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0년대 중반 필자가 은행 종합기획부에서 근무하던 때의 일이다. 새해가 되거나 명절만 다가오면 은행은 고객 감사 선물을 준비하곤 했다. 그런데 그 선물은 주로 치약, 칫솔, 비누, 수건세트 등 평범한 것들이 전부였다.
 
필자는 하나의 의문이 들었다. 물론 은행의 고객이라면 어느 누구라도 잘 대해줘야 하겠지만, 은행에 더 많은 이익을 가져다주는 VIP고객과 일반고객을 구분하지 않고 똑같은 선물을 지급하는 게 과연 옳은 것인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이렇듯 당시만 해도 우리사회의 대 고객서비스는 ‘천편일률’ 그 자체였다. 고객별 맞춤 서비스와는 거리가 먼 시기였다. 하지만 나는 당시에도 ‘이건 아닌데’하며 뭔가 획기적인 ‘고객 감동 선물 세트’는 없을까 하며 고심을 거듭했다.
 
이런 의문부호를 놓고 이 생각 저 생각 다 동원한 끝에 나만의 기발한 생각하나가 떠올랐다. 일반적인 선물증정이 아니라 색다른 제안을 하고 싶어 몇 날을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은, 다름아닌 ‘VIP고객을 대상으로 클래식 음악회에 초대하는 것’이었다. 문화 인프라가 지금에 비해서는 훨씬 뒤처졌던 당시에는 당돌한 제안이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정성껏 준비한 기획안이 과장, 부장을 거쳐 최종 결재권자인 은행장에게까지 올라갔고 결과는 ‘OK’였다. 내 제안이 채택되다니 참으로 기뻤다.
 
곧바로 ‘거사’를 치르기 위한 준비 작업에 돌입했다. 은행의 결정이 떨어진 이상 한시도 지체할 수가 없었다. 공연 일정이 얼마 남지 않아선지 마음이 조급했다. 하지만 젊은 시절부터 문화행사를 수차례 경험해왔던 터라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공연을 준비하면서 며칠 밤을 연달아 지새우는 것도 다반사였으나, 그저 즐거울 뿐이었다.
 
그러나 엉뚱한데서 문제가 생겼다. 출연진 섭외와 동시에 공연을 진행할 공연장을 대관해야 했는데, 이게 의외로 쉽지 않았다. 공연일이 결정되었음에도 당시에는 많은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장소가 많지 않은 게 탈이었다. 빅 이벤트가 가능한 곳을 물색하다가 몇 군데의 일정을 확인한 끝에 필자가 찾은 곳은 서울 중심부에 위치한 대형 공연장이었다.
 
하지만 분명히 일정을 확인해볼 때 대관이 가능한 것 같은데도, 대관담당자는 “그날은 계약이 되어 있다”는 둥 딴청을 부리며 대관허가를 해주지 않는 것이었다. 대관담당자를 향해 아무리 부드럽게 달래고 비위를 맞춰 보려 해도 먹혀들지 않았다. 담당자는 시종일관 모르쇠로 일관했다.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비상수단을 써보기로 했다. 눈 딱 감고 봉투 하나를 준비해 건넸다. 그랬더니 이게 웬일인가. 대관담당자는 당연한 듯 아주 자연스럽게 봉투 안을 살피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대관 승인을 해주는 것 아닌가. 준비한 봉투에는 대관료와 동일한 금액을 고스란히 담아 두었는데 그걸 받고서야 대관허락이 떨어졌던 것이다.
 
문화계까지 부패의 온상으로 전락해버린 상황을 보고 마음이 편치 않았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어쩌랴. 말도 안 되는 부당한 처사에 무척 화가 났지만, 행사를 원활히 진행해야 하는 담당자로서의 책임이 앞섰다. 사실 그 당시에는 봉투가 관례였던 것 같았다.
 
다행히 행사는 무사히 끝났고, 각 방송국 메인뉴스인 저녁 9시뉴스에 은행 주최 고객 사은 클래식 음악회가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단 4,000만원의 예산으로 치러진 이 공연으로 인해 400억원의 홍보효과를 창출했다는 사내의 분석도 뒤따랐다.
 
이 일로 은행에서 나의 앞날은 승승장구였으나, 인구 1,000만의 대도시 서울에 문화공간이 턱없이 부족하고 이로인해 대관 횡포가 기승을 부리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이는 문화 예술분야 DNA로 꽉 차있던 나로 하여금 뭔가를 결심케 하고 있었다. 비록 몸은 은행원이었지만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던 ‘문화 예술인의 기질’이 되살아나기 시작했고 내 머릿속은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내가 직접 공연장 사업에 뛰어들어 이런 말도 안되는 공연장 문화를 고쳐나가겠다는 결심을 내리기에 이른 것이다.
 
대학시절 아버지의 권유로 비록 법대에 가긴 했지만 ‘돈텔파파’(Don't tell papa, 아버지에겐 비밀로 해주세요)가 되어 결국은 아버지 몰래 음악활동에 미쳐 대형 가요제에 출전하고 수상까지 하는 바람에 몰래한 행동이 들통났듯이 은행원이 되어서도 '대관 횡포‘를 경험하고 난 뒤부터 나의 ’돈텔파파 본능‘이 다시 불거져 나온 것이다.
 
나는 은행원 일을 그만두고 공연장 사업가가 되어볼 요량으로 무대 및 음향 등 문화공간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공연장과 관련된 서적을 탐독했고, 주말이면 서울을 비롯해 전국의 주요 공연장을 찾아다니며 기술파트 감독들에게 밥을 사주며 공연장과 관련된 것들을 하나하나 꼼꼼히 배워나갔다. 물론 이번에도 아버지 몰래였다.
 
결국 그렇게 몇 년을 준비한 끝에 나는 은행에서 뛰쳐나와 대학 내 문화공간이라는 틈새를 찾아 ‘나만의 문화공간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후 다양한 학교와 지자체 문화공간들을 운영하고 컨설팅하며 지금까지 사업을 이어오게 되었다.
 
이제는 어지간한 대학마다 모두 대형공연장을 보유하고 있고, 산학연계 차원에서 외부기업이나 운영대행사가 들어오는 경우까지 생겨나게 되었다. 필자도 이 분야에서 경력이 오래 되다 보니, 각종 문화공간 운영에 대한 조언이나 컨설팅을 해줄 기회가 늘어났다. 또 그때마다 느끼는 것이, 대부분의 클라이언트가 공연장을 지어놓기만 하면 일단 돈이 그냥 굴러 들어온다는 식의 어마어마한 착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공연장이라는 문화공간의 특수성이나 이용객들의 편의사항은 간과하고 그저 돈 벌 생각만 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이런 인식이 너무도 쉽게 팽배해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하지만 발상의 전환만 하면 어느 문화공간이든 훨씬 유용하고 폭넓게 활용할 수 있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필자가 운영하는 건국대 공연장을 예로 들어보자. 800석 규모의 건국대 새천년관 대공연장과 300석 규모의 국제회의장 등 두 곳의 연간 방문객만 무려 15만명에 이른다. 단일 대학 문화공간 치고는 결코 적지 않은 방문객 수다.
 
그런데 얼마 전 대학측으로부터 공연장 로비를 활용해 학교홍보를 해 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그리고 나는 이에 선뜻 응했다. 이 곳 만큼 학교를 홍보하는데 좋은 공간도 없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비록 공간자체는 대학의 소유지만, 문화공간을 이용하는 공연관계자와 행사담당자들, 그리고 관객으로 참여하는 시민 모두에게 ‘건국대 공연장을 단순한 건국대 소유가 아닌 자신을 위한 문화 공간’으로 여기게 하는 ‘특수 공간’으로 활용하면 좋겠다는 확신이 섰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 문화공간을 통해 학교홍보를 하게 되면 그것만큼 효과적인 일도 없을 것이라는 게 나와 학교측의 생각이었다.
 
그렇다. 문화사업은 수익사업이 다는 아니다. 무형의 가치가 발현되는 것이 문화의 영역이기에 단순한 돈이나 경제논리로만 가치를 평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가장 쉬운 방법이 문화와 동행하는 것이다. 문화예술을 수치화하는 순간, 문화예술의 근원적인 가치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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