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왕자의 난, 무인정사의 재구성 5] 주요 장수들이 대거 이방원 편이 되게 하다

[초이스경제 장경순의 만필세상]

<5회>

정안군 이방원이 송현에서 정도전과 남은이 모인 집을 공격하자 대궐의 수비장수 도진무 박위는 피리를 불며 경보를 발동했다. 이 경보를 듣고 내갑사제조(內甲士提調) 이천우가 측근 두 명과 함께 대궐로 달려갔다. 관직명에서 그는 대궐의 정예무사들 지휘관으로 보인다.

이천우는 이성계의 이복동생인 이원계의 아들로, 이방원과 세자 방석에게는 사촌 형이 된다.

▲ 완산부원군 이천우. 태종 이방원의 사촌형인 그는 제1차 왕자의 난이 벌어진 밤, 비상 소집령을 보고 대궐로 달려가는 길에 이방원의 거사 소식을 듣고 그에게 가담했다. /사진=위키백과.

반군이 안국동과 가회방에 진을 형성하고 있을 때, 이방원 휘하 장수 마천목이 대궐로 향하는 이천우를 발견했다. 마천목은 안국동 동구까지 이천우를 따라가며 불러 세웠다.

“천우영공이 아니십니까”라고 했지만 대답이 없었다.

마천목은 “영공께서 대답하지 않고 가시면 화살이 두렵습니다”라고 알려줬다. 이천우가 “마 사직이 아닌가? 무슨 일로 나를 부르는가”라고 영문을 물었다.

마천목이 “정안군이 여러 왕자들과 함께 이 곳에 모여 있습니다”라고 말하자 이천우는 말머리를 돌려 이방원에게 달려왔다.

방원을 본 이천우는 “이런 일을 일으키면서 어찌 나에게 알리지 않았는가”라고 질책을 겸하면서 방원에 가담했다.

이천우와 조온 등 대궐을 지키는 장수들이 거사 소식을 접하자마자 주저 없이 이방원에게 가담했다. 이것이 바로 50명도 안되는 병력을 이끌고 거사에 나선 이방원의 믿는 구석이었다.

무인정사가 벌어진 당시, 최소한 조정의 여론은 정도전을 떠났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에게 정도전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만 확인시켜 준다면 모두 내게 귀순할 것이라는 예측이 적중했다.

이천우의 사례는 조금 과장해 말하자면, 대다수 장수들이 툭 건드리기만하면 바로 이방원 측으로 넘어오게 되는 당시 정황을 보여준다.


정도전, 거듭 되는 무리수에 거대한 반대세력 집결

1398년 들자마자 이성계가 자주 앓기 시작하더니 여름이 돼서는 병세가 매우 위중해졌다. 앞으로 10년을 더 살아 조선 임금 중 두 번째로 장수할 이성계지만 이 여름 매우 심하게 앓았다.

이것이 그해 엄청난 정변을 일으킨 한 원인이다. 권력을 노리는 이방원이나 지키려는 정도전 모두 왕이 이제 곧 죽는구나 여기게 됐다. 양쪽 모두 다급해져 저마다 행동을 앞당겨야 했다.

정도전은 칼자루를 쥐고 있으면서도 조급증을 보인 나머지 무리한 패착을 연발하게 된다. 이 무렵 그는 하나의 실수로 인해 벌어진 손해를 만회하려고 더 큰 실수를 거듭하고 있다.

진도(陣圖) 강습에 태만한 왕족, 장수들에게 무리한 처벌을 강행해 민심을 크게 잃고 말았다. 진도 강습은 요동 정벌을 명분으로 했지만 실제로는 왕자들의 사병을 없애려는 의도를 담고 있는 것으로 모두들 여겼다. 또한 명나라 황제가 정도전 입조를 요구한데 맞서기 위해, 무고한 다른 사람들을 전쟁판으로 몰아넣는다는 불만도 쏟아졌다.

요동 정벌 강행은 조정의 영수이자 혁명동지인 조준과도 갈등을 빚었다. 이것은 조준이 관성적으로 이방원에게 협력하는 토대가 됐다.

요동정벌, 진도강습이 모두 현실의 벽에 부딪치자 정도전은 더 어처구니없는 발상을 임금에게 던졌다. 이방원과 영안군 이방과(정종) 등 장성한 왕자들을 8도에 제후로 분봉한다는 것이다.

땅이 광대한 중국에서조차 한고조 유방 이래 수 천년 역사를 통해 황제들이 철폐하려고 부심하는 봉건제를 정도전이 조선에서 추진한 것인데, 그 속셈은 누가 봐도 뻔했다. 세자 방석을 위해 우선 장성한 형들을 도성에서 쫓아내자는 것이다. 전국을 내란의 도가니로 빠뜨리기에 충분한 졸렬한 발상이었다.

이것은 이성계가 보기에도 아무리 정도전의 주장이지만 어처구니없었던 모양이다. 이성계는 어느 날 방원을 불러 “외간(外間)의 의논을 너희들이 알지 않아서는 안 되니, 마땅히 여러 형들에게 타일러 이를 경계하고 조심해야 될 것이다”라고 주의를 촉구했다. 대신들이 저런 얘기 안하게 처신하라는 당부였다.

부왕에게 이 말을 들은 방원으로서는 ‘정도전 이 자가 하다하다 이젠 황당한 수작까지 부린다’고 여기기에 충분하다. 이는 또한 이방원과 같은 맹수에게 정도전이 궁지에 몰렸다는 심리적 약점을 드러내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왕자가 아닌 장수들을 모두 이방원 편으로 몰아내 버리게 되는 실책은 따로 있었다.


부실한 진도 강습 처벌로 무수한 장수들 굴욕

태조7년인 1398년 들어, 이성계는 1월4일부터 아프기 시작했다. 연초 병환은 무겁지 않았는지 바로 다음날 쾌차했다. 5월24일 다시 병이 났다. 이번에도 다음날 회복됐지만 전쟁영웅 이성계 생애엔 흔치 않았던 일이다. 회복된 나흘 후엔 세자 방석이 왕손을 얻었다. 이틀 후 이성계는 엉뚱하게 개국 이후 사초를 보겠다고 우겼다. 병도 낫고 드디어 세손 감을 얻었으니 갑자기 후세 평가가 생각났던 모양이다.

7월29일 다시 병환이 났다. 이번엔 나았다는 기록 없이 8월3일 다시 병환이 났다는 기록이 이어진다. 임금의 몸이 더 이상 전쟁영웅의 신체가 아니다. 정도전으로서는 이성계 생전에 해야 할 일을 서둘러야 한다는 시간표가 생겼다. 진도 강습을 통한 왕자들의 사병 몰수다.

첫 번째 신호는 7월25일이었다. 진도 강습을 게을리 한 각 진의 훈도관을 가두고 첨절제사의 죄를 논했다. 첨절제사 중 진도에 불통한 자를 매질했다. 이것은 비록 지방의 장수들을 처벌한 것이지만 이방원 등 왕자들에 대한 엄중경고였다.

8월이 됐다. 엄청난 일이 벌어진 1398년 8월이다.

3일 임금이 병이 났고 4일 사헌부는 삼군 절도사(三軍節度使)와 상장군·대장군·군관(軍官) 등 2백 92인으로 탄핵대상을 높였다. 쾌차했다는 소식 없는 왕은 6일 병이 났다는 기록을 더했다.

이런 가운데 7일 서울의 군관들에게 강제로 진도강습을 실시했다. 앞서 지방의 진도 교관들이 100대 곤장을 맞았다. 왕은 점점 더 아픈데 진도강습의 강제성도 더욱 거세졌다.

조정에서는 정도전과 조준이 한바탕 논쟁을 벌였다. 정도전은 조준에게 “요동공격이 이미 결정됐으니 다시 말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조준은 “만일에 내가 각하(閣下. 정도전)와 더불어 여러 도(道) 백성을 거느리고 요동을 정벌한다면, 그들이 우리를 흘겨본 지가 오래 되었는데 어찌 즐거이 명령에 따르겠소? 나는 자신이 망하고 나라가 패망되는 일이 요동(遼東)에 도착되기 전에 이르게 될까 염려된다”고 반박했다. 결과적으로 정도전의 운명을 경고한 말이 됐다.

그러나 정도전은 기어이 패착을 두고 말았다. 9일 사헌부 탄핵의 형식으로 무수한 왕자 종친들에게 죄를 물었다. 영안군 이방과, 정안군 이방원 등 훗날 임금이 될 두 왕자와 이들 형제 방의 방간이 모두 벌을 받았다. 종친인 의안백 이화(이성계의 이복동생)와 세자 방석의 동복형 무안군 이방번도 포함됐다. 거사가 벌어진 밤 마천목이 불러세운 이천우도 처벌 대상이었다.

개국공신 이지란 남은 장사길도 모두 포함될 정도니 진도 강습이 정도전의 구상과 현실은 너무도 달랐음을 보여준다.

사헌부 탄핵에 대해 왕은 왕자 종친과 공신들은 휘하 사람이 대신 태형 50대를 받게 했다.
 

▲ 진도 강습 부진에 대해 왕자와 종친들을 처벌하는 태조실록의 원문. "영안군 방과"와 "정안군 방원"이라고 적어야 할 곳에 "상왕 옛 이름", "우리 전하 이름(諱)" 이라고 기록하며 이름 적기를 회피했다. 諱는 회피한다는 뜻으로 임금의 이름은 함부로 입에 담지 못하는 예전 법도를 보여준다. 사마천도 사기에서 한고조 유방의 '방'자를 피해 계라는 글자로 대신했다. 계는 넷째아들이란 뜻이다.

 

매를 아랫사람이 대신 맞았지만 각자 하나의 부(府)를 이끌고 있는 왕족들에게는 심각한 도전이었다. 민심 잃은 요동정벌과 진도강습으로 아랫사람이 처벌받아도 아무 일도 못하는 무력한 가장이 되는 것이다. 처벌이 곧 자신들에게 이를 것임도 분명했다.

만필자는 8월9일 대거 처벌 조치가 이방원이 이로부터 16일 후로 거사를 택일하게 된 계기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조정에 불만 세력이 가득하게 됐으니 누가 앞장 설 일만 남았다고 여기게 된 것이다.

하지만 왕족과 장수들이 불만은 많아도 여전히 정도전은 두려웠다. 이들이 불만을 마음대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정도전이 없어져야 한다.

거사를 앞장 서는 것은 정도전을 죽이는 사람인 것이다. 정몽주의 죽음을 본 사람들이 고려가 망했음을 실감하듯 정도전의 죽음을 봐야 조정의 관료와 궁궐의 장수들은 방석의 세자당이 와해됨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1398년 8월 경복궁의 안팎에는 정도전에 대해 반감을 가진 사람들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었다. 8월25일 밤 제1차 왕차의 난은 이런 토대에서 벌어졌다.

정도전은 갈수록 강경책의 폭주기관차가 되고 이방원은 드디어 거사 계획을 세웠는데 14일 임금은 또 병이 났다. 8월은 정말 이성계 승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시기가 되고 있었다.

7일 후인 21일에는 조준이 임금의 쾌차를 기원하는 초례를 소격전에서 벌였다. 23일에는 임금의 가장 큰 아들이 된 영안군 방과도 소격전에서 부왕의 쾌차를 기원했다.

그러나 8월9일 이후의 벌어진 일들은 이방원과 정도전 모두 자신들의 운명을 향해 정해진 트랙을 달려가는 와중의 이런저런 일들로 보인다.

정도전은 이성계 승하 후 어떻게 세자 방석의 승계를 해낼 것인지 매일 남은 심효생 등과 함께 송현 남은의 첩 집에서 밤새도록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방원은 날짜를 정하고 칼을 갈며 마치 폭풍 전야의 정적과 같은 모습만 드러내고 있었다.

1398년 8월25일 밤은 이렇게 다가오고 있었다.


정도전, 과연 억울한 운명일 뿐 자초한 것은 없는가

정변에서 승패를 가르는 것은 정보의 차이라고 한다. 정권을 쥔 정도전은 이방원에 비해 엄청난 정보의 우위에 있었다. 이방원은 구중궁궐의 부왕이 지금 어느 정도 위중하신지, 심지어 살아있기는 한지조차 확신할 수 없는 열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도전은 패했다. 정변의 진행과정을 보면 정도전은 전혀 정보의 우위를 갖지 못했다. 결정적으로 그는 누가 이방원 편인지를 전혀 알지 못했다.

이는 정보력의 부재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리한 정책으로 무수한 사람을 이방원 편이 되게 하면서 실책을 인정하지 않았다. 차라리 이 세상 모두가 이제 이방원 편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정확했을 것이다. 그러나 실책을 다른 실책으로 만회하려는 정도전에게 이런 냉정한 판단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어떤 면에서, 정도전은 불가항력의 피해자였는지도 모른다. 이성계에 의해 세자 방석의 후견인이 되면서 정도전은 질 수 밖에 없는 싸움을 지속해야 했다.

태조실록을 쓴 태종 때의 사관들 조차 방석의 세자 책봉 책임을 정도전에게 묻지 않고 있다. 태조실록은 이에 대해 “임금이 강씨(신덕왕후. 태종 이방원의 계모이며 세자 방석의 생모)를 존중했다”라고 전하고 있다. 정도전은 배극렴, 조준과 함께 나이와 공로로써 청했다고 전한다.

세자 책봉에서만큼은 정도전은 태종 이방원에게 무죄인 것이다.

만약 정도전이 적장계승에 따라 둘째 영안군 이방과를 세자로 후원했다면 방원은 정말 왕이 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신봉승 작가의 이런 분석은 참으로 타당하다고 본다.

하지만 이성계에 의해 정도전은 방석의 후견인이 됐다. 정도전은 여기서 또 다른 강한 동기부여를 받았는지 요동정벌, 왕자들의 8도분봉 등 상식에 어긋난, 시키지도 않은 일까지 벌여가며 매달렸다. 그가 끝내 죽음을 피하지 못한 것은 이런 무리함 때문이다.

정사(正史) 그 어디에도 태조 이성계가 요동정벌을 승인했다는 얘기는 전하지 않는다. 오로지 정도전만의 주장이고, 조준의 반대를 이성계가 받아들였다고 한다. 위화도 회군으로 집권한 이성계이니 정사의 내용이 상식에도 부합한다. 이성계가 왜 정부의 수장으로 정도전이 아닌 조준을 선택했는지에 대한 설명도 될 것이다.

정도전을 문학적으로 미화하는 사람들은 그의 모든 것을 옳다고 여겨, 요동정벌도 대단한 발상으로 생각한다. 당시 요동이 비어있어서 조선이 회복할 기회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요동은 절대 비어있지 않았다. 명나라 황제는 저 멀리 양자강 남쪽 남경에 있었지만 요동에는 그의 아들 가운데 가장 싸움 잘하는 주체가 최정예 부대를 거느리고 연왕으로 주둔하고 있었다.

정도전은 그가 죽기 두 달 전인 6월10일 연왕 주체가 몽고군을 격파했다는 소식도 접했다. 그럼에도 그가 요동정벌을 계속 주장했다면 진실 된 것으로 볼 수 없다.

 

▲ 명나라 전성기를 이끈 성조 영락제는 황자 시절 조선의 정안군 이방원과 참으로 동병상련의 처지였다. 원나라를 몰아내는데 가장 큰 공을 세웠지만 조카 주윤문에 밀려 부황 주원장의 감시 속에 세월을 보내야 했다. 1394년 이방원이 명나라 사신으로 가는 길에 북경의 연왕부에서 두 사람이 만나 의기투합했다. 아직은 임금이 되지 못한 두 사람이지만 한국과 중국의 임금 될 사람이 만난 매우 이례적인 예비 정상회담의 자리가 됐다. /사진=위키백과 중국.

 

연왕 주체는 훗날 조카를 몰아내고 제위를 차지해 성조 영락제가 되는 사람이다. 환관 정화를 보내 남해 대원정을 한 황제로 유명하다.

조선의 이방원과 비슷한 처지였다. 야심 많은 아들로 아버지 임금의 의심을 받아 한동안 탄압받는 세월을 보내야 했다.

흥미로운 것은 두 사람 모두 이렇게 핍박받던 시절에 직접 만나 의기투합했다는 점이다. 근세 이전 한국과 중국의 임금이 대면한 거의 유일한 사례다. 물론 당시는 아니고 훗날 등극할 사람들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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