백명을 넘어 이르러 일일이 기록할 수도 없이 많았다는 점이다. 청동기 시대 중앙 정부 통치력의 한계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역사에 자주 등장하는 큰 나라 제후는 열 두 개 정도가 꼽힌다. 그 가운데서도 다섯 명의 위대한 제후들이 있어서 역사에서는 이들을 춘추5패라고 분류한다. 전국시대에는 수백의 제후가 주나라를 제외한 일곱(전국칠웅)으로 통합된다. 철기시대의 강한 행정력이 반영된 것이다.

또 하나 차이는 춘추시대 제후들을 해와 달로 구분한다는 점이다. 해는 주나라 왕실과 종친인 희(姬)씨 제후들을 상징하고, 달은 이성(異姓) 제후들이다.

훗날 진나라와 남방 초나라 군대가 전투를 벌이기 전날, 진나라 장수가 꿈에 달을 쏘아 맞히고 진흙에 빠졌는데 이를 해몽한 사람은 “달은 아마 초나라 임금을 뜻할 것이니 그대가 내일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울 듯 하다. 하지만 진흙에 빠진 것은 상서롭지 않은 듯 하니 조심하라”고 말했다. 이 장수는 과연 다음날 초나라 공왕을 활로 쏘아 큰 부상을 입혔다. 그러나 급히 초왕을 보호하러 나타난 신전장군(神箭將軍) 양유기의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는 고사가 있다.

춘추시대에는 주나라와 종친제후냐 아니냐를 따질 정도로 주나라 천자의 영향력이 남아있었다는 방증이 된다.

당숙 우 고사에서 보듯, 진나라 개국 제후는 주왕의 아들이니 진은 해에 해당하는 동성제후가 된다.

진나라는 춘추5패의 두 번째인 진문공 중이의 대에 이르러 드디어 천하를 호령하는 최강대국이 됐다.

앞선 5패의 첫 번째 주자 제환공은 종친제후가 아닌 ‘달’에 해당했다. 그는 주무왕을 도운 강태공의 후손이다.

진나라가 패자가 되면서 남방 초나라 위협에 맞서는 중원 국가들의 단합은 더욱 공고해졌다.

그런데 이 강력한 국력이 원래 어디에서 비롯됐겠는가. 원래는 주나라 천자의 직할령이었어야 할 곳이다.

현실적인 이치만 따진다면, 주나라는 왕의 어린 시절 장난을 용납하지 못해 커다란 국력 상실을 자초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주나라 왕은 한마디에 대한 온 천하의 신뢰를 얻었다.

비록 허울 뿐인 천자라는 조소를 들은 주나라이긴 해도, 그 권위가 전국시대로 접어드는 기원전 4세기까지 무려 600년을 군림했다. 한나라 이후 중국의 천자 왕조는 200년 주기로 명멸을 거듭했다. 600년은 후세 천자들이 흉내도 못 낼 기나긴 기간이다. 왕도를 추구하는 유학은 주나라 치세에서 탄생했다.

강한 군대가 아니라 왕에 대한 신뢰로써 주나라는 대륙을 이끌었다. 전국시대 들어서도 그 권위는 함부로 파괴하기 어려웠다. 사나운 서쪽 진(秦)나라가 주를 무너뜨린 건 자신들의 강인한 군대를 동원해서가 아니라 주나라 왕이 채무불이행으로 스스로 무너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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