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죽이려면 우선 권력을 나눠준다'는 책략, 훗날 사돈에게 쓰다

[초이스경제 장경순의 만필세상] 세종대왕의 부인 소헌왕후는 왕후가 된 바로 그 해 아버지를 잃었다. 시아버지로, 국왕에서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이 소헌왕후의 아버지 심온을 처형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태종이 외척의 발호를 경계해, 무리를 해서라도 사돈인 심온을 죽였다고 생각한다. 태종 이방원의 행적을 살펴볼 때 무리한 해석이 아니다. 자신의 재위기간, 장인인 민제는 워낙 연로해서 천수를 다 했지만 민무구 등 네 명의 처남은 모두 사약을 받았다.

양녕대군이 세자였을 때는, 양녕의 장인 김한로가 거의 목숨을 잃을 처지였다. 양녕대군이 다른 사람의 첩인 어리를 강제로 차지한 사건에 대해 김한로의 책임을 더욱 크게 물어 죽음으로 몰아갈 위기였다. 이 때 양녕대군이 태종에게 “아바마마는 수많은 후궁을 취하면서 소자의 여인하나를 용납 못하십니까”라는 상소로 상황을 뒤바꿨다. 태종이 김한로를 죽이기 보다는 세자를 바꾸기로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더 이상 임금의 외척이 될 리 없는 김한로를 죽일 필요가 사라졌다. 그러나 비운은 이제 새로운 외척이 된 세종의 장인 심온에게 넘어가 버렸다.

태종 18년인 1418년 6월3일, 태종은 세자를 폐하고 충녕대군을 새 세자로 삼았다. 두 달 후인 8월10일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줬다.

세종이 즉위하자마자 장인인 심온을 영의정에 앉혔는데, 이는 세종이 아닌 태종이 단행한 인사다. 관료로 최고 지위에 오른 심온은 명나라 사신으로도 떠나는 중책을 맡았다. 그의 출발 때 많은 사람들이 출영을 나와 태종이 불쾌하게 여겼다고 한다.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국경을 넘자마자 심온은 투옥됐다. 극히 일부 경비 병력이동을 태종에게 보고하지 않은 죄였다. 이로 인해 끝내 목숨을 잃었다. 이 일에 앞장 선 대신들은 소헌왕후 폐위도 주장했지만 참으로 상황 판단 못한 것이다. 태종이 필요했던 건 친정아버지 없는 왕후였기 때문이다. 왕후를 바꾼다면 이 짓을 또 해야 된단 말인가.

세종 즉위 직후, 영의정에 임명될 때부터 심온은 죽음의 덫에 걸려들고 있었던 것이다.

죽이고자 하는 대상에게 우선 권력을 나눠주는 것은 태종 이방원에게 낯설지 않다. 과거 자신이 주역으로 포장돼 있는 사건과 비슷하다. 조선 개국 전의 정몽주 암살이다.

▲ 포은 정몽주 초상화. /사진=위키백과

고려말 조선초를 다룬 오늘날의 몇몇 드라마는 이성계가 정몽주를 끝까지 보호하려고 했지만 과격한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 죽였다고 각색하고 있다. 역사책이 아닌 드라마로서, 이 또한 의미있는 작가적 스토리 구성이다. 이성계-정몽주, 정도전-정몽주의 우정이 주제인 드라마에서는 필연적인 구성이다.

그러나 드라마가 역사가 아닌 것처럼, 역사 또한 드라마가 아니다. 실제 역사는 뭔가 장엄하고 감동적으로 얘기하려는 소설가들 글 솜씨대로 살기에는 너무나 치열하고 당장 내일이 불확실한 것이다. 특히 정치사에서 어릴 적, 젊을 적 우정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정몽주는 그의 최후를 둘러싼 앞뒤 정황에서 명백히 당시 최고권력자가 정치적 의도로 살해한 것이다. 권력자 의도를 벗어난 누가 함부로 벌일 수 있는 일이 절대 아니다. 이성계가 끝내 정몽주를 살려주고자 했다면, 조선 개국전에 그에게 권력을 주지 말고 가벼운 유배를 보냈어야 한다. 제왕학에서 신하를 보호하는 원칙 가운데 하나다.

정몽주는 개혁의지를 지닌 신진 사대부로 이성계의 많은 전쟁터에 참모로 종군했다. 이성계가 가족 이외에 단 하나 보호할 사람이 있다면 정몽주였을 정도로 두 사람의 신뢰는 깊었다. 이 또한 오히려 끝내는 정몽주가 죽는 원인이 됐다.

목은 이색과 그의 문하생을 중심으로 고려의 충신이라는 사람은 여전히 많았다. 그러나 이들은 그들의 드높은 기상만 유명했을 뿐이지, 실천의 힘은 전혀 없었다. 이성계 그룹으로부터 경계심만 잔뜩 얻어놓았으니 뭣하나 업무 협조를 구할 처지가 못 됐다.

정몽주는 그의 스승 이색과는 처지가 달랐다. 이성계가 깊은 신뢰를 갖고 있어 정몽주라면 한번 얘기해 볼 수 있는 입장이었다. 시간이 가면서, 점점 고려에 미련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정몽주 하나에 매달리는 상황이 됐다.

1390년 공양왕 2년, 정몽주는 부총리에 해당하는 수문하시중이 됐다. 이성계가 차지한 문하시중에 이어 서열 2위가 됐다. 정몽주의 죽음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수문하시중에서 죽음의 빌미를 그가 얻는 것을 지켜본 이방원은 이 방식을 훗날 심온에게 쓰게 되는 것이다.

조정의 2인자가 된 정몽주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었다고 본다. 하나는 역사에서 우리가 결말을 본, 끝까지 고려를 지키다 순절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고려보다는 고려 세력의 대변자로 본인을 인식하고 왕조가 바뀌더라도 고려 세력의 이해를 최대화하는 타협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정몽주가 후자를 택했다면, 공양왕이 귀양 가서 목숨을 잃기보다는 신라 경순왕처럼 태자보다도 높은 지위로 만년을 편히 보내고 왕씨들도 집단 수장당하는 비극을 면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정몽주가 이 길을 택했다면 조선왕조에 의해 성균관 문묘에 배향되는 죽은 뒤 영광은 없었을 것이다.

정몽주는 고려 잔존 세력의 중심이 됐고, 후자를 택할 수 있는 입지는 점점 더 사라져갔다.

여기서, 이성계는 정몽주에 대한 마지막 테스트를 펼친다. 사냥을 나갔다가 다쳐서 곧 죽게 된 중환자 연기를 한 것이다.

앞선 만필에서 사냥이 많은 정변의 온상이었다는 얘기를 했다. (관련기사: 사냥에서 돌아오지 못한 임금들)

3000년 전 은나라 무을제부터 300년 전 도르곤까지 많은 군주들이 사냥을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벼락 소리를 듣고 놀라거나 말에 떨어지거나 해서 죽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것은 오늘날 대통령이 골프를 치다가 곰에게 업혀갔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황당한 얘기다.

많은 수행원들이 따라간 사냥에서 임금이 치명상을 입는다는 건 수 천년에 어쩌다 한 명 나올까 말까지 시도 때도 없이 권력자가 사냥하다 죽는다는 건 역사를 ‘막장 극본’으로 유명한 아무개 작가가 쓸 때나 가능한 얘기다.

이성계가 사냥에서 팔이나 다리가 좀 불편할 정도로 다쳤을 수는 있다. 그런데 이성계 세력은 그가 사냥에서 조금 다쳤다는 소식이 개경 정가 공기를 엄청나게 바꾸고 있음을 포착했다.

불만세력이 들썩들썩하는 것이 서투른 짓을 벌일 듯하다는 ‘흥미로운’ 분위기를 포착했다. 그래서 이성계는 아예 자리를 크게 펴고 소문나게 죽는 사람 시늉을 시작했다. 1996년 드라마 ‘용의 눈물’은 이성계 사냥을 이렇게 각색했는데 나는 이 편이 좀 더 사실에 가깝다고 본다.

이 미끼를 덥석 물어든 사람이 정몽주였다. 이성계 부재를 틈타 그는 정도전 조준 등 이성계의 모든 측근들을 탄핵하고 나섰다.
 

▲ 1996년 KBS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이성계의 건강한 모습에 놀라는 정몽주(왼쪽). 이성계 역에 김무생, 정몽주는 충신 전문 배우 정승현이 등장했다. 정승현은 정몽주 뿐만 아니라 성삼문, 조선 말 최익현 등 강직한 충신역으로 자주 등장했다. /사진=CNTV 화면캡쳐.

 

그러나 정몽주는 외교 행정의 1인자이지, 책략을 부리고 정변을 벌일 사람이 못됐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이성계가 가짜 병상에 누워 다 들여다보고 있었다.

정도전 조준을 죽이고자 나선 이상, 이성계가 정몽주를 살려줄 수는 없었다. 다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따름이었다.

정도의 차이란, 정몽주 한 사람을 제거하느냐, 나머지 이 부류 사람들도 두 번 다시 고개를 못 들게 완전히 기를 죽여 버리느냐는 것이다. 여기서의 선택은 후자였다.

탄핵, 유배, 사약으로 이어지는 법률 절차가 아니라, 노상에서 죽여 그의 처참한 시신을 오가는 사람들이 보게 되는 공포방식이 선택됐다. 무기도 칼 뿐만 아니라 철퇴가 동원됐다.

만약 이방원이 이성계 뜻과 달리 독단으로 벌인 짓이라면 이런 만천하에 떠드는 방식을 택했을까. ‘하여가’와 ‘단심가’를 주고받는 자리에서 시가 아니라 독이 든 술을 주면 되는 일이었다. 정몽주가 술잔을 거부했다면 대기하고 있던 무사들이 끝장을 낼 수도 있었다.

문병 왔는데 갑자기 지병이 도졌다고 궁색한 변명을 하면 되는 일이지, 독단으로 일을 벌이는 자가 시내 한복판에서 모든 시민이 보란 식으로 사람을 죽이지는 않는 법이다.

정몽주 암살은 정몽주 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포를 심어줄 때 쓰는 방식이 채택됐다.


그런데 하필 왜 이방원이 이 일을 떠맡고 나섰을까

태종 이방원이 조선 개국에 가장 큰 공을 세웠다는 주장에는 의견을 달리한다. 태종은 자신을 당 태종 이세민과 비슷하게 알리는 역사적 미화 작업을 많이 벌였다.

하지만 이세민은 정말로 군대를 이끌고 당나라 영토 대부분을 얻은 전쟁영웅이다. 이와 달리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가 군공을 쌓아갈 때 아직 초등학교 졸업도 못한 어린아이다. 이성계의 군공을 일부나마 나눠가진 사람은 훗날 정종이 되는 둘째 이방과다.

이방원이 개국에 큰 공을 세웠다는 건 그의 집권 후 각색된 내용이지, 정몽주 암살 당시 이방원은 개경 정가에서 이성계의 일곱 아들 가운데 다섯째였을 뿐이다.

형이 많은 이방원 또한 이 때까지는 자신을 훗날 임금 될 사람으로 여기기도 힘들었다. 여러모로 태종 이방원은 역사에 밝은 사람이다. 만약 그때부터 자신을 임금 감으로 여겼다면 두고두고 오점이 될 이런 일을 왜 형들 제쳐두고 자신이 맡겠는가.

정몽주같이 명망 있는 인물을 살해한다면, 그에 따른 반발과 후폭풍도 있을 터. 경우에 따라 이성계가 희생양으로 주동자의 목숨을 내줄 수도 있는 일이다. 이성계의 혈육이 아닌 사람들이 “내가 하겠습니다”라고 나서기 어려운 일이다.

아들 가운데 하나가 나서야겠는데, 장자 이방우는 이래저래 부적절하다. 둘째 방과는 무예가 가장 뛰어나지만 적장이 아닌 선비에게 칼 휘두를 사람이 못 된다. 무엇보다 윗 서열 공자들은 훗날 세자 논의가 될 사람들인데 이런 일에 나서서야 되겠는가.

이방원이 나선 것은 바둑판위의 ‘사석’처럼 가장 부담이 적다는 처지에서다. 이런 의논은 정도전 등 참모들이 정몽주의 탄핵 공세에 귀양을 가기 전, 이성계의 칭병을 기획하는 과정에서 이뤄졌을 것으로 보인다.

성삼문 등 사육신을 죽음으로 몰아간 수양대군의 ‘운검’사건. 이것이 어떻게 한명회의 하룻저녁 임기응변으로 벌어졌겠는가. 이미 사육신을 감시하던 수양 일파가 순진한 선비들의 단종에 대한 충심을 더욱 격동하기 위해 모략을 마련해 놓고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기 직전까지 모른척하고 떠보고 있었던 것이다. 정몽주 암살도 이와 마찬가지다.

정몽주의 죽음 직후, 정도전이 이방원에게 “다시는 나에게 숙부라 부르지 마라”고 분노하는 것은 매우 탁월한 드라마의 연출이다. 하지만 당시의 정치적 개연성에서는 정말 드라마에서나 할 수 있는 얘기다.

특히 정몽주가 수시중이 된 후, 사사건건 이성계 세력과 대립하면서 양 세력 인사들 간 적대감은 쌓일 만큼 쌓였다. 정치인들에게 정치일정의 차질이란 극도의 짜증이 되고, 인간에 대한 혐오감으로 이어진다. 더 이상 동문수학하고 전쟁터를 함께 다닌 옛 동지가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무소불위 권력자라도 세상일이 모두 기획한대로 벌어지지 않는다.

바둑판 ‘사석’처럼 내던진 이방원이었다. 그런데 이 사건으로 이성계 아들하면 바로 이방원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좋든 나쁘든 엄청난 인지도를 얻게 됐다.

이방원이 잠룡으로 부상하는 데는 두 번의 사석 노릇이 계기가 됐다. 첫 번째가 정몽주 암살이고, 두 번째는 조선 개국 후 명나라에 붙잡힌 사신들을 구하러 볼모를 각오하고 사신으로 갔을 때다.

정몽주가 1392년 4월26일 암살됐다. 이성계는 그해 7월17일 즉위해 조선을 세웠다. 고려의 마지막 임금은 공양왕이 아니라 사실상 정몽주였던 셈이다.

만필자 평을 더해 본다.

한민족사에서 조선의 건국은 최초의 민족 통일국가 고려가 더 많은 사람이 권력을 공유하는 지식인 사회로 진화됨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런 시대적 대의가 있다해서 정몽주의 순국을 감히 헛되다 평가할 수 있는가.

그의 재능을 조선에도 기여했다면 그것은 100년의 이해에 불과하다. 이 땅을 500년이나 다스린 왕조의 최후에 일신을 바치는 충신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한국사의 무게를 달리한다. 살아남아 더욱 진화된 나라를 연 자들을 폄하하고자 하지 않지만 사람으로 감내하기 힘든 길을 선택한 포은은 5000년을 빛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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