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하는 성군들의 그림자, 아들을 죽이는 비극
[초이스경제 장경순의 만필세상] 영화 ‘사도’가 추석 연휴 극장가를 지배한 강자로 떠올랐다. 영화를 본 사람들이 뒷얘기에 분분하며 감동을 이어가는 한편, ‘영조는 왜 아들을 죽였나’라는 오래 된 미스터리가 다시 관심을 모으고 있다. 만필자도 연휴가 끝나가는 시점에서 ‘사도’ 관련 세 번째 만필을 통해 결론 도출에 감히 동참해 보고자 한다.
드라마는 역사가 아니고 역사는 드라마가 아니다
드라마는 반드시 이를 창작하는 사람의 창의력이 들어가야 한다. 그게 없다면 감히 예술을 자처할 수 없다. 그래서 드라마는 역사가 돼서는 안 된다. 최불암의 영조(1980), 김성원의 영조(1988), 그리고 송강호의 영조(2015)가 모두 저마다 특색과 고유한 가치를 지닌 이유다.
이와 함께, 역사는 그 당시를 헤쳐 나가는 사람들이 절대 그 결말을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 드라마와 다른 것이다. 드라마 배역들이 결말을 설명하기 위해 복선을 던져주는 그런 행동을 역사 속 실제 인물들은 할 수 없다. 나중의 결말을 멋지게 하기 위해 지금 멋있는 대사나 행동을 선보이는 것은, 극본이 아니라 치열한 현실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기대할 수 없는 호사(豪奢)다.
역사를 읽는 우리는 결말을 알고 있다. 역사 속 인물도 그 결말을 알고 있을 것으로 착각하고 사건들의 전후관계를 이어나간다. 이런 오류가 듣는 사람에게는 제법 파고드는 힘을 가진다. 역사를 드라마처럼 각색하기 때문인데, 과학적 상상력의 범위를 벗어났다면 그 또한 왜곡이다.
여기다 정치적 목적까지 합쳐지면, 아집까지 생긴다. 해석은 더욱 돌아올 수 없는 오류의 강을 건넌다. “왜 자꾸 내 말을 안 듣고 한중록을 기웃거리냐”는 식이어서는 곤란하다. 한 눈은 감고 있는 이런 사람들 아집으로 감히 폄하할 수 있는 한중록이 아니다. 일부의 정치의도가 있다 한들, 국모의 자리마저 눈앞에서 잃은 여인이 덤덤하고 생생하게 써 내려간 사연 전부를 무시할 권위가 과연 이들에게 있을까.
노론 벽파, 폐세자는 몰라도 죽일 힘까지 있었을까
일부에서는 사도세자가 조선 300년의 집권 도구 서인(이 시기에는 벽파로 분화)의 모략에 희생된 ‘아까운 인재’라고 한다.
조선은 임금이 사대부 여론에 복종하지 않으면 연산군 광해군처럼 왕권을 잃는 나라였으니, 영조가 ‘삼종(효종 현종 숙종)의 혈맥’이 사도세자에서 끊이지 않도록 그를 죽였다고 한다. 크게 보면 여기에 흠을 잡기는 어렵다. 주류 여론과 마찰을 빚는 아들을 그냥 놔두면 자손이 모두 무사하지 못할 일이었다.
그러나 목소리를 더욱 높여, ‘개혁 성군이 됐을 사도세자가 권력욕의 화신인 서인 중의 노론, 노론 중의 벽파 음모에 의해 죽었다’는 식이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것이 바로, 당시 인물들이 모든 역사 결말을 미리 알고 그에 맞춰 행동했다는 식이다.
1762년 5월22일 ‘나경언의 고변’ 사건은 벽파 세력의 사주가 있었을 개연성이 매우 높긴 하다. 하지만 이것이 세자의 죽음까지 몰고 온 것으로 보기는 무리다. 폐세자의 이유는 될 수 있어도 아비가 자식을 죽일 이유가 되기는 부족하다.
세자를 꾸짖은 내용도 “장래에 여승의 아들을 반드시 왕손이라고 일컬어 데리고 들어와 문안할 것이다. 이렇게 하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겠는가”라며 방탕한 생활에 관한 것이었다.
노론 벽파들의 세자 모함은 여기까지였다. 그들에게는 아비가 자식을 죽이게까지 만들 힘은 없었다.
아무리 총애가 넘쳐나는 신하도 임금의 자식을 죽이지는 못한다. 스스로 죽인 자식의 마지막 외마디를 평생 환청으로 듣게 되는 임금의 화풀이가 누구에게 향할 것인가. 제 아무리 정도전이라도 이성계 생전에 이방원을 죽이지 못한 이치다.
사도세자에게 비극을 몰고 올 최후의 폭풍은 왕실 내부에서 발생했다.
세자는 다음날인 23일부터 연일 금천교 시민당 등에 나가 엎드려 죄를 청했다. 가뜩이나 심리가 허약한 세자는 더욱 파국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와중에 영조는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에 나가 세자가 시민들로부터 뺏은 재물을 돌려줬는데 이는 고변 내용에 따른 것이다.
왕은 29일이 돼서야 세자가 명을 기다리는 것에 대해 언급했다. “눈과 귀가 참으로 아주 개탄스럽구나. 나는 세자가 명을 기다리는지 몰랐다.”
이틀 후인 윤5월 1일 새벽, 비오는 밤을 지샌 왕에게 영의정 홍봉한과 우의정 윤동도가 “요즘은 소조(세자)께서 매우 뉘우치고 있습니다”고 말하자 왕은 “말도 말라. 말도 말라”며 손을 내저었다. 왕은 “어렸을 때 너무 사랑하는 것을 늙은 환관이 그러지 마시라는 얘기를 듣지 않아 후회된다”고 개탄했다. 영조의 언사에서 아직 살기(殺氣)는 엿보이지 않는다.
세자가 죄를 청하는 것은 13일까지 계속됐다. 바로 뒤주에 들어간 날이다. “아바님, 아바님” 외치면서 용서를 구하는 세자에게 임금은 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의 고변 사실을 전하며 “세자를 깊이 가두라”고 명했다.
세자는 최후의 결정타를 어머니에게 맞은 셈이 됐다. 영빈 이씨는 이날부터 2년 후 운명하는 날까지 자신의 행동이 더 큰 비극을 막는 일이었는지를 번민하며 잠 못 드는 밤을 보냈다.
찰스 영국 왕세자가 던져주는 힌트
영국의 찰스 왕세자는 기네스북 기록 보유자다. 저군(儲君. 태자 또는 세자) 재위 기간 63년으로 인류 역사상 가장 길다.
“내가 각별히 조심하지 않으면 나의 시간은 사라지고 말지도 모른다.”
찰스 왕세자가 2012년에 한 말이다. 장수하는 어머니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 인해 자신이 왕을 못할지 모른다는 조바심을 드러냈다. 영국에서 인기가 어머니는 말할 것도 없고 아들인 윌리엄 왕자(왕손)만도 못하고 찰스가 왕이 되면 영연방 국가들이 이탈할 것이란 지적도 나오는데 본인 생각은 다른 모양이다.
그러나 그의 말은 장수하는 임금의 저군들 심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정권이 없는 입헌군주제에서 이 정도인데, 정말로 통치하는 나라 세자들은 어땠을 것인가.
찰스 왕세자에게 최장 저군 기록을 내준 에드워드7세는 세자로서 59년 2개월간 기다림의 세월을 보냈다. 그가 이 스트레스를 해소한 방식은 무수한 여성과의 스캔들이었다. 그의 연인 55명에는 영국 상류사회의 귀부인들도 대거 포함됐다. 한 건 터질 때마다 모후 빅토리아 여왕은 “내가 너무 오래 살아서 그래...”라고 개탄했다.
이들의 얘기는 저군 세월 20년만 돼도 부왕과 마찰을 피하지 못하는 동서고금의 정치 원리를 보여준다.
유례없는 부왕의 장수, 필연적으로 세자와의 영역충돌을 빚었다
사도세자는 27세 생애 가운데 세자로 26년, 대리저군으로 14년을 보냈다. 나이 30이 안됐다고 하나 대리청정 14년만으로도 그의 동궁(東宮)은 작은 조정을 형성하기에 충분했다. 소조(小朝)라는 말 그대로다.
문제는 이렇게 되면, 소조도 소조 나름의 신하 그룹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임금의 대조에 속한 신하들과 이해가 충돌한다. 대조와 소조의 마찰이 불가피하다. 어느 왕이나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대개는 두 그룹 간 진짜 심각한 싸움이 나기 전에 임금이 세상을 떠난다.
의술의 한계로 임금도 50세 천수를 누리기도 힘들던 시대에 영조처럼 82세 장수는 말할 것도 없고 70 가깝게 사는 것도 극히 예외적이다.
한마디로 부왕이 장수하면 세자와 영역 충돌이 발생한다. 그런데 왕의 장수라는 것이 흔치 않던 시대여서 한국과 중국의 왕실 모두 이에 대한 지혜로운 해법을 마련하지 못했다. 부왕이 아들을 죽인 것이 한국사에서 유일한 것이지 다른 나라까지 살펴보면 전대미문의 일은 아니다. 빅토리아 여왕의 “내가 너무 오래 살아서...” 라는 개탄에는 넋두리 이상의 정치 역학 문제가 담겨 있다.
이런 비극은 부왕이 훌륭한 임금일 때 벌어진다. 아둔한 임금이어서 나라가 혼란하면 아들과 싸울 틈도 없다. 왕은 적을 맞이하고 아들은 도망 다니면서 분조(分朝)를 준비하기 바쁘다.
오래 통치한 성군부자로서 갈등이 없던 예외적인 경우는 조선 세종과 문종이다. 그러나 이분들은 태평성세를 이끈 살신성인의 근정(勤政)으로 인해 아버지와 아들 모두 몸이 피폐해가고 있었다. 또한 조선왕조 처음으로 적장계승을 해야 한다는 세종대왕의 의지가 강했다. 대왕이 둘째아들에게 수양대군이란 군호를 손수 짓고 8살 단종을 세손 책봉한 것도 이 때문이다.
사도세자와 흡사한 한무제와 여태자의 비극
중국 최초의 정복 군주로 유명한 사람이 한나라 무제다. 기원전 108년의 조선 침략으로 우리 민족과 악연을 갖고 있지만, 흉노 원정으로 전 세계적 민족 이동을 초래한 사람이다.
한무제와 그의 아들 여태자의 사연은 영조와 사도세자의 비극과 가장 흡사하다.
한무제가 65세 되던 해, 강충의 태자에 대한 모함이 극에 달했다. 궁지에 몰린 태자는 절박한 상황에서 강충을 살해하고 병력을 동원하는 극단적 선택을 했다. 곧 한무제의 친위군에 반란은 진압되고 태자는 자결했다. 태자 뿐만 아니라 생모 무사황후 위씨도 아들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한무제는 태자의 죽음 직후, 그가 모함에 빠졌음을 깨닫고 불쌍하게 여겼다. 전란 중 간신히 목숨을 건진 태자의 아들이 훗날 선제로 즉위할 수 있었던 건 이 덕택이다. 아들을 잃고 난 후 곧바로 후회하는 모습이 영조와 비슷하다.
죽지는 않았어도 죽음이나 다를 바 없는 폐위를 당한 태자도 있다. 당태종 이세민의 장자 이승건, 청나라 성조 강희제의 둘째 아들 윤잉이다. 승건은 폐위된 후 유배된 곳에서 오래 버티지 못하고 고구려 원정에 나서려던 부황에게 부음을 전하게 됐다. 윤잉은 태자 재위 37년 만에 폐위돼 10년 후 아버지 강희제 승하 소식을 연금 상태에서 맞았다. 2년 후 그도 세상을 떠났다.
사도세자, 여태자, 이승건, 애신각라 윤잉은 오랜 저군 세월 끝에 폐위된 사람들이다. 또 하나 이들의 공통점은 아버지가 대단히 훌륭한 군주들이었다는 것이다.
강희제가 윤잉의 죄상을 추궁하는 가운데는 “‘태자만 40년 하는 사람은 나뿐일 것’이라고 푸념한 적이 있는가”라는 질문도 들어있다.
음모론만 집착하면 하나하나 사건 설명은 멋있어 보여도...
영조의 52년 통치는 조선에 영정 중흥기의 축복을 내렸지만, 사도세자에게는 그 자체가 죽음의 함정이 가득한 것이었다. 비정한 얘기지만 왕조의 생리가 그렇다. 한국만의 얘기도 아니다.
그렇다고 이것 한 가지 만이 뒤주의 비극을 초래했다고 할 수도 없다. 세상일이란 복합적인 것이다. 세자와 그의 측근들이 조심에 또 조심을 거듭했다면 비켜갈 운명이었을 수도 있다.
한중록의 모든 것을 자기변명이라고 비난할 정도로 사도세자를 개혁군주로 치켜세우고자 한다면, 그에 대한 사회적 배경 설명도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역사 해석의 궁핍함은 “어떤 위대한 인물이 탄생한 덕택에”라는 설명이 몇 번 들어가느냐다. 우리가 한글창제를 오로지 세종성군의 위대함만으로 설명하는 건 아직 연구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조선이 고려와 달리 어떻게 못 배운 사람도 글이 필요하게 됐는지를 설명해줘야 한다.
세자가 난데없이 개혁 사상을 갖춘 인물로 태어났다면 필연은 아니더라도 개연성을 높여줄 그의 탄생 배경이 설명돼야 한다. 사도세자는 훗날의 결과를 알고 태어나는 픽션 인물이 아니다. 200년 후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대한 예시를 주려고 창조된 드라마 인물이 아니라는 얘기다.
부친의 극진한 기대에 갓 어린 나이에 생모 손을 떠났는데 타살설이 돌고 있는 선왕의 궁인들이 세자를 모시면서 개혁사상을 주입시켰다고 하는 얘기는 너무 허망하지 않은가. 음모론이 균형잡힌 사관 정립에 기여하는 것이 분명히 있지만 그 자체만으로는 앞뒤가 맞는 일관성있는 해석을 주지 못한다. 스물일곱해, 하루하루를 힙겹게 이어나간 세자를 후세에 전하는 정확하고 타당한 방법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