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아파 낳은 자녀 없어도 지아비 혈육을 지키며 보낸 생애

[초이스경제 장경순의 만필세상] 우선 대비마마로 등장한 김해숙에 대한 소감이다. 정확히는 대왕대비다.

김해숙을 사극에서 처음 본 것은 1978년 MBC 일일드라마 ‘연지’다. 아마 그의 데뷔 무렵일 것이다. 확인을 위해 방송국 기록 등을 찾아봤지만 이 드라마 출연진이 누가 나왔는지는 기록이 남은 곳이 없다.

기억이 맞다는 전제로 쓰는데 이 드라마에서 화면 가득 그녀의 미모가 클로즈업 되는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다. 양녕대군이 폐세자 되기 전, 남의 집 소실인 어리의 자태를 잊지 못하고 상상하는 장면이다. 이 때 사극들은 조선왕조 실록의 인물평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해석을 하고 있었다. 양녕대군은 오로지 방탕한 인물이어서, 당연히 당시 청소년 드라마의 단골 문제아 이계인이 배역을 맡았다.

‘어리’의 클로스업 장면은 당시 중학생이던 나에게 흑백 방송 시절인데도 마치 총천연색이었던 것처럼 기억의 교란을 일으키고 있다.

이런 미녀는 앞으로 정윤희나 장미희 같은 여주인공을 단골 맡을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김해숙은 이후 수사반장의 희생자 같은 불우한 연기에 많이 나왔다. 혹시 내가 다른 배우를 혼동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드라마는 사극만 봤던 내가 다시 김해숙의 연기를 감상한 건 10년도 더 지나 조선왕조 500년 ‘대원군’ 안동김씨 수장 김좌근의 소실 ‘나주 합하’로서다.

세자가 넘보던 천하의 절색 미녀가 37년 세월이 지나 이제 왕실의 최고 어른으로 등장하고 있다.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한다.
 

▲ '사도'의 대왕대비 인원왕후로 나온 김해숙. /사진='사도' 네이버 홈페이지.


큰 누이 같은 양어머니와의 정치적 동지 관계

영화 ‘사도’에서 김해숙이 맡은 대왕대비마마는 숙종비 인원왕후, 연극배우 박명신이 등장한 중전마마는 정성왕후다.

한중록에서 혜경궁 홍씨는 두 분 윗전을 “인원 정성 두 성모”라고 부른다. 성모라고 까지 존경을 표한 건 두 사람이 정궁 신분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사도세자에게 자상한 보호막이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인원왕후는 영조의 모후이긴 하지만 영조보다 7살이 더 많을 뿐이다. 법적인 어머니이지 생모가 아니다. 그러나 인원왕후는 영조에게 있어서 인생 최대 위기에서 자신을 보호해 준 정치적 동지다. 아끼는 후궁 종아리 좀 때렸다고 영조가 의절할 듯이 대들고 따질 그런 관계는 아니다.

경종 치세에서, 연잉군(영조)을 보호하던 노론이 일제 숙청되는 일이 있었다. 노론의 과욕이 화근이었다. 김창집 등 강경파가 나서 경종에게 아들을 둘 가망이 없어 보이니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하라고 밀어붙여 이를 관철시켰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노론은 차제에 대리청정까지 관철해 경종을 식물임금으로 만들어버리려고 했다. 이게 소론의 반격을 초래했다. 김창집을 비롯한 노론 주축들이 사약을 받았다.

세제 연잉군에게도 험악한 분위기가 조성돼, 대비인 인원왕후에게 가는 문안길마저 막혔다. 연잉군은 담을 넘으면서 대비를 찾아가 “삼종의 혈맥을 보호하소서”라고 간청했다. 삼종의 혈맥이란, 효종 현종 숙종의 3대를 말한다.

인원왕후는 비록 삼종의 혈맥을 출산하지는 못했지만, 숙종의 왕후로서 이를 보호하는 것은 자신의 사명이라고 여겼다. 극력으로 연잉군을 보호해 자신의 아들로 입양하고 그가 끝내 보위에 오를 수 있게 했다.

그러니 영조에게 인원왕후는 비록 생모가 아니라도 정치적으로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어른이었다. 왕손을 보호하는 인원왕후의 모습은 사도세자에게도 똑같이 작용한 것이 영화 ‘사도’에서도 잘 묘사됐다.

15세때 숙종의 두번째 계비로 입궁했다. 이때 숙종은 41세다. 인경왕후 김씨, 인현왕후 민씨에 이어 세번째 왕비다. 인현왕후를 밀어내고 한 때 왕후가 된 희빈 장씨를 포함하면 네번째다. 숙종은 젊은 시절 장희빈과의 폭풍같은 사랑이 장년의 유혈극으로 돌변하는 참혹한 체험을 했다. 한참 어린 인원왕후를 맞이해서는 특별히 정이 돈독했다는 얘기는 전하지 않는다. 두 사람 사이 자녀도 없다.


신혼 첫날부터의 소박

중전마마인 영조의 첫 번째 왕후 정성왕후가 소생이 없는 것은 인원왕후와 사정이 좀 다르다. 여러 가지 정황에 비춰 소박맞은 ‘생과부’ 신세였다는 얘기가 많다.

이는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와도 관계가 있다고 한다.

김용숙 교수의 ‘조선조 궁중풍속 연구’(일지사. 1987)에 따르면 영조는 숙빈 최씨와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다.

“침방에 계실 때, 무슨 일이 제일 하시기 어렵더니이까.”

“중누비, 오목누비, 납작누비 다 어렵지만 새누비가 가장 하기 힘들었더니이다.”

영조는 이 자리에서 누비 토수(소매덮개)를 벗어버리고 평생 누비 옷을 멀리했다고 한다.

이 일화는 영조의 생모가 침방나인으로 고생을 많이 했음을 전하고 있다. 얘기를 전한 사람은 고종이다. 고종이 가장 오래 생존한 조선의 후궁 광화당 이씨와 삼축당 김씨에게 이 얘기를 들려줬다고 한다.

정궁인 정성왕후를 맞이한 영조가 가례 후 신방에서 왕후의 손을 잡고 “손이 참 곱다”고 하자 왕후는 “양반 집에 자라 일을 안해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있다. 영조는 이 말을 생모에 대한 모욕으로 여겨 신방을 박차고 나갔다는 것이다.

신방에서의 일화는 숙빈 최씨의 무수리 설처럼 과장해서 전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얘기가 그대로 전해진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어떻든 영조가 정궁인 정성왕후에게 별 정이 없었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왕후가 위중한 상황에서도 문병을 온 왕은 왕후를 살펴보기 보다는 엎드려있는 사도세자를 또 한바탕 꾸짖고 일어섰다고 한다.

반면 세자는 법적 어머니 정성왕후에게도 각별한 정을 갖고 있어서 임종 시에 달려와 혼수상태의 왕후에게 “소신 왔소. 소신 왔소”라며 통곡을 했다. 고달픈 생애에 한 겹 보호막이 돼 준 어른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757년 4월, 정성왕후가 승하했다. 한 달 후인 5월에는 대왕대비 인원왕후가 승하했다.

세자의 보호막이던 두 성모가 거의 일시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자신의 소생 없어도 지아비의 혈육을 보호하는 것으로 삶의 소임을 다하려던 여인들이 이렇게 함께 이승을 떠났다.

충격보호막이 일거에 벗겨진 왕실은 세자의 생모 선희궁 영빈 이씨의 힘만으로 빈자리를 메우지 못했다. 5년 후 마침내 사도세자의 비극이 벌어졌다.
 

친정집 두둔하려고 한중록 썼다는 음모론만 너무 믿으면...

▲ 혜경궁 홍씨로 등장한 문근영이 아들인 세손(정조)을 감싸고 있다. '장화홍련'의 수연이로부터 12년이 지나 숙녀가 돼서도 동그란 눈은 여전하다. /사진='사도' 네이버 홈페이지.

세자가 뒤주에 들어간 직후, 세손인 정조가 영조 앞으로 뛰어 들어가 “아비를 살려주소서”라고 간청하다 쫓겨난 바로 그날, 혜경궁 홍씨와 세손은 사가로 물러나야 했다. 폐세자가 됐으니 더 이상 빈궁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곤 하지만, 7일간 세자가 생존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상태에서 이상하리만치 혜경궁 홍씨는 남편을 구하려는 아무런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그가 쓴 한중록에서도 이 기간 오로지 “촌철을 구하지 못해 목숨을 끊지 못한다”는 한탄 뿐이다.

이런 점으로 인해, 사도세자 죽음의 공범인 아내로 몰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는 요즘 기준으로는 극심한 가정폭력에 시달린 사람이다. 바둑판으로 얼굴을 맞아 크게 다치기도 했으니 다른 난폭한 일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옷을 입히던 측근들이 여럿 목숨을 잃었는데 세자빈이라고 내내 편했을 리가 있을까. 폭력에 시달리는 아내의 공통 증상은 극도의 무력감이다. 그런 상태에서 어떻게 위기에 빠진 남편을 구할 기력을 기대할 수 있을까.

요즘 들어 음모론으로 역사를 재해석하는 경향이 많다. 실록을 곧이곧대로 믿던 전통 시각의 허점을 채우는 면에서 긍정적 기여를 한 측면은 있지만 일부 논객이 오로지 음모론 만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데는 동의하기 어렵다. 남보다 책 한 두 줄 더 읽고 나면 여러 사람 앞에서 “그게 사실은 이런 수구세력의 농간이 있었다”며 선지자 노릇하기는 쉽다. 그렇게 과시적으로 해석한 단편 사실들을 쭈욱 연결해 놓으면 앞뒤가 들어맞는 이야기가 구성되는지 돌이켜봤으면 한다.

수구세력의 농간만으로 시대의 영웅인 세자가 희생된 것이라면 그런 영웅은 왜 갑자기 그 시점에서 조선 왕실에 난데없이 태어난 것인가. 이 사람들의 이야기는 마치 성서에서 신이 영조의 몸을 빌려 영조의 아들 아닌 사람을 보냈다는 것처럼 들린다.

이들 중 일부는 이 영화가 오로지 혜경궁 홍씨의 변명에 치중했다고 주장하는데, 내가 보기엔 그의 저술인 한중록을 많이 반영했으면서도 혜경궁 홍씨에 대해 상당히 인색하게 평가했다.

혜경궁 홍씨는 오로지 홍봉한 딸로만 간주하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생생한 이야기를 오늘날까지 남겨주고 있는 인물이다.

사족: 드라마가 사실과 다르다고 트집을 잡는 것은 문학 창작과 역사를 혼동하는 쓸데없는 짓이다. 다만, 참고를 위해 영화 장면 하나와 사실을 비교해 본다. 첫 장면, 세자가 천둥치고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대전을 범하려는 장면은 실제 사도세자로서는 불가능한 장면이라고 본다.

수로를 통해 대전으로 가려고 했다는 기록은 있다. 그러나 이것은 구체적 모반이 아니라 격렬한 성정이 발동한 것으로, 몇 걸음 가기도 전에 말리는 사람들에 의해 되돌아 왔다.

실제 사도세자는 천둥을 극도로 무서워해서 이런 날은 바깥에 다니기도 힘들었다. 심지어 ‘뢰(雷)’라는 글자만 봐도 읽지를 못하고 벌벌 떨었다고 한다. 혜경궁 홍씨가 세자의 승하한 날을 뒤주에 갇혀 있는 동안 뇌성벽력이 치던 날로 추측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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