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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은 이방원에게 살려달라고 말했다
정도전은 이방원에게 살려달라고 말했다
  • 장경순 기자
  • 승인 2015.10.18 13: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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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정사의 재구성 -2] 정도전 없는 세상에서 드디어 거사 선포

<올해 10월7일은 음력으로 8월25일이다. 1398년 이날 밤, 정안군 이방원은 제1차 왕자의 난, 즉 무인정사를 일으켰다. 만필자는 이 날 617년전 이방원의 발길을 따라가 보았다. 그에 따라 재구성한 제1차 왕자의 난을 3회에 걸쳐 연재한다.>

 

[초이스경제 장경순의 만필세상] <2회>

저녁7시, 정안군 이방원의 일행이 사저를 출발할 때 날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이 때까지는 행군한다고 할 수도 없는 초라한 군세였다. 10여명의 지휘관이 고작 기병 10명, 보병 9명을 거느렸다. 여기에 장수들의 종자들과 노복 10여명이 가세했다.

은밀한 이동을 통해 이들은 송현골, 지금의 수송동으로 이동했다.


밤 9시: 최초의 공격 목표에 이르다

이경(二更. 밤 9시~밤 11시)이 되자 이숙번이 말을 달려 이방원에게 고했다.

“이것이 소동(小洞)이니 곧 남은 첩의 집입니다.”

여기가 바로 최초의 공격 목표였다. 이방원 일행이 이곳에 이르기 전까지 한양 시내는 폭풍 직전의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정도전이 남은, 심효생(세자 방석의 장인) 등 일당들과 며칠째 이곳에서 합숙한다는 사실을 이방원은 알고 있었다.

이날 거사의 성공은 정도전 제거에 절반 이상이 달려있다. 나머지 부분, 불리한 병력으로 관군을 제압하는 것과 세자 방석을 끌어내리는 것 또한 정도전이 사라지면 해결의 실마리가 열리는 일들이다.

바꿔 말하면, 이방원의 병사들이 아무리 일기당천으로 모든 관군을 격퇴한다고 해도 정도전이 살아남는다면 이날 거사는 완벽한 실패가 된다.

그래서 이방원은 이 곳 송현을 최초 공격지점으로 정한 것이다.

앞서 밝혔듯, 정도전이 측근들과 이 곳에 머문 이유는 태조 이성계의 승하에 대비한 것으로 보인다. 이 곳은 정도전의 집인 종로구청보다 더 궁에 가깝다. 임금 승하 소식을 접하는 즉시 입궐해 세자 방석의 정권 인수를 서두르려한 것이다.

▲ 수송동 갤러리고도 옆의 골목. 작고 막다른 이 골목 안에도 지체높은 기와집 대여섯채가 최근까지도 남아있었다. 현재는 지역 전체에 재개발이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진=초이스경제.

남은의 첩이 살던 집이 어디인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수송동은 예전 한국일보 본사(트윈트리타워)에서부터 안국동 사거리까지 일대를 말한다.

이 곳은 만필자에게 외갓집이 있던 곳으로 익숙하다. 최근까지도 이 곳에는 규모는 크지 않아도 매우 단정하면서 고급스러운 예전 기와집이 남아있었다.

수송동의 기와집은 어릴 적 우리 동네 효자동의 기와집과는 격이 달랐다. 대문을 열면 마당은 효자동 집들과 별 차이 없다. 고추를 말릴 만한 돗자리 두세 장 깔면 거의 꽉 찰 정도여서 드라마에 나오는 양반집 넓은 마당과는 모습이 다르다.

그러나 마루가 마당으로부터 네 벌은 쌓은 곳에 있어 첫 눈에 예사롭지 않은 느낌을 준다. 별채와 사랑방 사이는 후원으로 통하는 길이다.

한양은 그 시대에도 인구과밀지대다. 특히 수송동 안국동 일대는 경복궁 창덕궁 종묘의 직선 도로에 위치했다. 윤보선대통령 가옥과 같이 매우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넓은 마당까지 마련할 공간을 확보하기 어렵다. 당시 권력가의 한 사람인 남은의 첩이 살았다면 소문나게 웅장하지는 않으면서 고급스럽게 단장한 이런 집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시대가 흘러 집주인들은 많이 바뀌었어도 워낙 고풍스러운 집들이라 허물기는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최근까지도 골목안의 집들이 건재했지만 이번 취재에서 보니 지역 전체에 재개발이 진행되는 듯하다. 큰길 건너편은 진작부터 미국대사관 숙소로 이용돼 옛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고 이제 대한항공그룹이 재개발을 하고 있다.


성명 미상의 인물 소근, 그가 바로 정집사인가?

이날 이방원의 측근 인물로 소근(小斤)이란 이름이 여러번 등장한다. 앞서 입궐한 이방원을 불러내기 위해 정안군 부인 민씨(원경왕후)가 꾀병을 부릴 때도 소근이 심부름을 갔다.

이방원이 다시 입궐한 동안, 그가 타는 말에게 대궐 서쪽 행랑 뒤에서 풀을 먹인 것도 소근이다.

이방원 사저를 출발할 때, 종자들과 노복 10여명 가운데 소근만이 칼을 들었고 나머지는 몽둥이를 가졌다고 하니 무예를 갖춘 인물로 보인다.

▲ 1997년 KBS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태종 이방원에게 변치 않는 충성을 다한 정집사. 이방원 등극 후 내금위장의 벼슬도 지낸다. 가공인물이기는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소근'이라는 성명미상의 인물을 각색한 것으로 보인다. /사진=CNTV 화면캡쳐.

송현에 도착해서 소근은 남은의 집을 정찰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가 살펴보니 정도전 일파의 노복은 모두 잠들고 정도전 남은은 등불을 밝히고 웃으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안장을 갖춘 말 서너 필이 문 밖에 있었다.

소근은 이방원의 핵심 수행원으로 대내외 연락뿐만 아니라 제1차 왕자의 난과 같은 절체절명의 순간에 선봉의 역할도 맡은 인물로 보인다. 그럼에도 이름 석 자가 전하지 않는 이유는 잘 모르겠다. 공을 세웠어도 성을 하사받기 어려울 정도로 워낙 신분이 낮았기 때문인가 추측할 따름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 인물 말고도 기생의 이름 등 다른 시대 다른 인물을 지칭할 때도 소근이라 부르고 있다.

정종 실록에서는 기생 ‘소근효도(小斤孝道)’를 ‘작은 효도’라고 해석한다. 소근은 ‘작을 소(小)’의 뜻과 ‘근’의 음을 따서 실록의 사관들이 ‘작은’에 해당하는 한자어로 활용한 듯하다.

태종 이방원의 소근은 칼을 쓸 줄도 알고 전쟁에 첩보활동도 할 정도로 역사에 상당히 큰 자취를 남겼다. 1997년 드라마 ‘용의 눈물’에 등장하는 충신 정집사는 소근을 각색한 것으로 보인다. 드라마에서는 정씨라는 성도 있고 훗날 이방원 등극 후 내금위장이라는 벼슬로 여전히 태종을 경호하는 인물로 나온다.


이숙번, 격변의 신호탄을 쏘다

소근이 남은 첩의 집을 살펴보는데 난데없는 화살 세대가 날아와 기와에 떨어졌다. 집안사람들도 놀랐지만 소근도 놀랐다. 연유를 알고자 동구(洞口)로 달려 나온 소근에게 이숙번은 “내가 쏜 것이다”라며 다시 달려가 집을 포위하고 집 밖으로 나오는 자들을 처치하라고 명했다.

심효생, 이근, 장지화가 그 자리에서 살해됐다.

공격의 가장 핵심목표, 이날 거사 성공여부의 절반 이상이 달린 정도전은 이 1차의 공격에서는 빠져나갔다. 담을 넘었는지 문밖의 살기등등한 반군들을 피해 이웃집으로 숨어들어갔던 것이다.

그러나 정도전에게 끝내 위기탈출의 행운은 찾아오지 않았다.

피신한 집의 주인인 민부가 바로 이방원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배가 불룩한 사람이 내 집에 들어왔습니다.”

이 한마디만으로도 충분한 정도전의 인상착의였던 모양이다. 이번에도 소근이 다른 세 명과 함께 이방원의 정도전 체포 명령을 받았다. 정도전이 숨어있는 침실 밖에서 소근이 크게 꾸짖자 정도전은 작은 칼을 쥔 채로 나왔다.

6년 전, 이방원이 정몽주를 죽이던 일을 정도전이 다시 들고 나왔다. 고려를 지키려는 정몽주가 이성계 측근들을 죽이려던 상황에서 이방원이 역습해 정몽주를 살해하고 정도전을 위기에서 구한 일이다.

“예전에 공(公)이 이미 나를 살렸으니 지금도 또한 살려 주소서.”

이방원의 반응은 차가웠다. “네가 조선의 봉화백(奉化伯)이 되었는데도 도리어 부족(不足)하게 여기느냐? 어떻게 악한 짓을 한 것이 이 지경에 이를 수 있느냐?” 그리고는 수하에게 정도전을 참하게 했다.


정도전이 목숨을 빌었다고 해서 그게 구차한 행동인가

▲ 삼봉 정도전 표준영정.

드라마 등에서는 정도전이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빨리 나를 죽여라”고 재촉하는 각색이 자주 이뤄진다. 드라마니까 할 수 있는 묘사다.

일부에서는 삼봉집에 실린 시를 이날 정도전이 지은 것이라 간주해서 그가 ‘의연하게’ 죽음을 맞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전형적인 ‘문인기질’에서 나온 것으로 판단한다. 문인들은 사실 관계의 재구성보다는 서사시적 감상에 끌리는 법이다. 이런 기질 때문에 문인들과는 다급한 정사를 논의하면 안 되는 것이다.

다음 만필에서도 논의하겠지만, 이날 밤 반군 지휘부가 있는 막사는 절대 시 한 수가 오고갈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환영 받으며 입장한 사람이 말 한마디로 인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는 일도 벌어졌다.

무인정사의 그날 밤, 느닷없이 정도전의 눈앞에 이방원이 나타났다.

아버지 이성계로부터 어느 정도 신뢰를 받고 있는지는 이들 부자보다 정도전이 훨씬 더 잘 안다. 남은의 아지트에서 한담을 나누는 동안, 대궐로 자기 아버지를 찾아가 교묘한 말로 임금의 생각을 싹 바꿨을 리는 절대 없다. 당장 정도전 눈앞에 내놓을 왕의 교지 한 장 들고 온 것도 없다.

이 밤에 갑자기 찾아와 행패를 부리지만 내일 날이 밝으면 너는 너희 아버지 손에 죽은 목숨이다.

수양제 같은 인간은 권력욕으로 자기 아버지를 시해했지만, 지금 송현에 끌고 온 군세를 보아하니 이방원이 부왕을 범했을 리는 만무하다.

대충 눈짐작으로 100명도 안돼 보이지만 밖에 누가 더 있다한들 200이 안될 것이다. 그에 반해 지금 조선 땅에는 정도전의 명을 따르는 30만 병력이 잠을 자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도전이 “그래. 내가 졌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애초부터 정치할 천성이 전혀 못되는 무책임하고 나약한 인물인 것이다. 개국 뿐만 아니라 이후 6년의 정치를 책임질 정도 인물이라면 최후의 순간까지 자신의 뜻을 이어가도록 노력을 해야 그 위치에 걸맞는 것이다.

난리의 현장만 일단 벗어났다면 정도전에게 많은 승산이 주어졌겠지만 그러한 행운은 찾아오지 않았다. 붙잡혔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이방원의 날카로운 살기부터 피하고 다음 순간을 모색해야 한다. 아침 해가 밝을 때까지 그가 살아만 있다면 세상은 다시 정도전 세상이다.

그러나 이런 판단은 정도전만 한 것이 아니다. 이방원 또한 한 치 오차 없는 사세 판단을 하고 있었다. 촌각을 다퉈서 그를 죽여야 물리적으로 불리한 열세를 만회하는 것이다. 정도전에 대한 처형은 그 자리에서 이뤄졌다.

그의 후학들이 삼봉집을 편집하면서 정도전에 대한 추모하는 시를 수록했을 수는 있지만 죽음을 맞이한 그가 시를 한 수 읊었다는 것은 거의 현실 불가능한 얘기다. 피와 살이 튀는 전쟁터를 두고 흔히 문인들이 할 수 있는 서사시적 표현이다.

오페라에서 격전 끝에 처참하게 죽는 장수 또한 선율이 아름다운 아리아를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조선 개국 후 6년이 된 1398년 8월 25일 밤, 이방원은 드디어 정도전을 죽였다. 지난 6년 동안 갈수록 이방원 형제들의 사지를 묶고 숨도 못 쉬게 조여오던 인물이다.
 

▲ 정도전을 제거한 이방원은 안국동과 가회방으로 길이 나뉘는 곳에서 드디어 거사를 선포했다. 지금의 안국동 사거리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도로 한복판 민영환 동상을 두고 차들이 우회하면서 통행해 한동안 안국동 로터리로 불렸다.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 직선도로로 진작부터 형성된 큰 길이다. 10월7일 밤 9시 무렵 안국동사거리 모습. /사진=초이스경제.

승기를 잡았다고 판단되면 거침없이 기세를 몰아치는 이방원이다.

정도전 없는 세상을 만들어낸 그는 마침내 안국동에서 군세를 크게 떨치고 결진(結陣)했다. 이 곳까지 숨소리조차 죽여 가며 접근했지만 이제부터 그의 군사들은 천지를 뒤흔들며 경복궁을 향해 진군했다.

하지만 숫적으로 절대불리한 현실은 아직 크게 바뀐 것이 없다. 궁성을 지키는 병력만 해도 반군을 크게 압도한다. 이방원에게 ‘용비어천가 98장’의 기적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다음 만필에서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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