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왕자의 난, 무인정사의 재구성 6] 정말 50명만 거느리고 거사에 나섰을까

<6회>

▲ 안타깝게도 태종대왕 어진을 찾을 길이 없다. 만필자에게 가장 깊게 남아있는 태종대왕 이방원의 이미지는 1976년 KBS 드라마 '황희'의 남성우다. 하지만 그 또한 이미지를 찾을 길이 없다. 정안군 이방원으로는 단연 1997년 KBS 드라마 '용의 눈물' 유동근이다. /사진=KBS, CNTV, 유투브 '용의 눈물' 화면캡쳐.

 

[초이스경제 장경순의 만필세상] 한동안 정사(正史)에 나오는 얘기는 무조건 부정하는 경향이 있었다. 기존의 사관에 기득권층의 시각이 비판 없이 대물림돼 온 풍토에 크게 경종을 울리는 순작용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류의 비판적 접근이 그 자체로 교조화 되는 경향도 있었다. 기존 시각과 상호 보완하는 차원을 지나, 예전의 기득권 사관이 누렸던 “나만 옳다”는 모습을 답습하자 요즘 사람들은 여기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하고 있다.

만약 조선 왕조 실록에 담긴 얘기가 모두 ‘승자의 기록인 거짓’이라고 주장한다면,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 얘기는 또 무엇으로 증명하는가. 그나마 오늘날 우리 손에 그 당시 일을 가장 가까이 지켜보고 사관(史官)의 정신으로 기록한 것이 실록이다.

‘승자의 기록’이기 때문에 사실과 달리 후세에 전하고 있는 부분이 있기는 할 것이다. 그런 부분들을 가려내는 것은 전후의 사실(史實)과 맞춰보는 것이다.

호메로스의 일리야드, 오딧세이에 감동을 받은 하인리히 슐리만은 터키 현지를 발굴해 금으로 된 유물을 발견하고 열광했다. 그러나 현대의 사학은 여기서 발견된 모든 것을 트로이 유적으로 여기지 않는다. 과학적으로 조사를 해보니 트로이 전쟁 무렵인 B. C 1250년뿐만 아니라 그보다 1000년이 앞선 유물까지 발견됐다. 수 천 년에 걸친 9개 문명이 지층을 형성하며 쌓여 있었던 것이다.

이런 노력을 100% 커녕 10분의 1도 안하고 무조건 정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우기면서 자신의 문학적 서사시에 꿰맞추려고 하는 것을 역사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런 문학적 충동이 있다면 그것은 가공과 결합된 사극의 범주를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태종 이방원의 사관들이 기술한 정도전 최후를 살펴보려고 한다.

이 시리즈의 2회 <정도전은 이방원에게 살려달라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1회, 3회, 5회도 관련된다.

물론, 617년 전의 일에 동영상이나 녹음테이프도 남아있지 않다. 누구 말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단지 앞뒤의 정황과 가장 일치하는 상황이 무언가를 찾아갈 뿐이다.


삼봉집의 시, 과연 현장에서 지은 것일까

▲ 정도전이 정안군 이방원에게 "예전에 나를 살려줬듯 오늘도 살려달라"고 말했다는 태조실록의 원문. 예전이란 이방원이 정몽주를 죽임으로써 정도전을 위기에서 구했던 일이라고 실록은 설명을 덧붙였다.

태조 이단, 즉 이성계는 1408년 태종 8년에 승하했다. 태조실록은 태종조의 사관들이 쓰게 됐다.

제1차 왕자의 난(무인정사)은 태조 7년(1398년) 음력 8월26일에 기록됐다. 8월25일 밤에 발생한 일이 된다.

여기서 정도전은 정안군 이방원에게 “예전에 공(公)이 이미 나를 살렸으니 지금도 또한 살려 주소서”라고 빌었지만 이방원이 꾸짖고 참수를 명했다고 적혀 있다.

이 기록을 안 믿는 사람들은 근거로 삼봉집에 실린 시 한수를 제시한다. “30년 애 쓴 것들 송현 정자에서 한번 취하니 결국 헛되이 되었구나”라며 결연히 죽음을 맞았지 실록에 있는 저런 말을 했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정도전이 이방원의 반군에 붙잡혀 끌려온 상황이 시를 지을만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정도전이 시를 지으려고 했어도 이방원의 동지들이 그걸 기다릴만한 모습이 전혀 아니었다.

반군 수뇌부들이 극도로 격앙돼 있어 순간에 사람의 목숨이 갈리는데, 불리한 군세를 의식한 초조함이 더해진 때문으로 보인다. 유만수는 아들과 함께 불려와 처음에는 이방원이 내주는 갑옷도 받았다. 그러나 방원의 넷째 형 회안군 방간과 왕실의 사돈 이거이가 정도전과 남은의 무리이니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방원이 만류했지만 이들의 기세를 이기지 못해 유만수는 죽음을 당했다.

궁궐수비 장수 도진무 박위는 동료 조온과 달리 반군에 합류하기를 주저하다 마지못해 칼을 차고 방원에게 나왔다. 방원이 부드러운 말로 위로했지만 “날이 밝으면 명을 따르겠다”는 한마디로 죽음을 맞았다. 아침에 허약한 군세가 드러나면 공격하려는 속셈이라고 방간이 주장해 박위의 목을 벴다.

모두들 피에 목마른 야수가 됐고 이방원만 온건했던 것도 아니다. 변중량은 “내가 공에게 뜻을 기울이고 있은 지가 지금 벌써 두서너 해 됐습니다”라며 방원의 편임을 주장했지만 방원의 반응은 너무나 살벌했다.

“저 입도 고깃덩어리다(彼口亦肉也).”

태종의 사관들이 자기 임금의 언행을 기록한 것이 이와 같다. 이것으로써 사관들이 그날의 정황을 어떻게 전달하려 하는지, 과연 자기 임금만 지극히 착한 사람을 만들었는지를 가늠해 본다.

변중량이 직후에 어찌됐는지는 적혀 있지 않다. 그는 다음날부터 조선왕조실록을 통틀어 살아있는 사람으로는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동생 변계량은 세종 조의 명신이 됐으니 연좌의 죄까지는 가지 않은 모양이다.

이런 사람들이 정도전한테는 시 한수 지을 시간을 주면서 사방에 관군이 나타날 수도 있는 불안을 감수했을 리가 없다. 이것이 오페라에서 ‘정도전 최후의 아리아’가 울려퍼지는 공연 장면이 아닌 이상.

정도전이 처형되는 순간에 이르러 시와 비슷한 발언을 했을 수는 있다. 절대 붓을 잡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그의 발언을 누군가 듣고 삼봉집을 편찬한 그의 제자들에게 알려주고 듣는 사람이 시를 썼을 수는 있는 일이다.

또는 정도전이 아닌 누군가가 그의 생애를 추모해 삼봉집에 추모시로 넣었을 수도 있다.


정도전은 자신이 왜 죽는지를 알기도 어려웠다

정도전이 살려달라고 애원했다한들 그 자체가 그에게 누가 될 일도 아니다. 그는 갑자기 벌어진 상황을 파악할 만한 형편이 못됐다.

정도전의 관점에서는 이 무모한 녀석 이방원이 드디어 자기 목숨 재촉하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는 판단 정도는 가능했을 것이다. 방원이 정몽주처럼 자기도 제거할 수 있다는 경계는 별로 안했던 것으로 보인다.

방원이 송현에서 공격을 개시하기 앞서 그의 측근 소근(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사람을 지칭하는 단어로 보인다)이 먼저 집 곳곳을 정탐할 때, 노복들은 모두 잠자고 있었다. 정도전과 남은만 등불을 밝히며 담소하는 정황을 들여다보고 올 정도로 경비가 허술했다.

남은 첩의 집에서의 모임이 비밀도 아니었음을 시사한다. 이방원이 그렇게 애를 써가면서까지 캐내야 할 첩보가 아니고 당시 벼슬하는 사람들은 “요즘 정도전이 남은의 첩 집에서 숙식한다”는 것을 알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성계가 승하하게 되면 입궐을 빨리 하려던 것으로 풀이된다.

방원의 기습 공격에 전혀 대비하지 않은 것은 정몽주와 처지가 달랐기 때문이다. 정몽주는 이성계의 정적이었지만 정도전은 왕의 심복이다. 정몽주를 죽인 후엔 명목상의 꾸지람이나 듣고 말았지만, 정도전을 죽이면 이는 세자 방석을 노린 역적행위가 된다. 그저 정도전에게 한풀이나 하고 제 목숨 재촉할 이방원이 아닌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믿음이 한 순간에 무너지며 이 밤에 방원이 칼을 들고 나타났다. 냉정한 줄 알았더니 그간 너무 몰아붙인 끝에 이성을 잃었구나 여기는 것이 당연하다. 일단 진정시키고 아침을 맞으면 여전히 조선 30만 군대는 정도전의 지휘권 아래 있고 임금은 여전히 자신을 믿을 것이다. 방원이 무슨 말을 한들, 자신을 내칠 임금이 아닌 것은 알고도 남는다.

그런 사람이 “그래. 내가 죽는구나. 시나 한 수 읊겠다”는 것 보다는 “정안군, 일단 자제합시다”라고 하는 편이 훨씬 더 현실적이다.
 

▲ 올해 10월7일은 음력 8월25일, 617년전 제1차 왕자의 난이 벌어진 날이다. 이날 밤 9시35분 광화문의 모습. 지금은 조명이 환하지만 1398년엔 달빛만이 밤길을 밝혀줄 때다. 음력 25일이어서 달도 모습을 크게 감춘 날이다. 어두운 조명에 흔들리는 군심은 광화문 밖 미약한 정안군 이방원의 군세를 수천 수만명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사진=초이스경제.


이방원, 정말 50명으로 정권 차지할 생각이었을까

역사를 ‘승자의 기록’으로 만들려는 본능을 이방원이라고 해서 거부하기는 어렵다. 정치적 소양이 가득했던 태종 이방원이니 무인정사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각색하려는 충동이 없을 수가 없다.

그가 특히 집착한 것은 거사의 정당성이다. 태조 이성계의 부당한 적장계승 무시가 거사의 명분이기는 하나, 여기에는 아들이 아비에게 칼을 드는 불효가 결부된다.

그래서 방원이 집착한 명분은 정당방위론이다. 그런데 이 부분만큼은 실록이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것 같지 않다. 뭔가 꾸며서 얘기하는 분위기가 가득하다.

그래도 이방원의 아들 세종성군께서는 부왕의 말씀을 절대 옳다 여겼다. 용비어천가 98장이 그래서 나온 것이다.

정당방위론이란, 정도전이 먼저 그날 밤 이방원을 죽이려했다는 것이다.

임금의 아들을 죽이려는 정도전이 아무 경비도 안 세우고 노복들은 잠이 든 채, 남은과 밤새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는 것이 실록대로의 설명이다. 상식하고 참 많이 다른 얘기다.

정당방위론을 위해서 태종 세종조의 사관들이 강조하는 것이 방원의 허술한 군세다. 자택을 출발할 때 십 여 명의 장수가 기병 10명, 보병 9명에 노복 10여명만 거느렸다는 것이다.

정도전이 죽이려고 해 급하게 모이다 보니 이렇게 출발했는데, ‘천명’으로 장수들이 일제히 이방원에게 귀순했다는 것이 조선 정부 대변인의 설명이다.

그래서 조선 정부의 설명에는 거사를 앞두고 방원이 미리 세력을 규합했다는 얘기가 절대로 들어가서는 안되는 것이다.

조온, 이천우 등 대궐 수비 장수들과 사전에 공감대를 가졌다는 얘기도 태종대왕을 역적으로 모는 불충이 된다. 충청관찰사 하륜은 절대로 그날 밤에 등장해선 안된다. 충청 관병이 시간 맞춰 남산에 도착해 무수한 횃불로 진을 치며 경복궁 수비군의 군심을 무너뜨리려면 당시 서울과 충청도 사이 이동 거리를 감안해 수일 전에 거사 계획이 나와 있어야 한다. 이 또한 태종대왕이 정당방위로 나선 것이 아니라 사전에 모의했다는 불충이 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세종대왕 또한 매우 예민하게 대하는 모습을 보인다. 태종의 정통성은 세종의 정통성과도 이어진다.

세종 20년인 1438년, 신개가 태종의 묘인 헌릉 비문에 대해 이견을 제기했다. 비문에 “태종께서 병기(炳幾)하시와 적도를 섬멸 제거하셨다”는 부분이다.

이것은 태종이 좋은 기회를 포착해 나섰다는 해석이 된다. 선제공격을 받게 돼 불가피하게 나선 것이라는 명분과 배치된다.

신개는 “대개 ‘기(幾)’라는 것은 기미(幾微)가 태동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고, 어떤 일이 형태로 나타나기에 앞서서 이를 행하는 것을 ‘병기(炳幾)’라고 이르고, 혹은 뿌리도 잡지 않고 싹도 트지 않은 일을 감행하고서 이를 교묘하게 꾸며대는 것도 역시 ‘병기’라고 이르는 수도 있습니다”라며 “우리 태종께서 마음가짐은 광명정대하옵기가 저 청천백일과 같으셨는데 이 말이 혹시 후세에 의혹을 일으키지 않을까 하옵니다”라고 세종에게 말했다.

신개의 주장에 세종도 크게 공감했다. 대왕은 “실록은 다시 고칠 수 없는 것이고, 비문만은 마땅히 소상하게 고쳐 써야 할 것이다”라며 태종의 측근이던 전흥을 불러 당시의 정황을 물었다.

전흥의 당시 지위가 높지 않아 자세한 정황을 알기 어렵다 해서, 벌을 받고 도성에서 추방돼 있는 권신 이숙번까지 다시 한양으로 불러들이도록 명을 내리기도 했다.

무인정사 당시 상황을 검토한 세종대왕이 내린 최종 판단이 용비어천가 98장이다.

“임금 말 아니 듣고

적자에게 무례할 새

서울 빈 길에 군마 뵈니이다”

광화문 앞에 진출한 이방원의 군세가 허약했는데도 광화문 문루에서 이를 지켜본 관원이 마치 30만 명의 촛불시위 보듯 했다는 얘기다. 정도전 일당이 이성계 말도 무시하고 이방원 등 신의왕후 한씨 소생 왕자들에게 무례하게 굴다가 텅 빈 길에 군대가 가득한 것으로 헛것을 봤으니 이 또한 역대 제왕들에게 내리는 하늘의 가호였다는 뜻이다.

태종대왕과 제1차 왕자의 난은 만필자가 역사적 사건 중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갖는 분야다. 제1차 왕자의 난, 무인정사의 재구성은 앞으로도 다음 회를 계속해 가겠지만 7회부터는 반드시 다음 주 이어가는 방식이 아니라 그때그때 이야깃거리가 있을 때 계속해 나갈 것임을 말씀드린다. 만필자도 기자인 이상, 만필 또한 시사와 흐름을 함께 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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