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시대 최대 전장터 성복, 최초 전선은 그곳이 아니었다

[초이스경제 장경순의 만필세상] 앞선 만필에서 몇 차례 춘추시대 최대 전쟁터인 성복 전투를 언급했다. 승자인 진나라가 동맹군을 제외한 자체적으로 동원한 병력이 전차 700승에 5만 병력이다. 거의 주나라 전성기 천자만이 보유할 수 있는 군사력이다. 그러나 이 전쟁의 더 큰 의미는 이후 300년의 정치질서를 확정했다는 점에 있다.

그런데 진(晉), 초 양군이 당초에 맞부딪혀 전쟁을 벌일 곳은 원래 성복이 아니었다. 정치 군사학적인 요인과는 무관한 이유로 전선이 이동해 오늘날에도 성복이란 이름이 전하고 있다.
 

▲ 1996년 중국드라마 '동주열국 춘추편'에 등장하는 성복전투의 모습. /사진=동주열국 춘추편 유투브 화면캡쳐.

 

이 전쟁의 승자 진문공 중이는 오랜 세월 망명 생활을 했던 사람이다. 무려 19년을 천하를 방랑하다 62세의 나이로 기원전 636년 진나라 임금으로 돌아왔다.

진문공 중이의 공자 시절, 그의 아버지 헌공은 애첩 여희에게 빠져 세자 신생을 죽게 만들고 여희의 소생 해제를 세자로 삼았다. 헌공은 또한 다른 아들인 중이와 이오마저 죽여서 해제의 위협요인을 없애려고 했다.

중이는 아버지의 살해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망명길에 올랐다. 오랑캐로 여겨지던 책나라로 망명해 12년을 보내다 또다시 진나라 자객의 위협을 받고 이 곳을 떠나 이나라 저나라를 방황했다. 때로는 먹을 것이 없어 실신지경에 이른 것을 함께 망명한 신하 개자추가 자신의 넓적다리 살을 잘라 먹여 구하기도 했다.

 

개자추는 훗날 진문공이 귀국해 임금이 된 후 공을 탐하지 않고 어머니와 함께 산으로 도망쳤다. 진문공은 개자추를 찾으려고 그가 숨은 산을 전부 태웠다. 그러나 진문공이 찾은 것은 불길을 피하지 않고 죽음을 맞은 개자추와 그의 어머니 시신이었다. 진문공이 이를 한탄해 만든 날이 4월초의 한식이다.


망명 중의 중이는 심지어 같은 희(姬)씨 종친인 위(衛)나라와 조(曹)나라에서 엄청난 멸시를 받았다. 고생 끝에 중이의 망명길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중원 모든 나라, 특히 중이의 진나라처럼 주나라 왕실과 종친인 제후들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초나라로 발길을 돌린 것이다.

양쯔강 이남에서 일어난 초나라는 주나라 정식 제후도 아닌 변방 오랑캐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갈수록 주변 소국들을 정벌하면서 힘을 키워 마침내 천자만 쓰는 왕호를 참칭할 정도로 국력이 막강해졌다. 강대해진 초나라는 수시로 중원을 침범하는 전쟁을 일으켰다.

또한 초나라 성왕은 자신을 상국으로 섬기기로 한 제후의 아내를 빼앗거나 그의 딸들을 간음하는 무도한 짓을 서슴지 않았다.

아무리 고국의 박해로 망명에 올랐다지만, 천하에 명성이 자자한 중이가 이런 나라에 신세를 지러 찾아간 것이다.

그런데 웬일인지, 중이를 대할 때만큼은 초성왕이 전혀 다른 사람이 됐다. 잔인무도한 오랑캐 수령은커녕 중원의 성군도 흉내 내기 힘든 대인의 모습으로 적국의 망명공자를 대했다.

이미 크게 왕업을 일으킨 초성왕이 이 무렵부터는 분란을 줄이고 자신이 평생 이룬 업적을 잘 지키려는 태도로 돌아선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오늘날 지도층 인사들의 골프에 해당하는 스포츠 사냥에 중이를 동행하는 등 극진한 대접이 그치지 않았다.

어느 날 사냥을 마치고 벌인 잔치에서 초성왕이 중이에게 물었다.

“공자가 진나라에 돌아가서 군위에 오르면 그 때에 뭣으로써 과인에게 보답하겠소?”

대부분 사람은 국토의 일부나 국고의 모든 보물을 바치겠다는 사탕발림으로 호응하게 마련이다. 그래놓고 소원을 성취하면 태도가 돌변해 옛날 은인과 전쟁을 벌이기도 한다. 이 대화가 오가는 현재 진나라 임금인 이오가 그런 경우다.

초성왕은 자기를 오랑캐라 멸시하던 중원 귀공자가 얼마나 비굴해지는지 구경해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명성이 자자한 중이 너 또한 속물들과 다르면 얼마나 다르냐고 냉소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이의 대답은 차원이 달랐다.

“여자와 구슬과 비단이 넉넉하시니 군왕에게 뭣이 더 필요하겠나이까?”

“그래도 과인에게 보답하고 싶을 터이니 한번 말해 보시오.”

정색을 한 중이가 대답했다.

“만일 군왕의 도움으로 이 몸이 진나라 군위에 오르면 초나라와 우호를 두터이 하고 태평을 누리겠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아 병차를 거느리고 대왕의 군사와 서로 격돌하게 된다면 이 몸은 초군과 싸우지 않고 삼사(三舍. 90리)의 거리를 후퇴함으로써 오늘날 대왕이 이 몸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초성왕은 포부가 당찬 중이의 답변에 오히려 호쾌하게 즐거워하며 사냥을 마쳤다.
 

▲ 1996년 중국드라마 '동주열국 춘추편'에서 진문공 중이가 초나라 성왕에게 "훗날 삼사의 거리를 후퇴해 오늘의 은혜에 보답하겠다"고 얘기하고 있다. /사진=동주열국 춘추편 유투브 화면캡쳐.

 

하지만 초성왕의 신하 가운데 용병의 솜씨가 가장 출중한 성득신은 임금과 전혀 태도가 달랐다. 그는 격분한 모습으로 왕 앞에 나아갔다.

“오늘 진나라 공자의 대답은 너무나 무례했습니다. 대왕께서는 그를 너무나 후대하십니다. 그는 임금이 되기만 하면 우리를 배신할 터이니 당장 죽여버리소서.”

그러나 초성왕은 “중이는 천성이 어질고 그를 따르는 무리도 모두 뛰어난 인물들이다. 이는 하늘이 그를 돕는 것인데 어찌 우리 초나라가 하늘을 어길 것이냐”며 성득신을 꾸짖었다.

초나라에서 환대를 받던 중이는 진나라의 정세가 급변함에 따라 진의 바로 이웃인 진(秦)나라로 망명지를 옮겼다. 초성왕 또한 “우리나라에서 진(晉)까지는 너무도 거리가 멀지만 진(秦)에서는 가깝소. 공자가 본국에 돌아가고 싶다면 진(秦)에서 출발해 하루만에 당도할 수 있소. 또한 진(秦)나라 임금은 어진 사람이니 이야말로 하늘이 공자를 도우심이오”라고 흔쾌히 동의했다.

진(秦)으로 거처를 옮긴 중이는 마침내 19년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진(晉)나라 임금 자리에 올랐다.

그로부터 4년 후, 주나라 왕실의 종친 제후로서 패업을 도모하는 진문공 중이는 남방 초나라에 빌붙은 종친 제후 위, 조 두 나라를 공격했다. 망명 시절 자신을 박해했던 나라기도 했다.

반면 초나라는 진문공의 우방인 송나라를 공격했다. 불과 4년 만에 진, 초 양대 강국은 모든 동맹국들이 결부된 전면전을 벌이게 됐다.

그러나 중이에 대한 초성왕의 호인기질은 이 때도 변하지 않았다. 중이를 하늘이 돕는 사람으로 굳게 믿고 있던 그는 진문공이 직접 출병한 소식을 알고 더 크게 다툴 필요가 없다며 철군했다.

하지만 병력의 절반을 통솔하고 있던 성득신의 태도는 전혀 달랐다. 그는 왕의 거듭된 권고에도 불구하고 진나라와의 정면 대결을 주장했다. 마침내 초성왕은 회군하되, 성득신은 자신만의 병력으로 진군과 결전을 벌이게 됐다.

예전 망명객 중이를 대하던 성득신의 호전적 태도는 이 전쟁에 그대로 드러났다. 그는 풍우같이 행군해 위, 조를 공격하던 중이의 본진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진나라 총사령관 선진이 이제 막 당도한 초군의 기선을 제압하려 했다. 그러나 호언이 나서 진문공을 간했다. 망명 시절 “삼사의 거리를 후퇴하겠다”던 약속을 떠올린 것이다.

진나라 장수들이 반발했다. 초나라 임금도 아닌 일개 신하 성득신이 출전했을 뿐인데 왜 우리 임금이 도망을 치느냐며 격분했다.

▲ 김구용 열국지 삽화 속 진문공의 모습. /사진=1967년 어문각 김구용 열국지 삽화.

진문공이 전군에 후퇴 명령을 내렸다. 중간에 군리에게 물었다.

“얼마를 후퇴하였느냐?”

“일사(一舍. 30리)를 물러났습니다.”

“아직 멀었다. 계속 후퇴해라.”

이렇게 해서 전선은 당초의 전쟁터에서 36킬로미터를 물러난 성복이란 곳으로 옮겨졌다.

사실 중이의 후퇴에는 36킬로미터란 거리 이상의 양보가 담겨 있다. 어떻든 첫 번째 대결에서는 승자의 자리를 초성왕에게 양보하게 되는 것이다. 초성왕이 성득신의 철군을 거듭 종용한 것도 이런 판세 분석에서다.

국제 정세는 진문공에게 전형적인 중원세력의 ‘프리미엄’이 붙어있었다. 3-4위 강국 진(秦)나라와 제나라 군대도 진문공을 위해 출병해 있었다. 물론 초나라의 성득신에게도 진(陳), 채, 정, 허라는 동맹군이 있었지만 비교도 안되는 소국들이었다.

1980년대 냉전 구도에 비유하면 미국 역할의 진문공이 중국, 영국을 동맹군으로 동원한 반면 소련은 아프리카의 친소 비동맹 국가들을 일부 동원한 것에 불과했다.

다만, 두려운 것은 진문공의 군대에겐 초군과 같은 격전의 경험이 없다는 점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진문공은 망명객 시절의 ‘삼사 후퇴’를 실천했다.

그러나 성득신은 진문공이 물러나는 족족 사납게 추격해 왔다. 진문공의 최초 후퇴에 성득신 또한 철군했다면 완벽한 승리는 아니라도 초나라의 패업 우위는 지속될 수 있었다. 성득신은 현상 유지가 아닌 완벽한 승리를 원했다.

진문공의 병사들은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전투임을 자각했다. 반면 초군은 성득신의 아집으로 기어이 싸움을 해야 하느냐는 회의를 갖게 됐다.

결전의 그날, 진(秦) 제 동맹군과 함께 진(晉)의 좌우군이 초의 좌우군과 허약한 진(陳),채, 정, 허의 군대를 궤멸시켰다. 이들은 모든 전투력을 중군에 합세해 성득신의 본군을 사납게 몰아쳤다.

성득신은 마침내 대패하고 말았다. 완벽한 승리를 위해 불완전한 승리를 포기했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완벽한 패배였다. 초성왕은 거듭된 왕의 충고를 어긴 그를 용납하지 않았다. 성득신은 자결함으로써 패전의 책임을 졌다.

이렇게 해서 오늘날 허난성 북부지역이라는 ‘성복(城濮)’이 역사책에 이름을 남기게 됐다.

이 고사가 두고두고 인상에 남는 건, 끝내 약속을 지켜 승리했다는 대목이 아니다. 오갈 데 없는 궁핍한 처지에서도 “삼사를 후퇴해 은혜를 갚겠다”는 진문공 중이의 당찬 포부요, 또한 그것을 호탕하게 공감한 초성왕의 호기다. 굵은 사내들이 3000년 전에 남겨놓은 발자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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