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단 한번 패배로 너무나 큰 상처 안긴 당사자는 바로 다섯째 아들 정안군

[초이스경제 장경순의 만필세상]
 

▲ 경복궁 근정전의 어탑과 어좌. 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은 거듭 정변을 주고받았다. 아들이 아비에 맞서기에 앞서, 아비가 석연찮은 이유로 어린 동생을 세자로 앉히면서 갈등이 시작됐다. /사진=초이스경제.

 

제1차 왕자의난, 무인정사의 재구성 <4회>

1398년 8월25일 밤, 정안군 이방원은 9시 무렵 송현 남은의 첩 집을 공격해 정도전을 살해했다. 근처 안국동과 가회동 갈림길에서 진을 펼치고 정승들을 호출했다.

광화문 앞으로 진군해 왔을 때는 자정을 전후한 시간이었을 것으로 대략 추측한다.

한동안 그의 지휘 막사는 극도의 아수라장이었다. 속속 도착한 고관대작들이 순간의 엇갈림으로 죽어나가고 살아남았다.

불려온 자들은 과연 초라한 군대가 거사를 성공시킬까 의구심을 품었다. 그렇다고 이미 죽은 정도전 편에 서기도 어려웠다. 흑백을 가리기 힘든 마당에 이방원 형제 왕자들은 갑자기 누군가 의심스러워지면 그 자리에서 그 자를 죽였다.

경복궁 관군과 반군의 대치는 관군 장수인 친군위 도진무 조온이 장수들을 이끌고 대거 반군에 가담하면서 승부가 났다.

자정을 넘긴 새벽부터 실질적인 이방원의 세상이 시작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단 하나 두려움이 남아있다. 어려서부터 가장 무서운 사람, 가장 든든했기 때문에 더욱 무서운 분. 아버지다.

거사 날을 이 날로 잡은 것은 부왕 이성계가 매우 위독해 소생할 가망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정도전 일파의 철저한 궁궐 통제로 인해 부왕이 이미 돌아가셨는지 모른다는 의심도 좀 있었을 것이다.

예전 정몽주를 죽이듯, 아무 때나 힘 센 사내를 보내 노상에서 정도전을 죽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건재한 세상에서는 크게 경을 칠 일이다. 최소 귀양에 상소가 빗발치면 죽은 목숨이다. 세자를 없앤다는 건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최근 정도전의 하는 일과 경복궁 주위를 살펴보니 부왕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건 분명해 보였다. 그래도 여전히 두려웠다.

경복궁 일대를 모두 손안에 넣은 이 깊은 밤에 냉큼 대전으로 달려갔다가, 대노한 아버지가 그 모습 그대로 백우전 화살을 자신에게 겨누는 일이 제일 무서운 것이다. 훗날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지기도 했다고 한다.


쓰러지는 황산전투의 영웅, 동북면의 호랑이 이성계

이번 얘기에서는 시점을 올해 예순 넷으로 생사의 갈림길에 누워있는 한 노인으로 옮겨가 보기로 한다.

조선의 태조 강헌대왕 이성계다. 임금이 된 후 이름을 이단으로 고쳤지만, 이성계라는 석자는 한민족에게 불패의 신화다. 스물두살 때 아버지 이자춘을 도와 고려의 쌍성총관부 탈환을 도울 때부터 이날까지 무수한 싸움에서 져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당대의 영웅도 인간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그는 이 가을 숨을 거두는 것처럼 보였다.
 

▲ 조선시대 왕이 머물던 전각은 강녕전이다. 강녕전은 좌우의 연생전, 연길당, 경성전, 응지당 등 전각들과 함께 임금의 거처인 대전(大典)을 구성한다. 왕자의 난 당시 이성계가 정확히 어떤 전각에서 와병 중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는 병이 위중해 다른 전각으로 옮기고자 했으나 이때까지 옮겨가지 못하고 있었다. /사진=초이스경제.

 

깊은 밤, 그의 침전에는 이복동생 의안공 이화, 아들 무안군 방번, 경순공주의 남편인 부마 이제, 그리고 세자 방석이 곁을 지키고 있다. 전날 모든 왕자들을 불러들일 때부터 들어와 있는 사람들이다. 방번 방석 경순공주는 모두 후처 신덕왕후 강씨 소생이다. 방원의 배다른 형제들이다. 함흥 본처 한씨 소생 아들들은 방원이 “의심스럽다”며 궁을 빠져나갈 때 따라나갔다.

부마 이제는 드라마 ‘정도전’에서 대사 속 인물로만 등장하면서 극의 흐름에 상당한 변화를 준 사람이다. 이성계 유동근이 이인임과 제휴를 하는 수단으로 사위로 맞이한 이인임의 친척 젊은이다. 이성계가 이인임의 환심을 사려고 제안한 정략결혼이다. 그것이 세월이 흘러 이제는 이날 이렇게 살벌한 현장에 남아있다.

이성계의 병세가 그토록 위중했지만 그는 전쟁터에서 단련된 사람이다. 이렇게 쉽게 병마에 굴복할 사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멀리 어디선가 시석(矢石)이 난무하고 창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는 듣도 했다. 그게 전쟁영웅 이성계의 저력을 다시 끌어올렸는지도 모른다. 이날 다시 일어난 이성계는 10년을 더 살아 400여년 후 후손인 영조에 이어 두 번째로 장수한 조선 임금이 된다.

마지막 한 마디를 위해 자손을 불러모았지만, 난리가 났다는 소식에 그가 아픈 몸을 일으켜 세워야 했다.

지금까지는 병석 주위의 저 어린 자식들이 자신을 간병하고 있었다. 지금은 아픈 늙은 임금이 이들을 지켜내야 하는 힘든 밤이 됐다.

드넓은 구중궁궐. 안타깝게도 그를 지켜주던 그 많은 장병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다. 한 가지 위안 아닌 위안이라면, 왕이 아직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일 것이다.


이인임 가문과 정략결혼으로 얻은 사위, 어전에서 칼을 빼들다

왕이 닭이 울 적에 임금이 좌부승지 노석주를 불러 대궐로 들어오게 하고, 이른 새벽에 또 우부승지 이문화를 불렀다.

이문화가 서량정에 와보니 세자와 방번, 이제, 이화, 이양우, 이종 등 종친과 궁궐 신하들이 이미 들어와 있었다. 서량정은 왕이 임종을 대비해 미리 거처를 옮겨간 곳이라고 한다. 옛날 왕실에는 왕이나 왕비가 승하할 때는 원래 전각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관행이 있었다.

그러나 이성계가 정말로 강녕전이 아닌 다른 전각으로 옮겨 갔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우선 경복궁 관계자들은 서량정이라는 전각은 없다고 한다.

또한 전날 밤, 이문화와 박위의 대화에서는 이성계가 전각을 옮기려다가 옮기지 못한 정황도 담겨있다. 송현에서 소요사태가 난 것을 보고 박위가 시내 장병들에게 피리로 경보를 울렸다. 이문화가 박위에게 “임금이 전각을 옮기는 것이오?”라고 묻자 박위는 “어찌 임금이 피하여 거처를 옮긴다고 하는가?”라고 반박했다.

서량정이란 서쪽의 전각을 뜻하는 말일 수도 있으며 강녕전이 여기에 포함되는지 아닌지는 현재로서 확실하지 않아 보인다. 원래 관행으로는 이성계가 거처를 옮기는 것이 마땅했지만 최소한 전날 밤 까지는 그러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박위의 얘기에서는 난리를 당해 임금이 거처를 옮기는 것은 피하는 것으로 보일 우려가 있었다.
 

▲ 강녕전의 내부 모습. 이것이 임금의 개인생활 공간이다. /사진=초이스경제.

노석주와 이문화가 서로 미루다가 “아무개 등이 반역을 꾀하다가 발각돼 아무개에 의해 처형됐지만 협박에 의해 가담한 자들의 죄는 묻지 않는다”는 내용의 교서 초안을 작성했다. 이성계가 이미 대략적인 판세를 파악한 후로 보인다.

왕의 측근인 승지들이 작성한 이 교서에서 이성계의 사태 수습 시도가 엿보인다. 거사를 인정해 주되 여파를 최소화하자는 것이다. 대궐 안에서 사태 파악이 안됐으니 아무개(某某)라는 단어가 동원됐다.

이성계는 “두 정승 들어오기를 기다려 의논해 반포하라”고 말했다.

조금 후, 종로 길바닥에서 노상 회의를 하던 조순 김사형 등 정승들이 드디어 결론을 임금에게 올렸다. 정도전 남은 심효생이 왕자들을 죽이려다가 이미 죽었다는 내용이다.

재상들의 보고서가 올라오자 어전에서는 임금의 사위 이제가 바로 발끈하며 일어섰다.

“여러 왕자들이 군사를 일으켜 함께 남은 등을 목 베었으니, 화(禍)가 장차 신에게 미칠 것입니다. 청하옵건대, 시위하는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서 공격하겠습니다.”

그는 마음속에 재상들만이라도 이방원 일파를 규탄할 것이라는 일말의 기대가 있었던 모양이다. 또한 지금 어명만 있다면 궁궐 병력으로 사태를 돌이킬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그는 전날 초저녁부터 대전에 들어와 있다. 수비 병력이 썰물처럼 무너진 것을 모르고 있다.

바깥일을 잘 모르기는 함께 대전에 들어온 왕의 이복동생 의안공 이화도 마찬가지다. 줄곧 이방원 편에 서게 되는 그는 충돌을 막기 위해 나섰다.

“내부에서 일어난 일이니 서로 싸울 필요가 없다.”

이제는 처가 어른인 이화에게 칼을 빼들고 노려보는 거친 행동을 보였다.


토하고 싶어도 토하지 못하는 늙은 왕의 두려움

이런 소동이 벌어지는 동안, 이방원은 난리를 피해 있던 둘째형 영안군 방과(정종)를 찾아냈다. 방과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두 너의 공로이니 내가 세자가 될 수 없다”고 사양했다.

그러나 방원이 “나라의 근본을 정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적장자(嫡長子)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자 방과는 “그렇다면 내가 마땅히 할 일이 있겠다”며 수락했다. 드라마에서 야심만만한 동생에게 이리저리 끌려 다녔다는 유약한 형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방원은 재상들을 동원해 두 형제의 결정을 부왕에게 올렸다. 거사를 벌인 이후 방원은 아직 아버지 앞에 나타나지 않고 있다.

영안군으로 세자를 바꾸라는 상소를 이문화가 읽자 이성계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모두 내 아들이니 어찌 옳지 않음이 있겠는가?”

7년 전, 굳이 가장 어린 아들로 세자를 삼던 날의 실수를 인정 안할 수 없는 순간이다.

그리고는 세자 방석에게 말했다.

“너에게는 편하게 되었다.”

노석주와 이문화가 앞서 작성했던 교서 초안의 ‘아무개’에 정도전 남은 등 이름을 넣어 완성해 올렸다.

왕은 시녀의 부축을 받아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워 서명을 마쳤다. 아직 세자의 신변이 거론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늙은 왕의 몸은 다가오는 두려움을 감추지 못한다. 서명을 마치고 그는 

“어떤 물건이 목구멍 사이에 있는 듯 하면서 내려가지 않는다”고 괴로워했다.

토하고 싶은데 토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천하를 호령하던 영웅이 이렇게 무너지고 있다.

곧 왕자 종친들은 모두 사저로 돌아가라는 방원의 호령이 대전 안으로 전해졌다. 그리고 재상들의 도당에서는 방석 또한 대전에서 내보낼 것을 청했다.

이성계 생애 단 한 번의 패배가 이제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불패의 영웅에게 패배를 안긴 당사자는 책이나 읽던 아들

왕은 말했다. “이미 청해 올린대로 허가했으니, 나가더라도 무엇이 해롭겠느냐?”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이지, 그는 본능적으로 참혹한 일을 감지하고 있었다.

방석이 울면서 늙은 아버지 임금에게 하직했다. 그의 부인 현빈 심씨가 남편의 옷자락을 당기면서 통곡했다. 지난 밤 그녀는 아버지 심효생을 잃었다. 지금 남편이 눈앞에서 떠나가고 있다. 그리고 두 달 전 출산한 아들도 곧 잃게 될 운명이다.
 

▲ 조선 태조대왕 어진.

제1차 왕자의 난, 즉 무인정사는 첫째, 정도전이 살아 있지 말아야 성공하는 정변이다. 둘째, 세자 방석이 물러나야 완성되는 것이다. 셋째, 이 세상 어디에선가 방석이 다시 권력을 노리지 못하게 단단히 못을 박아야 뒷걱정이 없어진다.

방석은 경복궁의 서문을 통해서 대궐을 벗어났다고 하니, 전날 방원이 두 번이나 드나들었던 영추문이다.

이거이, 이백경, 조박 등이 도당과 의논해 도중에서 방석을 죽였다고 하지만, 이 정변이 성공하려면 방석은 죽을 수밖에 없었다. 태종 조의 사관들은 그나마 임금의 형제 죽인 허물을 다른 공신들에게 전가하려 하고 있다.

방석의 동복형 방번 또한 이 날이 부왕에게 하직하는 날이 됐다.

이성계는 그에게 “세자는 끝났지마는 너는 먼 지방에 안치(安置)하는 데 불과할 뿐이다”라고 위로했다. 방석을 내보낼 때 비극을 이미 예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방번은 통진으로 귀양가기 위해 강을 건너려고 유숙하는 동안 살해당했다. 이들 형제의 죽음에 대해 방원은 이거이 이백경 부자가 독단으로 저지른 것이라며 상황이 불안정해 이런 독단을 모르는 척 할 수 밖에 없었다고 발뺌한다. 그러나 거병의 그 순간부터 방원은 이복형제 죽인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방번 방석의 매부로 어전에서 칼을 빼들었던 이제의 운명도 비슷했다. 부인 경순공주가 “어서 정안군의 집으로 가 있어야 화를 피할 수 있다”고 재촉했지만 듣지 않다가 저녁에 군사들이 들이닥쳐 죽음을 맞았다.

방원이 이제마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 급히 사람을 보내 경순공주의 집을 수호하게 했다.

이로부터 1년여가 지난 9월10일, 상왕이 돼 있는 이성계는 공주가 아닌 궁주로 격하된 그녀를 출가해 여승이 되게 했다. 고려말, 이성계가 이인임의 의심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성사시킨 딸과 이제의 결혼은 결말이 이렇게 됐다.

이방원이 송현을 공격했을 때, 이 집의 주인인 남은은 최운, 하경 등 두 명의 측근을 거느리고 용케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는 “정도전은 남에게 미움을 받아 참형당했지만, 나는 미워하는 사람이 없다”며 스스로 순군문으로 자수했다가 그 또한 참형당했다.

이방원은 등극 후 하경과 최운이 주인에게 충성을 다했다해서 발탁했다.

이성계는 1356년 쌍성총관부 탈환부터 나가는 싸움에서 져 본 적이 없었다.

생애 단 한번의 패배, 그것을 다른 사람도 아닌 내 자식에게 당했다. 그것도 형제 가운데 가장 칼과 담 쌓은 것으로 여겼던 다섯째 방원이다. 승부만 가렸다면 “네 이제 아비를 앞섰구나” 격려할 수도 있다. 하지만 녀석은 인생에서 가장 값진 것을 가져갔다.

진정 사랑했던 여인과 함께 얻은 두 아들 방번과 방석의 목숨이다. 방번과 방석의 소생인 손자들마저 잃었다. 이 날 이후, 이성계 인생의 남은 10년이 허탈과 분노, 그리고 복수심으로 지배됐다. 4년 후, 아버지가 아들에게 맞서 거병하는 파란이 1398년 음력 8월25일밤 상처 속에서 시작됐다.

하지만, 이성계의 분노는 어쩌면 애초에 자신의 잘못된 선택에서 비극이 시작됐을 수 있다는 죄책감에서 살아남는 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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