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무제가 고조선 무너뜨렸다"는 건 기술적으로 황당한 얘기

[초이스경제 장경순의 만필세상] 모든 인류의 조상은 아프리카에서 살았다고 한다. 아프리카 아닌 곳에서는 혹독한 겨울을 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인종차별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은 인류 진화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서 자신이 스스로의 혈통을 모욕하는 것임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B.C. 2333년이 고조선 개국연도라고 하는데, 이보다 앞선 B.C. 2613~B.C. 2500년의 이집트 제4왕조 쿠푸왕은 기자에 대형 피라미드를 세워 향후 4000년간 전 세계 최고 빌딩이 될 건물을 남겼다.
 

▲ 서울 종로구 사직단에서의 '개천절 대제전' 모습. /사진=뉴시스

 

아프리카에서 진화를 거듭하던 인류 가운데 200여명의 무리가 드디어 시나이반도로 넘어갔다.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가르는 수에즈 운하와 같은 것은 있을 수도 없는 때이니 이들은 도보로 이동했다. 이 작은 무리가 오늘날 모든 아시아 유럽 아메리카 오세아니아 인류의 조상이 됐다.

일부는 알타이 중앙아시아 몽고 초원으로 이동했다. 말을 잘 타고 활 잘 쏘는 용맹한 기마유목민족이 됐다. 유목민족은 아들이 장성하면 분가해 멀리 떠난다. 큰 아들일수록 아버지의 초원과 더욱 먼 곳으로 떠난다. 아버지의 초원은 막내가 물려받게 된다. 선사시대에도 이런 풍속을 가졌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초원의 인류 중 일부는 더욱 동쪽으로 이동해 갔다. 지금의 한민족과 만주족의 조상이다.

신화에는 민족의 철학과 신학도 담기지만, 미처 기록에 남기지 못한 잠재의식도 들어간다. 역사의 고증이 발달했다고 해서 신화를 그냥 옛날 얘기로만 평가절하할 일이 아니다. 과학이 발달해 점점 정확한 민족의 발자취가 연구되고 있는데, “우리 민족은 UFO 타고 백두산에 내려왔다”고 계속 우길 일도 아니다.

한민족의 단군 성조 아버지는 환웅이다. 환웅은 환인의 명을 받아 지상에 내려왔다.

신화 속 환인(桓因)은 이 세상을 만든 조물주다. 현실적 의미로는 태초의 인류로 아프리카에서 태어나고 기나긴 대륙횡단을 수 세대 동안 이어온 모든 조상들을 상징한다.

조물주로부터 이 모든 기나긴 혈통의 흐름이 환인이라는 말에 포함된다. 환인은 ‘한님’이라는 순 우리말의 한자표기라고 한다.

일부에서는 ‘한’이라는 말의 어원을 ‘칸(汗)’으로도 본다. 칸은 몽고 대초원의 수장이다.

환인, 즉 한님은 좁게는 환웅의 진짜 아버지이기도 하며, 궁극의 의미로는 한민족의 위대한 역사가 있도록 세상을 창조하신 절대자, 그리고 중간의 모든 조상을 뜻하는 말씀이다.

신화에서 환웅이 세상에 내려왔다는 얘기는, 드디어 인류의 장구한 이동이 한민족의 영역에 발을 들인 것으로 해석한다.

 

혹독한 계절이었다. 가축을 먹일 초지도 남지 않았다. 이 가축을 잡아먹으면 다음은 무엇으로 먹고 사는가.

이대로는 무리를 살릴 수가 없어 새로운 초지를 찾아야만 했다. 모르는 땅을 개척하려다보면 그곳에 이미 터를 내린 사람들과 전쟁도 치러야 한다.

그래도 이대로 굶어죽을 수는 없는 일. 아버지 한님을 떠나올 때 아버지의 당부와 스스로의 결의를 다시 생각했다. 환웅은 무리의 전사를 모아 기약없는 탐사에 나서기로 했다.

환웅은 지금의 거처로 이동해 오면서 새로운 무리의 사람들을 만나 환웅의 부족으로 흡수했었다. 무리 가운데는 호랑이를 상징으로 한 부족과 곰을 문장으로 쓰는 부족이 규모가 컸다.

두 부족의 우두머리에게 최대한 가축을 잡아먹지 말고 아끼며 견뎌줄 것을 당부했다.

석 달이 넘는 환웅의 탐사는 대성공이었다. 가축을 먹일 새로운 땅도 찾았고 무리를 더욱 부강하게 할 새로운 사람들도 만나 합류시켰다.

본거지로 돌아와 보니, 호랑이 부족이 떠난 후였다. 싸움에서는 용맹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들이었는데 기근을 견디지 못하고 절박하게 살 길 찾아간 것이었다. 그들이 어찌 됐는지는 이후 소식이 없었다.

반면 곰 부족 사람들은 용케도 땅에서 먹을 것을 기르는 법을 터득해 놓고 있었다. 가축도 보존하고 사람도 버텨낸 것이다.

환웅은 점점 커지는 무리에서 곰 부족의 이러한 강인함과 지혜가 살 길이라고 절감했다. 곰 부족장의 딸이 환웅의 아내가 됐다. 이들 사이에서 단군 성조가 탄생했다.

[보편적인 지식의 범위를 벗어나 만필자 개인의 상상을 단군신화에 더해 보았다.]

 

단군이 세운 조선이 기원전 108년 한나라 무제의 공격에 무너졌다는 것이 내가 학생 때 배운 내용이다. 워낙 오래 전 역사여서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겼지만, 상식을 가지고 판단해 보니 상당히 황당한 얘기가 된다.

국수주의자들이 지나치게 민족사를 과장 미화하는 것도 거부감을 초래한다. 무조건 우리 민족이 강했다고 주장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런 자세를 버리고 상식으로만 따져보니, 한무제의 고조선 격파는 고조선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초강대국으로 과장하고 있다.

우선, B.C. 2333년에 생긴 나라가 B.C. 108년까지 2215년간 내내 패권을 유지했다고 믿기 힘들다. 또한 고조선의 기술진보 상태를 감안할 때,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 단일 국가로 지배력과 행정력을 발휘했다는 것도 믿기 힘든 최첨단 외계 강대국이었다는 얘기가 된다.

한무제가 무너뜨린 조선이 고조선도 아니다. 기자조선이 위만조선으로 변한 것이다. 그렇다고 기자조선이 한반도와 만주 전체를 지배할 나라도 아니다.

한반도와 만주에도 중국의 상고시대나 춘추시대처럼, 단일한 국가가 아닌 여러 부족국가가 흩어져 있었다고 보는 게 상식에 부합한다. 이 가운데 맹주 국가가 등장해 점차 한민족 국가로 통합되는 구심이 됐다. 이 드넓은 땅에 이 많은 나라들을 한나라 장수들이 일일이 다 찾아다니며 싸울 수도 없었다. 그러기 전에 한무제가 종군한 장수들을 먼저 처형했다.

무수한 한민족 국가 가운데 최초의 맹주국가가 단군 조선인 것이다. 맹주의 패권을 1000년, 2000년 넘도록 단군 조선이 계속 보유했을 것으로는 보기 어렵다. 국가의 흥망성쇠에 따라 한민족 또한 흥미진진한 패권 쟁패의 역사를 가졌을 것이 분명한데 기록이 없음이 안타까운 일이다.

단군 조선이 때로는 패권을 다른 국가에 내주기도 했겠지만, 최초로 하늘에 큰 제사를 올린 권위는 내내 존중됐을 것으로 본다.

 

한무제가 무너뜨린 건 기자조선일 뿐

고조선 건국 후 1300여년이 지난 어느 날, 서쪽에서 기자의 무리가 이주해 왔다. 기자는 그 무렵 멸망한 중국 은나라의 귀족이다.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책봉했다고 사기는 기록했지만, 중국이 조선까지 제후를 책봉할 형편이 아니었다. 은나라왕의 폭정에 맞선 현인으로 존경받는 기자가 새 천자에 충성하는 것도 거부를 하니 중국을 떠나도록 허용한 것이다. 기자와 후손들이 한 번이나마 중국 제후들의 회맹에 참석했다는 얘기도 없다. 주나라의 동쪽 땅은 지금의 북경 근처 연나라 까지다.

기자가 조선 지역으로 망명하면서 많은 은나라 무리들이 그를 따랐다. 상고시대 새로운 국가 성립 과정이 늘 그렇듯, 기자 또한 북방 단군 조선과 많은 한민족 국가들의 영역을 피해 비교적 남쪽에 터를 잡았다. 은나라에서 누리던 청동기 문화와 농경 기술 등을 도입해 들여오니 차츰 세력을 규합해 나갔다.

시조인 기자의 고향이 중국이다보니 기자조선과 중국 동쪽 국가들과 교류와 갈등이 잦았다. 기원전 195년에는 한나라 개국황제 유방을 배신한 노관이 기자조선으로 망명을 타진해 왔다. 노관은 끝내 기자조선이 아닌 흉노로 망명했지만 그의 수하 위만이 기자조선으로 넘어왔다. 위만은 후에 기자조선의 국권을 차지한다. 이후 중국과의 마찰은 더욱 잦아졌다.

마침내 한무제의 군대가 침략해 기자조선을 무너뜨리고 한4군을 설치했다.

사마천이 사기에서 기자조선을 조선 전체인 것으로 기록한 것은 그가 알고 있던 한나라 동쪽은 그게 전부였기 때문이다. 기자조선의 북쪽 더 많은 조선의 나라들이 맹활약하고 있었지만 중국과는 아무 이해관계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그때까지다.

점차 발달하는 기술 문명으로 인해 마침내 한민족, 한족 두 민족의 주류가 국경을 맞대고 충돌하는 일이 곧 벌어지기 직전이었다.
 

▲ 한무제의 초상. 그는 위만조선으로 변한 기자조선을 무너뜨렸을 뿐이다. 북방 초원에는 더욱 용맹한 많은 한민족 국가들이 맹활약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직은 한나라 황제가 알 필요도 없던 시대였다. /사진=위키백과.

 

민족의 중시조, 해모수의 약진

B.C. 239년, 23세의 새로운 젊은 영웅이 웅심산에서 거병했다. 그는 한민족의 성지인 단군조선의 백악산을 점령하고 조선의 새로운 맹주로 떠올랐다. 해모수다.

해모수는 아직까지 역사 속 실존 인물로 평가되지 못하고 있다. 한민족 고대사 연구가 빈약한 때문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정황으로 그는 숨길 수 없는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고구려 건국사가 대표적이다.

고구려 건국 설화에 주몽은 해모수 아들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주몽은 B.C. 58년에 태어났다. 아무리 해모수가 영웅이지만 200살도 넘어서 아이를 낳기는 매우 어렵다.

주몽이 고구려 건국을 위한 세력 규합에서 해모수와의 관련을 강조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으로 해석하면 되는 대목이다. 그만큼 조선 민중에게 해모수는 결집의 상징이었다.

해모수가 세운 나라는 북부여, 신조선 등으로 전해지고 있다.

신조선의 전성기에는 흉노의 불세출의 전쟁영웅 묵돌 마저 그 위세에 굴복했다. 사마천이 사기에서 동호(東胡)라고 부르고 있지만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이를 신조선이라고 설명한다.

야심을 가득 숨긴 묵돌이 말과 애첩을 바치는데 방심했다가 일거에 공격을 받고 크게 국력을 상실했다. 한민족이 가축을 먹이며 말 달리던 초원을 상실하게 된 것이 이 때다. 우리 민족에게 최초의 시련을 안겨준 외세는 한무제가 아니라 흉노의 묵돌인 것이다.

신조선을 궤멸적 위기로 몰아넣은 묵돌이지만, 표적을 중국 대륙으로 돌려 한민족이 위기를 수습할 여유를 얻었다. 묵돌은 이제 막 대륙을 통일한 한고조 유방을 백등산에서 일주일이나 포위한 끝에 공주와 예물을 받는 조건으로 풀어줬다. 이후 한나라는 한무제의 정벌 이전까지 계속 흉노에게 공주와 재물을 바쳐야 했다.

신조선은 쇠퇴했지만 해모수는 민족에게 웅원한 꿈을 민족혼으로 남겨줬다. 단군성조가 민족의 시조라면 해모수는 중시조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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