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왕자의 난, 무인정사의 재구성 -1] 상대는 이 나라 최고 전쟁 영웅인 아버지

▲ 근정전 뜰에서 바라본 근정전과 인왕산. 무학대사는 경복궁이 인왕산을 주산으로 해서 이를 등지고 서야 한다고 주장해 유학자들과 대립했다고 한다. 인왕산이 좌청룡이 되면 우백호인 낙산의 기상을 압도해 이 나라는 내내 작은 집이 큰 집을 앞서게 될 것이라고 무학대사가 지적했다는 얘기가 전하고 있다. /사진=초이스경제.

 

<1회>

[초이스경제 장경순의 만필세상] 가을 색을 더해 가는 10월 초, 저물어가는 해는 인왕산의 왼편에 걸려 있다. 근정전 뜰에서 보는 인왕산은 사람의 마음에 경박함보다는 장중함을 더해준다.

올해 10월7일은 음력으로 8월25일이다. 617년 전 이날 밤, 정안군 이방원은 제1차 왕자의 난, 즉 무인정사를 일으켰다. 만필자는 3회에 걸쳐 1398년 이 날, 그의 발길을 따라가며 그날의 정황을 재구성해 보기로 한다.

생전 칼 한번 제대로 잡아본 적 없는 사람의 생애 최초 군사행동이었다. 허름한 상대도 아닌 당대 최고의 전쟁 영웅에게 도전하고 나섰다. 그 사람은 다른 사람도 아닌 자기 아버지다.

독자들이 여러 번 봤을 그림이고 만필에서도 몇 번 소개했지만 이번에는 이방원의 관점에서 태조 이성계의 초상을 한번 보기로 한다.
 

▲ 조선 태조대왕 어진.

 

역사에서 전하는 대로, 덕을 갖추고 있어서 더욱 무서운, 이 사람에게 대들기보다는 복종하고 싶은 본능이 저절로 생겨나는 모습이다.

어린 시절 함흥 고향, 수많은 민족의 칼과 창이 교차하는 그 험한 곳에서 이 사람의 아들로 태어난 덕택에 두려운 것 모르고 자랐다. 오늘 이방원은 이 사람을 쓰러뜨려야 한다.

이 위대한 인물이 오늘밤을 넘기기조차 힘들 정도로 위중하다는 사실도 이방원의 마음에는 쇳덩어리다. 이 사람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오늘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내일은 자신이 죽은 목숨이다. “그래도 자식”이라며 보호해 주신 아버지가 없는 세상에서 정도전이 자신을 놔둘 리 없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 그나마 실낱같은 희망이 조금 더 커진 순간이 있다면 바로 오늘이다.

이 때 일을 객관적으로 살펴보면, 무인정사는 오로지 이방원 세력이 사전에 계획한 것이다. 정도전 일파가 그를 먼저 죽이려했다는 주장은 정변의 명분으로 내세운 것에 불과하다. 정도전의 이 날 패배 과정은 선제공격하는 사람의 모습이 전혀 아니다.

이방원에게 이날까지 아무 계획이 없었는데 상황급변에 따라 임기응변으로 일으켰다고 보기도 어렵다. 충청관찰사로 나가 있던 그의 측근 하륜이 이날 밤 남산까지 진출해 다음날 아침 입성한 것으로 보면 이방원 하륜 이숙번 등이 거사를 사전 모의한 것이다.
 

오후 3시 이전 경복궁: 세상을 뒤집는 날의 기다림.
 

▲ 지금 근정문 서쪽의 건물은 수정전 뿐이다. 왕자들이 임금 승하에 대비해 대기했던 행랑 건물을 찾을 길이 없다. /사진=초이스경제

 

1398년, 태조 7년 들자마자 임금은 자주 앓기 시작했다. 아프고 일어나기를 거듭하다 거사 11일 전의 발병은 정말 심각했다. 한동안은 세자 이외 아무도 왕을 볼 수 없다가 마침내 세자의 이복형들에게도 임금의 병이 급하니 모두 대기하라는 명이 내렸다.

이방원 형제들은 근정문 바깥 서쪽 행랑에서 대기했다. 근정문 서편에는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이 있을 뿐, 이들이 대기했을 만한 건물을 찾기 힘들다. 수정전이라는 건물이 있으나 이는 집현전이 있던 것을 다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왕자들이 대기한 행랑은 누울 수도 있는 곳이었다.

이미 이날은 이방원의 ‘D-데이’로 잡혀 있었다.

이날 오후, 그는 경복궁 서쪽 영추문을 나갔다 들어오기를 두 번을 거듭하게 된다.

신시(오후 3~5시)에 부인이 아프다는 기별을 받고 사저로 달려와 부인과 둘째 처남인 민무질과 얘기를 나누고 다시 대궐로 돌아왔다. 이날의 중간 상황을 점검한 것으로 추측된다.
 

▲ 경복궁에서 보이는 인왕산의 모습을 여러번 담아봤다. 하룻밤 사이 천지를 뒤흔들기로 작정하고 영추문을 출입한 이방원의 시야를 가장 많이 차지했을 인왕산이다. /사진=초이스경제

 

초경(저녁 6시) 경복궁: 마침내 영추문 나서 생사의 갈림길로.

이방원이 대궐로 다시 돌아온 후 왕자들은 종자들을 놔두고 안으로 들라는 명이 내렸다. 큰일이었다. 일을 벌어야 하는데 이대로 들어가 갇혀버리게 생겼다.

“밤에 등불을 밝혀야 하는데 등불이 없다”며 수상하다고 버텼다. 그리고는 이번에는 자신이 배가 아프다면서 안으로 들어서지 않고 서쪽 행랑 문밖의 화장실로 들어갔다.

친형제와 종친들을 대상으로 “오늘 저들이 우리를 죽이려고 한다”며 겁을 준 것이다. 이런 심리전이 효과를 냈는 모양이다. 셋째형 익안군 이방의, 넷째형 회안군 이방간이 방원을 부르면서 밖으로 나왔다. 

이방원에게 ‘주사위는 던져졌다’ ‘루비콘 강을 건넜다’는 순간은 이 때였다. 이날 밤 아무런 일을 벌이지 않더라도 나중에 명백한 혐의를 남길 만한 선택을 한 것이다. 그는 대기시켜 둔 말을 타고 다시 영추문을 빠져 나왔다. 형제들도 허둥지둥 방원을 따라 나왔다.
 

▲ 경복궁 안쪽에서 본 영추문의 6시 폐장 무렵 모습. 이방원은 측근이 미리 대기해 둔 말을 타고 이 문을 나섰다. 그의 이날 두번째 출궁은 제1차 왕자의 난 거사를 하러 가는 길이었다. /사진=초이스경제.

 

방원은 심지어 세자의 동복형인 방번도 회유하려고 했다. 이성계의 후처인 강씨 소생 방번은 이성계가 방석보다도 먼저 제시했던 세자 후보였다. 그러나 신하들이 “광망하고 경솔하다”며 난색을 표해 방석이 세자가 된 것이다.

방원은 측근장수 마천목을 시켜 방번에게 “저들(세자와 정도전 일파)이 너도 보전해 주지 않을 것이다”라고 전했다. 그러나 방번은 이 말을 따르지 않았다. 방번도 나름 측근이란 자들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이들은 방번에게 “장차 세자를 공으로 바꿔드리겠다”고 부추겨왔다. 이 자들의 말을 듣고 방번은 방원을 따라나서지 않았다.


저녁 7~8시 정안군 사저: 이것이 과연 거병 군세인가.

독자들에게 양해를 구할 일이 있다. 이번 취재에서 거사의 출발점이 되는 정안군 이방원 사저가 내내 의문이었다.

서울 종로구 통인동 독일안경원 앞에는 세종대왕 탄신지 푯말이 있다. 대왕 탄생하신 곳이 ‘잠저’라고 하니 이 곳이 곧 이방원의 사저다.
 

▲ 서울 종로구 통인동 세종대왕 탄신지 표지석. 1398년 무인정사 당시 정안군 사저 또한 이곳이었는지는 지속적으로 취재하기로 한다. 이방원의 반군 행렬이 사저를 출발한 저녁 7시 날은 이미 완전히 어두워졌다. /사진=초이스경제.

 

이 곳은 만필자에게 매우 친숙한 곳이다. 매일 아침 걸어서 초등학교 통학을 하던 곳이다.

잘 아는 곳이라 반가운 점이 있지만, 곤란한 점도 있다. 너무나 잘 아는 곳이어서 과연 이곳이 반란을 시작할만한 곳이냐는 의심이 들었다.

내가 다닌 학교는 경복궁 영추문 바로 앞에 있었다. 어린 아이 걸음에 10분 거리다. 인적이 한가해진 저녁 반군의 말이 울면 그 소리가 대궐 문지기 귀에도 들어갈 만한 곳이다.

무엇보다 세종대왕 탄신 후, 갈수록 격해지는 정치 상황에서 요주의 인물 이방원이 이토록 대궐에 밀접한 곳에서 살았겠냐는 의문을 갖게 됐다. 많은 검색을 해 봤는데 1398년에는 광통교 지난 곳에 머물렀다는 글도 나왔다.

전주이씨 종약회에 문의해 봤지만, 정확한 기록은 얻지 못했다. 궁여지책으로 이번에는 위치가 가장 확실한 세종대왕 탄신지를 당시 사저로 보고 취재하기로 했다. 보다 더 정확한 자료를 얻게 되면 다시 취재에 나설 것이라고 약속드린다.

이번 취재를 10월7일 당일에 맞춘 주 된 이유는 일몰과 같은 계절적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서다. 조명이 없던 조선시대 오로지 달빛과 밤눈으로 사람들은 밤길을 다녔다.

날이 저물면 인왕산 호랑이가 민가로 내려온다는 소문도 많던 시대다. 인적이 급속히 드물어진다.

정안군 사저 앞 신극례의 집에 반군이 모였다. 진작부터 신극례 집에서 대기하던 이숙번이 장사 두 사람과 함께 갑옷 차림으로 나왔는데 여타 동지들에 비해 대단히 훌륭한 전투태세를 갖춘 것이었다.

이방의, 이방간 부자, 외척인 상당군 이백경이 말을 타고 있었고 이거이(이백경의 아버지), 조영무, 신극례, 서익, 문빈, 심귀령 등 동지들이 모였다. 여기에 처남인 민무구 민무질이 가세했다. 그러나 병력은 기병 10명, 보졸 9명에 불과했다. ‘병’과 ‘졸’이란 말로 보아 19명 병력에 언급한 장수들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래도 장수까지 포함해 30명이 안 된다. 지금 이 병력으로 정권을 차지하겠다는 것이다.

이번 취재에서 제일 궁금했던 부분이다. 이제 막 개국해서 당국자들의 의욕이 넘쳐나는 나라의 관군이 어떻게 30명에게 패배했는지를 알아보려는 것이다.

1996년 드라마 ‘용의 눈물’이나 2015년 ‘정도전’처럼 용감무쌍하게 관군을 향해 이들이 돌진했다면 한글창제는 1443년보다 상당히 뒤로 늦춰졌을 것이다. 45년 후 한글을 만드실 분의 아버지가 이날 돌아가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막 돌이 지난 세종대왕께도 왕이 되기는커녕 고난으로 가득 찬 생애가 기다렸을 것이다.

오래 전 역사에 대해서는 누가 감히 나만 옳다고 얘기할 수 없다. 각자 노력해 가장 앞뒤가 맞는 것으로 판단되는 해석을 제시할 뿐이다.

제1차 왕자의 난은 전투가 극히 일부에서만 벌어졌던 정변이라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군사보다 역사와 정치에 밝은 이방원은 병력에 의한 정변보다 조정에 광범위한 우호세력이나 잠재적, 정서적 우군을 미리 개척해 둔 후 극히 제한적 군사행동에 나섰다는 것이다.

그래야지 19명을 거느리고 광화문 앞에 달려간 이 사람들 행동이 설명이 된다.

실록에서는 관군과 반군이 광화문에서 대치한 문장이 먼저 등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기록한 사람이 어떤 이유에서든 시간을 무시한 기술을 했다고 본다. 이방원군이 광화문 앞에 나아간 것은 19명보다는 형편이 상당히 좋아진 다음으로 봐야 할 것이다.


27분 걸리는 거리, 용맹한 무사들이 두 시간이나 걸렸다?

반군의 진격로 또한 통인동 출발에 대해 의심을 갖게 되는 요인이다. 이방원이 첫 번째 주요 공격목표로 삼은 곳은 송현, 지금의 수송동이다.

통인동에서 수송동으로 가려면 행렬이 경복궁 담장을 끼고 도는 형태가 된다. 사직터널을 해서 독립문으로 우회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라는 점을 노파심에서 부연한다.

또한 인적도 드문 저녁에 말 타고 칼 들고 수상한 사람 30명이 왕궁대로를 행진하는 것은 “우리 지금 반란하러 가요”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행진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 네이버 지도를 통해 본 통인동 세종대왕 탄신지와 송현 사이의 최단거리. 경복궁 담장을 끼고 도는 형태가 된다. 지도 아래 종로구청이 정도전의 본가 위치다. /사진=네이버지도.

 

만필자는 이날 오후 편집 일을 마치고 오후 5시 직전에 경복궁에 입장했다. 이 계절에는 이보다 더 늦게 되면 입장불가다. 6시 조금 전 경복궁을 퇴장할 때부터 다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극심한 운동부족의 결과다. 그래도 어릴 때 동네 구경을 하면서 세종대왕 탄신지 표지석에 도달했다.

해가 저무는 왕자의 집에서 용사들은 비장한 심정으로 저녁밥을 먹고 에너지원을 최대 비축했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면서 근처에서 막국수 한 그릇을 먹었다. (물론, 무사들이 막국수 먹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아무리 다리가 아파도 이경(밤 9시)전에는 수송동에 도착해야 된다.

통인동을 7시32분에 출발했다. 도당과 삼군부가 있었을 종합청사 앞으로 해서 광화문, 동십자각을 지났다. 옛날과 달리 많은 신호등을 기다려야 했고 눈길을 끄는 찹살떡이 있어 하나 사먹느라 잠시 지체했다.

이렇게 해서 수송동의 예전 한국일보 건물에 도착해보니 7시49분이었다. 군것질도 하면서 온 길이 기록보다 1시간 11분이나 일찍 도착한 것이다.

과연 거병 출발지가 통인동이 맞는지 다시 한 번 의구심을 갖게 된다. 그러나 당시의 사대문 안이라면 그 어디에서 출발해도 이보다 크게 더 걸리지는 않는다. 사대문 밖에서의 출발은 가능성이 전혀 없다. 열리지도 않을 성문이고, 또 그게 열렸다면 거사는 그냥 실패다. 성 밖 수천 수만의 정부군이 바로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통인동이 맞다는 전제에서 판단해 본다면, 이방원 일행은 송현골까지 상당히 은밀한 행진을 했던 것이다. 경복궁 담장이나 대로가 아니라 골목을 이용해 하나 둘씩, 삼삼오오로 이동했기 때문에 다리 아픈 만필자보다 시간이 훨씬 더 걸렸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경(밤 9시) 송현. 온 천하 권력의 중심추는 대궐도 아닌 이곳에 걸렸다.

궁궐 수비를 맡고 있는 도진무 박위는 송현골에서 화살이 난무하고 화광이 치솟는 것을 발견했다. 수하들에게 피리를 불고 경보를 울리게 했다. 도승지 이문화가 임금의 병으로 인해 거처를 옮기시는 건지를 불었다.

박위는 “봉화백(정도전)과 의성군(남은)의 모인 곳에 많은 군마가 포위하고 불을 지른 까닭으로 피리를 분 것뿐이다”라고 말했다.

이방원의 반군이 자신들의 군세를 드러낼 첫 번째 목표로 삼은 곳이 바로 정도전과 남은이 모여 있는 장소였다.

정도전 일파가 한 자리 모여 있다는 사실을 이방원도 알고 있었고 박위도 알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 정도로, 비밀리에 모인 것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모인 집은 남은의 첩이 사는 집이다. 이렇게 정권 핵심 인사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는 점은 이방원이 거사를 이 날로 잡은 이유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강한 적의 수뇌부가 일망타진하기 쉽도록 한 군데 모여 있었던 것이다. 이들이 이곳에 모인 것은 이날만은 아니다.
 

▲ 지금의 수송동인 송현은 경복궁 동십자각을 지나면서 시작된다. 대한항공이 문화단지를 조성하는 곳도 여기에 있다. 정도전과 남은, 세자의 장인 심효생 등이 무인정사 당일 이 곳에 모여있었다. /사진=초이스경제.

 

태종 때 편찬된 태조실록에서는 이방원 형제들을 해치기 위해 이 곳에 모였다는데, 이것은 왕자의 난에 명분을 주기 위한 주장이다.

이보다는 혹시라도 태조가 승하할 경우, 즉시 입궐해 빈틈없이 세자 방석의 승계를 확립하려는 목적이었을 것으로 본다.

정도전의 집은 송현골보다 200미터 정도 남쪽에 있는 종로구청이다. 지금 200미터는 차가 시동 걸자마자 갈 거리지만, 옛날 고관들 행차는 그렇지 못하다. 누군가 먼저 입궐해 고명대신을 사칭하고 대궐문을 걸어잠그면 대행대왕 생전 온갖 권세는 한낮 물거품이 된다.

태조가 승하하면 정도전 일파가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이 엄청 많아진다. 세자의 이복형들이 빈틈을 노리지 못하게 하는 한편, 이성계 생전 절대 할 수 없던 일, 이들을 죽여서 후환을 없애는 일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영안군 이하 정안군까지 4왕자 제거는 나중 일이요, 임금 승하시 즉시 행정권과 병권을 확보하는 것이 우선 목적이어서 좀 더 대궐에 가까운 곳에 함께 모여 있었던 것이다.

19명을 거느리고 반란에 나선 이방원은 송현에 모인 적들의 수뇌부만 제거하면 이 날의 거사는 9부 능선을 넘는 것이라 판단했다.

그의 이 판단은 정확한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집권한 경험으로 인해 태종 이방원은 정권 안보에 있어서 절대 빈틈을 보이지 않는 군주가 됐다.

정도전을 제거한 이방원은 드디어 안국동에서 군세를 크게 떨치고 거사를 일으켰음을 공개 선언했다.

다음 만필에서 계속 이어가기로 한다.

 

 

저작권자 © 초이스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