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빈 혜경궁 홍씨, 생생한 묘사로 부자 간 비극을 기록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송강호는 영화 팬들에게 두 말이 필요 없는 명작 보증 배우다. 유아인은 ‘밀회’를 통해 코미디언 김대희까지 ‘덩달아 인기’를 누리게 만들 정도로 폭풍 인기를 몰고 왔다.

두 사람이 영조와 사도세자로 등장한 ‘사도’가 영화팬들의 인기를 얻고 있다. 또한 혜경궁 홍씨에는 문근영이 등장해 앞서 이 역을 맡았던 김영란, 최명길 등의 뒤를 잇고 있다.

사도세자의 비극에 대해서 지금까지 많은 드라마와 영화가 제작됐지만 ‘사도’는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의 한글 수기 ‘한중록’에 소개된 많은 일화들도 소개하고 있다.

한중록은 혜경궁 홍씨가 세자빈으로 간택돼 왕실에 들어와 남편의 죽음, 아들 정조의 등극, 정조마저 49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로 승하한 후의 쓸쓸함 등을 겪는 인생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다.

비슷한 시기 ‘인현왕후전’과 함께 궁중 수필로 한국문학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인현왕후전은 정치적 의도가 너무 강해 내용의 진실성에서 의문을 사고 있다. 대표적으로 인현왕후를 모신 궁인이 썼다고 하면서 ‘영종대왕’이란 단어가 등장하는 점이다. ‘영종’은 영조대왕의 초기 묘호다. ‘태정태세’하는 묘호는 임금이 승하한 후 생기는 것이니 인현왕후전은 인현왕후가 승하한지 최소 75년이 지나서 쓰였다는 얘기다. 누군가 정치적 의도로 쓰면서 왕후 모시던 궁인을 사칭했다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 내용도 극단적인 노론 편향을 드러내고 있다.
 

▲ 영화 '사도'의 한 장면. /사진=뉴시스

한중록도 일부에서는 홍씨 집안의 자기 변명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이렇게 정치만능으로만 해석하기에는 한중록의 상황 묘사가 너무나 생생하고 구체적이다. 친정아버지 두둔하는 마음이야 어떻게 감출 수 있었을까. 정조를 선왕으로 호칭하는 후반으로 가면서 정치적 주장의 성격이 좀 더 짙어지는 면은 있다. 그러나 정조 생전에 집필한 앞부분의 기록은 당사자들의 살기가 충돌하는 가운데 서있는 한 여인의 수난사를 그대로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


정이 많았던 어린 시절의 남편

혜경궁 홍씨가 정조를 수태하자 사도세자는 즉시 화선지를 펼쳐놓고 힘이 넘치는 붓으로 용을 한 마리 그리며 기쁨을 나눴다.

혜경궁 홍씨의 친정동생이 대궐 출입을 하다 관원과 시비가 붙었다. 사도세자가 친히 처남을 달래서 데려오면서 “네 이리 강직하니 어찌 나를 도우랴”며 자상하게 다독이고 있다.

혜경궁 홍씨의 남편을 보는 눈은, 타고난 뛰어난 천성이 뜻밖의 병증으로 인하여 비극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한중록에 제일 많이 등장하는 독백은 “오로지 하늘이 하시는 일이니 섧고 섧도다(서럽다)”이다.


경모궁은 과연 사람을 뛰어넘었던가

사도세자를 혜경궁 홍씨는 경모궁이라 칭한다. 부부의 대화에서 사도세자는 자신의 비극을 여러 차례 암시한다.

세자가 궁인을 죽인 사실에 영조가 세자를 불러 전말을 물었다.

“엇지하여 그리하니?”

“마음이 상하여 그리 하오이다.”

“엇지하여 상한다?”

“사랑치 아니하오시기 섧고 꾸중하오시기로 무서워 그리 하오이다.”

이날만큼은 영조가 내 아들이 어찌 무고한 사람을 죽이기에 이르렀는가 애처로운 마음이 앞섰던 모양이다. 혜경궁을 불러 “세자가 이리이리 얘기할 시 그 말이 과연 옳으냐”고 물었다.

며느리 또한 “자애를 입삽지 못하와 그리 하오이다”라고 답하자 영조는 “내 이제는 그리 안하리라”고 말했다.

혜경궁 홍씨는 드디어 시아버지와 남편 사이 봄바람이 찾아오는가 기뻐했지만, 사도세자의 한 마디.

“자네는 사랑하는 며느리니 그 말씀을 다 곧이 듣잡는가부려.”
“필경에는 내가 죽고 마느니.”

혜경궁은 영조가 아들인 사도세자에는 냉혹하면서 세손인 정조에게 자상한 것을 들어 남편을 달래기도 했다.

“세손이 마노라(세자) 아들인데 부자가 화복이 같지 어떠하오리잇가?”

이에 대한 사도세자의 답은 “나는 폐하고 세손은 효장세자 양자로 입적하면 어찌할까본고?”

사도세자에게는 어려서 죽은 이복형이 있었다. 훗날 진종으로 추존되는 효장세자다.

놀랍게도 사도세자가 죽은 후 영조는 세손을 정말로 효장세자의 아들로 적을 옮기는 일을 한다. 정조가 등극한 후에도 혜경궁 홍씨가 대비가 되지 못한 것은 이 조치 때문이다.


비극의 그날을 맞는 세자

부부가 함께 앉은 가운데 전각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리자 사도세자는 깜짝 놀라며 “이게 무슨 소리냐. 내가 오늘 죽나보다”라고 무서워했다.

잠시 후, 동궁으로 거둥을 한 영조가 세자를 불러들이는 명을 내렸다.

두려움에 쌓인 세자는 감기 환자 행세를 하기 위해 세손의 휘항(방한모)을 내달라고 청한다. 혜경궁 홍씨가 “세손 것은 작으니 당신 것을 쓰소서”라고 하자,

사도세자는 “자네가 아뭏거나 무섭고 흉한 사람이로세. 자네는 세손 데리고 오래 살려 하기 내가 오늘 나가 죽겠기 사외로와 세손의 휘항을 아니 쓰이라 하는 심술을 알겠네”라고 말했다.

혜경궁이 “그 말씀이 하 마음에 없는 말이시니 이를 쓰소서”라며 아이 것을 쓰라하자 사도세자는 “싫어! 사외하는 것을 써 무엇 할꼬”라며 박차고 전각을 나서고 말았다. 이것이 부부의 이별 순간이 됐다.

사람을 시켜 알아보니 영조 앞의 세자는 이미 세자의 용포를 벗고 땅에 엎드려 있는데 영조는 세자에게 “네 차마 나를 없이 하고저 한들 생무명 거상을 어이 입었느니”라며 호통을 쳤다.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직접적 혐의는 모반죄다. 동궁에서 무수한 무기가 쏟아져 나온 탓이다. 영조는 세자의 옷차림부터 영조 승하를 대비한 상복이라 꾸짖은 것이다.

뒤주에 갇히기 전, 사도세자는 “아바님, 아바님 잘못 하얏사오니 이제는 하라 하옵시는대로 하고 글도 읽고 말씀도 들을 것이니 이리 마오쇼셔”라며 애원했다.


시대의 명군에 감춰진 감정의 골짜기

▲ 영조대왕 어진.

혜경궁 홍씨의 특히 뛰어난 필력은 영조의 심리묘사에 담겨있다. 영조는 아들과 달리 며느리 혜경궁에게는 한없이 자상했다.

혜경궁은 사도세자의 비극에 대해 세자의 천성이 어리석었다는 비판은 실상과 다른 것이지만, 그렇다고 세자가 무고했다고 하는 것은 대조(영조)의 허물로 돌리는 것으로 그 또한 잘못이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자질이 출중한 세자였지만 병으로 인해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 영조의 처분을 잘못됐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사관들의 기록도 임금의 허물은 최대한 감추던 시대이니 임금의 며느리는 더 말할 것이 없다. 혜경궁 홍씨는 영조에 대해 일체 비판의 언어를 쓰지 않는다. 천추의 한이 된 정조의 효장세자 입적 또한 영조가 아니라 앙숙이었던 화완옹주의 농간으로 간주한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도 일체 가타부타 말이 없고 혜경궁 본인이 보고 들은 것만을 덤덤하게 기록하고 있다. 충분한 사실을 통해 판단은 독자가 하라는 것이다.

영조는 조정에서 기쁜 일이 있었으면 아끼는 옹주의 처소에 들른 후 대전에 들었다. 그러나 죄인을 처형하는 등의 흉한 일을 처리했으면 동궁에 들러 사도세자를 보고 대전으로 갔다고 한다. 나쁜 일을 행한데서 생긴 나쁜 기운을 동궁에 털어버린다는 것이었다.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긴 동안에는 세자가 정사를 처리하면 “중한 일을 독단으로 처리했다”, 영조의 뜻을 물어오면 “그런 것 하나 처리 못하니 대리청정하는 보람 없다”고 타박을 했다.

사도세자가 죽은 직후, 잠시 혜경궁과 세손은 잠시 폐위돼 사가로 물러났다가 다시 지위를 회복해 궁으로 돌아왔다. 세손만큼은 세자와 같은 운명을 가게할 수 없다고 결의한 혜경궁은 독하게 마음을 먹고 영조에게 청했다.

“세손을 경희궁으로 데려가오셔 가라치오시기 바라옵나이다.”

“네 떠나 견딜가 싶으냐?”

“떠나 섭섭하기는 작은 일이요, 위(임금)를 뫼와 배우옵기는 큰일이올소이다.”

임금과 세손이 멀수록 중간에 참소하는 자들의 농간이 기승을 부린다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어린 자식을 멀리 두기는 모자 모두에게 힘든 일이다.

어느 날 영조가 모처럼 세손을 데리고 혜경궁 거처를 들렀다. 대전으로 돌아갈 때가 되자 세손이 울기 시작했다.

영조가 측은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세손이 차마 너를 떠나지 못하여 저리하니 두고 가자.”

혜경궁에게 순간 섬뜩한 생각이 스쳐갔다. 행여 임금이 ‘나는 저를 생각하는데 저는 오로지 어미만 생각하나’라는 섭섭한 심정으로 또다시 세자 보듯 하면 어찌한단 말인가.

어린 자식 우는 모습 보면서 찢어지는 마음으로 고했다.

“위에 있으면(임금을 모시고 있으면) 어미가 그립삽고 어미와 있으면 위가 그리워 저리할 터이니 데려가소서.”

영조의 표정이 즉시 화안색(和顔色)하며 “그리하랴”고 반가워했다. 이 때 울면서 떠난 세손의 모습이 혜경궁의 가슴에 깊게 박혔다.


세상에서 가장 비극적인 어머니 선희궁

사도세자의 생모는 선희궁 영빈 이씨다. 영조는 오랜 재위기간에 비하면 자손이 귀했다. 그런 가운데 사도세자 뿐만 아니라 영조가 매우 사랑했던 화완옹주가 모두 영빈 이씨 소생이다. 동복 자매인 사도세자와 화완옹주는 돌이킬 수 없는 원수지간이 됐다.

영빈은 혜경궁이 비록 며느리지만 세자의 정빈이요, 자신은 임금의 정궁이 아닌 후궁인 점을 특히 유념해 한시도 소홀함이 없는 언동으로 일관했다.

조선 숙종 이전의 시대였다면, 정성왕후 승하 후 왕후의 자리를 계승하고도 남을 여인이었다. 그러나 영조의 부왕인 숙종은 장희빈 파동을 겪고 난 후 후궁의 왕후 승계를 법으로 막아버렸다. 이 때문에 선희궁은 왕후가 되지 못했다. 영조는 계비로 정순왕후 김씨를 맞았는데 그녀의 입궁은 사도세자의 비극을 더욱 초래하는 원인이 됐다. 또한 정순왕후는 순조 시절 수렴청정을 하면서 천주교 탄압 등으로 조선의 개혁을 더욱 지체한 원인을 만들었다.

사도세자가 죽기 직전 선희궁 탄신일을 맞았다. 사도세자는 어머니를 모셔와 생일을 축하한다며 음식을 수북이 쌓고 뜰에 무수한 깃발을 든 병사들의 시위를 벌였다. 이미 세자를 둘러싼 상황이 험악한 것을 알고 있던 선희궁은 잔치상을 받는 내내 “이를 어찌할꼬. 어찌할꼬” 한탄만 거듭했다.

세자 뿐만 아니라 그 화가 세손에게 미칠 것이 선희궁의 근심이었다. 마침내 선희궁은 어미의 모든 마음을 몸에서 내보내고 남편인 영조 앞에 나아가 엎드렸다.

“의대병이 점점 깊어 바랄 것이 없사오니 소인이 차마 이 말씀을 정리에 못 하올 일이로되, 성궁을 보호하옵고 세손을 건지와 종사를 편안히 하옵는 일이 옳사오니 대처분을 하옵소서.”

영조가 아들을 죽인 아비라 하지만, 선희궁은 배 아파 낳은 아들을 떠나 보낼 것을 남편에게 청하고 있는 것이다. 정궁이 아니라 하여 남편 앞에서 자신을 소인이라 칭하고 있다.

이날의 일을 선희궁은 며느리 혜경궁에게 “빈궁은 (이 일의 진상을) 알려니와 세손 남매라도 나를 어찌 알리”라고 말했다. 아버지 죽일 것을 청한 할머니를 손주들이 어찌 이해하겠느냐는 한탄이다.

사람으로서 상상 할 수도 없는 가족의 비극 한가운데 주인공으로 있었던 혜경궁 홍씨는 남편의 죽음과 함께 왕후, 대비가 될 수 없는 신분으로 생을 마쳤다. 훗날 대한제국 설립과 함께 고종의 혈통으로 조상이 된다는 이유로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면서 혜경궁 홍씨도 왕후의 지위를 얻었지만 부질없는 사후의 일이요, 또한 대한제국 설립 당시의 국운도 그다지 신통하지 못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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