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정사의 재구성 3] 불과 50명의 반군에 수백명 왕궁 수비대가 무너지다

[초이스경제 장경순의 만필세상] <올해 10월7일은 음력으로 8월25일이다. 1398년 이날 밤, 정안군 이방원은 제1차 왕자의 난, 즉 무인정사를 일으켰다. 만필자는 이 날 617년전 이방원의 발길을 따라가 보았다. 그에 따라 재구성한 제1차 왕자의 난 현장 재구성을 3회에 걸쳐 연재한다. 현장 취재 3회 후에도, 무인정사를 전후한 만필을 계속 이어간다.>


<무인정사의 재구성 3회>
 

▲ 10월7일 밤 9시35분 광화문의 모습. 617년전 이날, 정안군 이방원의 반군은 앞서 송현에서 정도전을 살해하고 군세를 펼친 후 이 곳으로 진군해 왔다. /사진=초이스경제.

 

이방원의 급습을 받은 정도전의 머릿속에는 “큰 일 났다”는 위기의식의 한 구석에 “오히려 기회”라는 판단도 들어섰을 법하다. 야심 많은 왕자들이 죽어야 훗날의 근심을 없애는데, 이성계 살아있는 동안엔 꿈도 못 꿀 일이다. 정도전에 대한 왕의 신뢰가 깊다고는 하지만, 왕의 자식을 죽여도 될 정도는 절대 아니었다.

그러나 마침내 방원이 이렇게 무모한 거사를 일으켰으니, 이젠 아버지 왕도 더는 용납할 수 없는 지경이 됐다. 정도전은 내일 아침이 밝을 때까지만 견디면 오히려 오래 묵은 숙제를 해치울 수 있을 것이다.

그 무렵, 정도전은 왕에게 영안군(정종), 정안군(이방원) 등 왕자들을 제후처럼 지방으로 흩어져 떠나게 할 것을 제안하고 있었다. 이성계는 요동정벌과 마찬가지로 정도전의 제안을 거부하면서 오히려 방원을 불러 “외간(外間)의 의논을 너희들이 알지 않아서는 안 되니, 마땅히 여러 형들에게 타일러 이를 경계하고 조심해야 될 것이다”라고 알려줬다.

그런데 이런 난리가 벌어진 마당이니, 제후커녕 약사발을 청해도 부족할 일이다. 그래도 부자의 정이 앞선다하면, 귀양을 보내면 된다. 어찌됐든 이제 세자 방석의 최대 위협 이방원 없는 조정이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정도전이 이날 밤을 살아남은 후의 얘기다.

반군의 지도자 이방원은 ‘정도전 없는 세상’을 결사적으로 바라면서 이곳 송현까지 은밀히 밀어닥쳤다. 드디어 정도전을 붙잡아 눈앞으로 끌고 왔다.

그동안 이 자한테 쌓인 감정을 통쾌하게 갚아 줄 생각할 때가 아니다. 어디서 관군들이 나타날지 불안하기 이를 데 없는 순간의 연속이다. 정도전의 처형은 즉각 이뤄졌다. 거사의 최대 목표였던 만큼 이방원이 지켜봤을 것이다.

반군들은 정도전을 죽인 후 안국동과 가회동 동구에서 드디어 군세를 크게 떨치고 거사를 선언했다. 더 이상 은밀한 군사작전도 불가능했다. 경복궁의 수비장수 박위가 송현 일대에서 난리가 난 것을 보고 피리를 불며 시내 장병들을 호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위 또한 저 곳이 정도전, 남은이 모여 있는 곳을 알고 있었다.

이방원은 조준 김사형 등 재상들과 조정 주요 관리들을 호출하고 진영을 경복궁 앞으로 옮겨갔다.


용비어천가 98장의 미스테리


임금 말 아니 듣고

적자에게 무례할 새

서울 빈 길에 군마 뵈니이다

- 용비어천가 제98장의 후반부 -


용비어천가는 세종이 한글을 완성한 후 활용 예를 겸해서 세종의 직계조상 여섯 분의 일대기를 중국 제왕의 고사와 비교하면서 지은 것이다.

98장의 앞부분은 중국의 5호16국 시대 전진의 부견이 보병 60만, 기병 27만을 거느리고 양자강 이남의 중화왕조 동진을 침략했다가 격퇴된 일을 노래한다. 부견의 ‘오랑캐’ 군대가 감히 정통왕조를 넘보다가 산의 나무와 풀마저 군사로 착각하고 대패했다는 내용이다.

위에 소개한 98장의 뒷부분은 제1차 왕자의 난, 무인정사 당일 태종의 무용담이다.

정도전 일파가 임금(태조 이성계)의 말을 안 듣고 이방원 등 왕의 적자들에게 무례하게 굴더니 서울 텅 비어있는 길에 반란군이 가득한 것으로 착각했다는 것이다. 부견이나 정도전이나 정통성 없는 자들이 패한 것이라는 노래다.
 

▲ 만필자는 뉴시스에게 큰 도움을 받았다. 마침 뉴시스에서 용비어천가 제98장 만필자가 소개하는 페이지 사진을 찾을 수 있었다. 용비어천가는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후 직계 조상 여섯분, 목조 이안사, 익조 이행리, 도조 이춘, 환조 이자춘, 태조 이단(이성계의 즉위 후 이름), 태종 이방원의 일대기를 중국 제왕들과 비교하며 칭송한 것이다. /사진=뉴시스.

 

1398년 음력 8월25일 밤, 제1차 왕자의 난에서 전투는 오로지 정도전이 머물던 남은의 첩 동네에서만 벌어졌다. 기세가 오른 반군이 광화문 앞으로 진출해 진을 쳤지만, 사태는 더 이상의 전투 없이 마무리된다.

그렇다면 성문 밖 무수한 관군은 둘째 치고 최소 수 백에 달하는 궁 안의 수비 병력은 무얼 했다는 얘기인가.

용비어천가 98장이 노래한 내용에 대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다.
 

“방석 등이 변고가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거느리고 나와서 싸우고자 하여, 군사 예빈 소경(禮賓少卿) 봉원량(奉元良)을 시켜 궁의 남문에 올라가서 군사의 많고 적은 것을 엿보게 했는데, 광화문(光化門)으로부터 남산(南山)에 이르기까지 정예(精銳)한 기병(騎兵)이 꽉 찼으므로 방석 등이 두려워서 감히 나오지 못하였으니, 그때 사람들이 신(神)의 도움이라고 하였다.”


정안군 이방원이 이날 밤, 사저를 출발할 때 10여명의 장수가 기병 10명, 보졸 9명과 노복 10여명을 이끌었다. 군마가 장병을 다 합쳐 50명이 안 된다.

정도전을 불시에 기습할 병력은 되지만 광화문 앞거리를 다 채우기는 턱없이 부족하다.

이방원이 광화문 안에 대고 “내가 지금 정도전을 죽였으니 모두 귀순하라”고 외친들, 단순 충직한 수비 장수들이 “정도전은 정도전이요, 반군은 반군이니 일단 맛 좀 보시오”라고 우루루 몰려나온다면, 정안군 이방원은 훗날 태종 대왕은커녕 이날 밤 불귀의 객이 되는 것이다. 이방원의 아들 세종대왕도 왕이 못 됐을 것이니 한글 창제가 못해도 100년은 늦어지게 된다.

그렇다면 예전 30만 인파의 촛불시위 때처럼 광화문부터 남산까지 군마가 가득 찬 건 어떻게 된 연유인가.


하륜의 충청도 관병

무인정사를 다룬 드라마에서는 하륜이 이마에 ‘이방원 참모’라고 써 붙이고 다니는 사람처럼 묘사한다. 마침 거사 직전 하륜이 외직인 충청관찰사로 떠난 것을 이방원 견제로 해석한다.

하지만, 당시 실제로는 하륜이 이방원의 핵심참모라는 사실이 그다지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거사가 진행되는 동안 지휘막사의 이방원 옆자리가 내내 비워있어 사람들이 궁금해 했다는 것이다. 날이 밝아서야 하륜이 입성해 이 자리를 차지하자 사람들이 놀랐다고 한다.

이날 하륜의 행동은 무인정사가 당일 급조된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그가 시간 맞춰 서울에 나타난 것은 이방원과 며칠 전에 이미 약속이 이뤄진 것임을 뜻한다.

더구나 하륜은 혼자 나타난 것도 아니다. 성안에 들어오지는 못했어도 남산에 가득한 군세를 펼쳐 경복궁 수비군의 심리를 뒤흔든 것이 하륜의 충청관병들일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성 밖이라도 군대 이동이 자유로울 수는 없다. 시간을 맞추고 은밀한 작전을 통해 이날 밤까지 남산에 포진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륜의 충청 병력은 역할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우선, 성문에 들어올 수도 없다.

성문에 들어온다 한들, 부임한지 얼마 안 된 관찰사를 믿고 죽을 각오로 반란에 나설 장병은 거의 없다. 하륜의 병사들에게 전투력은 기대할 수도 없다. 아마 하륜은 반란이 아닌 엉뚱한 이유를 들며 이들을 몰고 왔을 것이다.

그래서 하륜의 휘하 병력이 맡은 것은 오로지 허장성세였던 것이다. 남산에서 이 군대는 무기가 아니라 등불을 더 많이 들어 밤 시간을 이용한 군세 과장에 더 주력했다. 용비어천가는 이 작전이 적중했음을 시사한다.

드라마에서처럼 하륜의 군대가 교전에 참가하는 건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만약 충청관병이 한양 시내에 들어올 수 있었다면 그보다 몇 배나 더 많은 진압군도 들어왔을 것이니 이 역시 한글창제가 수 백 년 늦춰지는 결과가 된다.

이번 취재에서 경복궁 안에서 남산이 어떻게 보이는가 알아보려고 했다. 하지만 이제는 건물에 완전히 가려 근정전 난각에서는 남산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다.

혹시 광화문 문루에 올라가면 보일지 모르겠지만, 고궁을 경비하는 분들이 광화문에 올라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수수께끼의 군대 정릉이안군

이 무렵, 실록이나 여러 전하는 얘기에는 정릉수호군 또는 정릉이안군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정릉은 이성계의 계비이자 세자 방석의 생모 신덕왕후 강씨의 능이다. 이성계가 왕후를 잃은 슬픔이 지나쳐 능역을 도성 안에 조성한 곳이 지금의 광화문 근처 정동이다.

함흥에 고생만 하다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신의왕후 한씨)가 있는 이성계의 이런 행동 또한 이방원의 동복형제들에게 좋게 보이기는 어렵다. 이들의 생모 한씨가 신의왕후로 추존된 것 또한 왕자의 난이 성공한 후다. 이성계 행동 곳곳에 함흥 본처 소생들의 한이 서릴 만한 것이 가득하다.

정릉수호군은 능역의 마무리 공사나 경비를 위한 목적으로 추측된다. 경기 일원의 관병들이 순번으로 동원된 듯도 하다. 정종 즉위후인 1398년 12월 정릉수호군 100명을 줄였다고 하니 태조 때 원래 규모는 수 백 명에 이르렀다.

공교롭게도 무인정사 당시 정릉이안군으로 안산의 병력이 동원돼 이숙번이 지휘하고 있었다는 얘기가 전한다. 이숙번이 정안군의 심복이었음을 정도전 측에서 몰랐던 것으로 추측된다.

인정에 비춰 이것은 사실이 아니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너무나 가슴 아픈 비극이다. 왕의 죽은 아내 사랑이 지나친 탓에 동원된 군대가 있는데 그 군대가 이 여인이 낳은 아들을 죽이는데 동원됐다는 얘기가 된다.

이 군대를 이숙번이 지휘했다면, 합법적으로 도성 안에 주둔할 수 있는 무장 병력을 이방원이 확보하게 된다. 이들은 송현에서 정도전을 기습할 때 합류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되면, 이방원은 광화문 앞에서 최소 50~100명 정도가 늘어난 병력을 거느리게 된다. 그래도 여전히 숫자는 많지 않지만 남산에서 하륜이 펼친 허장성세와 함께 착시현상을 유발했을 가능성은 높다.


경복궁 수비장수 조온과 박위의 엇갈린 운명

이방원이 이숙번에게 얘기한 이날의 작전 계획은 이렇다.

“세력으로는 대적할 수 없으니, 정도전과 남은 등을 목 벤 후에 우리 형제 4, 5인이 삼군부(三軍府)의 문 앞에 말을 멈추고 나라 사람의 마음을 살펴보아서 인심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만이겠지만, 한 결 같이 쭉 따른다면 우리들은 살게 될 것이다.”

정도전을 죽이고, 장성한 왕자들의 카리스마를 앞세워 진압군을 스스로 물러나게 한다는 것이다. 반란 참 쉽게 벌였다 생각되는 발상이다. 그런데 상황이 실제로 이렇게 됐다.

작전 계획은 쉽게 짰지만 불안감을 지을 수는 없었다. 이 때 조준과 김사형 등 재상들이 지금의 정부청사 자리 도당에 들어가 후속 대책을 의논하고 있었다. 이들이 해야 할 일은 세자를 갈아치도록 임금의 윤허를 받아내는 것이다.

이방원은 정도전을 죽였고 재상들을 진영에 불러들이는 데는 성공했다. 그런데 만약 경복궁 병력이 반격을 시작하면, 병력이 부족하니 후퇴가 불가피하다. 그렇다면 지금 재상들이 들어가 있는 도평의사사가 바로 관군 손에 넘어가고 재상들을 잃게 된다.

사람을 시켜 조준 등을 후방으로 옮기는데, 솔직한 이유는 말하지 않고 큰 소리를 쳤다.

“우리 형제가 노상(路上)에 있는데, 여러 정승들이 도당(都堂)에 들어가 앉았는 것은 옳지 못하니 마땅히 즉시 운종가(雲從街) 위에 옮겨야 될 것이다.”
 

▲ 광화문(오른쪽)과 정부종합청사(왼쪽). 도평의사사가 정부종합청사 자리에 있었다. 광화문의 관군이 숫적 우세로 공격해온다면 도평의사사를 바로 탈환하게 된다. 정안군 이방원은 이 점을 우려해 도평의사사에서 회의중이던 조준 김사형 등 재상들을 급히 운종가(종로)로 옮겨가게 했다. /사진=초이스경제.

 

왕자들이 길밖에 있는데 신하가 어찌 감히 실내에 있냐는 이런 호통에 조준 일행도 회의 장소를 종로 길바닥으로 옮겨갔다. 이 왕자들이 오늘 저녁 피를 보고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 같으니 늙은 재상들이 서슬에 맞설 생각을 말아야 할 것이다.

경복궁 수비군은 도진무 박위와 조온이 지휘하고 있었다. 박위는 송현에서 접전이 벌어진 것을 보고 바로 경보를 발동했다.

이방원이 이들에게 사람을 보냈다. 동참을 권유한 것이다.

조온은 명령을 듣고 즉시 휘하 갑사(甲士)·패두(牌頭) 등을 거느리고 나와서 말 앞에서 이방원을 배알했는데 박위는 한참 동안 응하지 않다가 마지못해 칼을 차고 나왔다고 한다.

박위는 경보를 울림으로써 처음으로 이방원에 맞서는 행동을 했는데 결정적인 처신을 하는 데서도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아마 그는 진압의 뜻을 갖고 있었는데 조온의 투항하는 모습에 용기가 크게 저하됐던 모양이다.

기록을 찾아보기 힘들지만, 이방원이 사전에 조온의 협력을 약속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

훗날 세종이 태종 이방원의 측근 전흥에게 들은 바로는 조온이 이방원에 가담한 후 즉시 패두들을 시켜서 도로 궁궐에 들어가서 갑사를 다 데리고 나왔으며, 얼마 아니 되어서 바로 근정전 이남 갑사들이 모두 뛰어나와서 가담해 드디어 군세가 성세를 이뤘다고 한다.

이날 승부의 끝내기를 조온이 마련한 것이다.
 

▲ 1997년 KBS 드라마 '용의 눈물'에 등장한 조온의 모습. 극중 비중은 높지 않았지만 제1차 왕자의 난에서 이방원이 승리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당시 조온은 경복궁을 수비하는 장수였다. /사진=CNTV 유투브 화면캡쳐.

 

조온은 이렇게 결정적 공로를 세운 바람에 태조 이성계로부터 미운 털이 박히게 된다.

정종 2년, 이성계를 상왕에서 태상왕으로 높이는 예를 바칠 때 이성계는 느닷없이 조온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냈다.

마침 예를 바치러 온 사람이 세자여서 그 날의 무참함이 새삼스러웠던 모양이다. 이 때 세자가 이방원이다.

이성계는 “너희들이 나를 아비라고 하여 존호를 가(加)하고자 하니 참으로 가상하다”라면서 “그러나, 내가 할 말이 있으니, 너희는 들어라!”고 일갈했다.

“조온은 본래 내 휘하 사람으로 내가 일찍이 발탁하여 지위가 재보(宰輔)에 이르렀는데, 내가 손위(遜位)한 이래로 한번도 와서 보지 않으니, 사람이 은혜를 배반하는 것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있겠는가”라고 호통쳤다.

그러나 진짜 심정은 그 다음에 드러냈다.

“무인년 가을에 갑사를 거느리고 안에서 숙위(宿衛)하다가 밖에 변이 있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응하였으니, 반복하고 충성치 못함이 비길 데 없다. 너희들은 다만 너희를 따르고 아첨하는 것만 덕스럽게 여기고, 대의는 생각하지 않느냐? 신하로서 두 마음이 있는 자는 예전부터 죄가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방원에게 못 박았다.

조온은 이 길로 완산부로 귀양을 떠났다. 제1차 왕자의 난 때 공신들은 이성계 살아있는 동안 귀양과 복권을 반복해야 했다.

조온의 어머니는 환조 이자춘(이성계의 아버지)의 딸이니 조선 왕실이 그의 외가가 된다.


말 한마디가 초래한 박위의 죽음

박위는 조온과 달리 거듭 저항의 속내를 드러냈음에도 반군 진영으로 합류한 그를 이방원은 일단 따뜻한 말로 맞이했다고 한다.

박위는 이방원에게 “모든 처분은 날이 밝기를 기다리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수비군을 해산하더라도 날이 밝기를 기다리겠다는 얘기다.

이것은 반군의 형세가 약한 사실이 아침에 드러나면 곧 반격을 할 것이란 의도로 풀이됐다. 이방원 동복 형제의 넷째 회안군 방간이 방원에게 청해 곧 바로 박위를 죽였다.

박위를 죽인 일은 반군 진영의 공기를 급냉시켰다. 앞서 화살을 맞아 도당에 들어 휴식하고 있던 이무가 이 소식을 듣고 다시 나와 확실하게 반군 진영에 가담했다.

이날 밤, 확실하게 충성심을 보이지 않는 자는 언제든 왕자들의 칼에 목숨을 잃었다. 앞서 소환을 받고 도착했던 유만수도 처음에는 이방원이 갑옷도 내주며 맞아들였다.

그러나 유만수 또한 방간과 완산군 이천우 등이 “정도전 편이다”라고 주장해 죽임을 당했다.

이날 여러 사람의 최후에 회안군 이방간이 결부된다. 마치 악역을 자처하는 듯한 모습이지만 그는 평소 아버지 이성계로부터 “소같은 인간”으로 여겨지던 인물이다. 태종 때 사관들이 악역을 이방간에게 전가하는 측면도 있지만, 역사의 복선을 던지는 면도 있다.

마치 이방원이 정몽주를 죽임으로써 이성계의 아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이 됐듯, 이방간 또한 이날 많은 일에 나섬으로써 훗날의 야심을 예고했는지도 모른다. 2년 후 방간은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지만 실패하게 된다.

경복궁 수비군이 투항해 오자, 정안군은 무기고를 열어 반군 100명에게 갑옷과 창을 내줬다. 그제서야 조금 군대 비슷해졌다고 하니 참으로 빈약하게 거병한 반군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더 이상 싸울 일이 전혀 없는 상태였다.

남은 것은 대전인 강녕전 일대 뿐이다. 이 곳에 늙은 아버지 임금 이성계가 중병을 앓고 있고 세자 방석과 그의 동복형 방번, 그리고 부마 이제가 몇몇 종친과 함께 병든 왕을 모시고 있을 뿐이다.

상황은 이제 경복궁 안으로 옮겨간다. 만필자의 현장 취재는 여기까지다. 지금은 방문객이 경복궁 안에 들어갈 수 없는 시간이다.

거사의 가장 비극적인 부분이 남아있다. 늙은 아버지가 눈 앞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잃게 되는 처참한 장면이다.

현장취재는 3회로 마치지만, 무인정사의 후속 상황과 역사적 전후 관계는 4회, 5회 등으로 계속 이어간다.
 

▲ 세종대왕 탄생지인 준수방(통인동)을 정안군 이방원 사저로 전제한 제1차 왕자의 난 반군 이동 경로.1. 밤 9시 송현 남은의 첩 집 공격 정도전 살해.2. 안국동 가회동 동구에서 결진. 진군 시작.3. 광화문 앞 포진.초록색 선은 조준 김사형 등 재상들의 회의장소 이동 경로. /네이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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