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생인 나의 어릴 때 동네는 경복궁 영추문 맞은 편 통의동, 그러니까 백송나무 동네다. 골목 속에서도 또 다른 작은 골목을 들어가면 일제시대 풍의 집들이 쭈욱 붙어있었다. 지난 달 근처에 일이 있어 가보니 내 어릴 때 집골목이 그대로 남아있다.

 
꽤 컸던 것으로 기억나는 골목이 겨우 1.5미터 폭에 불과하다. 이런 작은 골목에 번데기 장사 아저씨가 수레를 끌고 들어와 형 누나들이 모두 동전 또는 빈병을 들고 몰려나왔던 거다.
 
이 동네에는 특유의 구경거리가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 행차다. 큰 길이 뚫려 자동차 구경이 어렵지는 않은 시절이지만 그래도 자동차는 귀중품 중의 귀중품이었다. 일부 부유층은 오히려 지프, 즉 ‘찝차’를 더 선호하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대통령 행차는 아주 근사하고 길쭉한 외제차 구경도 할 수 있는 기회였다. 지금은 없어진 중앙청의 서쪽 출입문에서 국산차 코로나가 꼬리를 물고 나오는 장면 자체도 당시로서는 진풍경이지만 대통령이 탔을 것으로 보이는 차는 특히 더 대단한 구경거리였다.
 
▲ 지난 2005년 국회에 전시된 박정희 전 대통령의 1968년산 캐딜락. /자료사진=뉴시스

요즘처럼 대통령이 지나가다 내려서 동네 주민들과 대화하는 장면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내가 태어나기 얼마 전 미국에서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한 것도 있고 또 내가 네 살 되던 해에는 1.21 청와대 기습사건도 났었다. 대통령이 편하게 대중 속에 노출될만한 상황과 분위기가 아니었다.
 
1974년 육영수 여사 서거 이후로는 정말 박정희 대통령이 대중 앞에 노출되는 일이 드물었다. 그러나 어마어마한 인파 앞에 모습을 나타내야 할 일이 생겼다. 박 대통령이 서거하던 1979년,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의 방문 때다.
 
인권문제 때문에 주한미군 철수를 하려던 카터는 박정희에 대해 아주 감정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한국이 제공하는 영빈관을 마다하고 주한미군 공군 기지에 숙소를 잡았다.
 
한국 측에서는 분위기가 냉랭했기 때문에 더더욱 엄청난 환영 퍼레이드를 준비하지 않았나 한다. 김포공항에서 청와대로 가는 길에 엄청난 인파가 몰렸다. 관제 군중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당시 민심은 미국 대통령 방한 길이다 그러면 가던 길 멈추고 다 구경 갈 때다.
 
박정희 대통령과 카터 대통령, 그리고 카터의 어린 딸 에이미가 같은 차에 올랐다. 이들의 차는 완전 오픈카는 아니었고 캐딜락의 지붕을 열고 상체를 드러낼 수 있게 만들어졌다.
 
엄청난 인파의 환영을 직접 보면서 카터가 쌀쌀한 마음을 잠시 잊은 듯 했다. 행렬이 시청 앞 태평로 거리에 접어들었을 때 그는 아예 딸과 함께 지붕에 걸터앉아 시민들에게 손짓으로 답례를 했다. 옆자리의 박 대통령은 출발 때와 같이 윗몸만 내놓은 채 가벼운 미소만 지으며 손님들을 지켜봤다. (훈훈한 모습과 달리 이 때 정상회담은 내내 상대 성질을 대놓고 긁는 살벌한 자리였다고 한다. 이는 수년이 지나서야 국내에 알려진 사실이다.)
 
25일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 기사를 쓰면서 나름의 애로가 있었다면 ‘박 대통령’이라는 어휘다. 독자들이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 혼동하지 않게 가급적이면 이름 석 자를 다 적었다. 그러나 이런 애로는 한달 이내에 해소될 것으로 생각한다.
 
박정희 대통령 시대의 기억은 지금의 박근혜 대통령에게 양날의 검이다. 지지층을 더욱 굳게 해주는 기억의 힘을 주는 동시에 박정희 시대 반인권 독재를 혐오하는 사람들에게는 소통의 문을 닫는 부작용이 있다.
 
중도 성향의 사람들에게는, 지금까지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긍정적인 요인이 더 컸다고 본다. 결과적으로 오늘날 이 정도 경제를 이끌어낸 1960년대 당시의 선택을 좋게 평하는 사람이 상당수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중도 성향의 사람들은 특히 권력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취향을 강요할 때 금새 염증을 느끼게 된다. 양극단의 사람들이야 원래 자기 생각 고치지 않는 법이지만 중도의 대중은 다르다. 최종 선택의 힘을 지닌 사람들이기도 하다.
 
지난해 박정희 전 대통령 기일에 박근혜 대통령이 한 말은 “이제 아버지를 놓아드리자”였다. 그 말이 특히 필요한 앞으로 5년이라고 본다.
 
어제 대통령 취임식을 맞아 박정희 대통령의 캐딜락 관련 뉴스가 나오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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