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은근하게 눈길을 끄는 사극이 JTBC에서 하는 ‘꽃들의 전쟁’이다. 선이 굵은 배우들이 대거 출연해 제법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인조의 역을 맡은 이덕화가 삼전도에서 청태종 앞에서 항복하는 장면은 드라마 속 인조라는 인물의 향후 성격 설정에 큰 영향을 주는 부분이다. 여기서 받은 엄청난 수모가 그의 성격 굴절까지 가져와 아들을 죽이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복선이 엿보인다.
 
드라마 속에서 인조는 용포를 입고 나가 관을 벗은 채 땅에 머리를 대고 절을 하다 급기야 이마에서 피까지 흘린다.
 
하지만 과연 ‘삼전도의 굴욕’ 현장에서 인조는 이런 신체적 학대를 당했을까. 혹시 위정자들의 친명배금 정책으로 인해 죄 없는 백성들이 살육당하고 인질로 끌려가는 고초를 당하니, ‘나도 너희들만큼 고생했다’고 둘러대기 위해 삼전도의 상황이 과장된 것은 아니냐는 것이다.
 
우선 피나게 땅에 머리를 조아렸다는 부분부터 현실성은 크게 떨어진다. 세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땅에 대는 ‘삼궤구고’는 만주족의 전통예법으로 청나라 역사와 함께 내내 지속됐다. 인조가 항복하는 군주라서가 아니다. 청나라 신하들 뿐만 아니라 황제도 공자 묘에 참배하거나 심지어 앞선 왕조 명나라 주원장 묘소에 갔을 때도 행하는 예법이다.
 
‘오랑캐’라고 낮춰보던 만주족에 항복하는 상황이 참담해 조선 사람들의 눈에 더욱 생경해 보였을 수는 있다. 충격받은 감정 체계는 기억을 바꿀 수도 있는 법이다.
 
조선과 청 사이의 강화협상도 인조가 피터지게 두들겨 맞아가며 항복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조선왕조실록이 전하는 인조의 출성 직전, 조선의 홍서봉과 청의 용골대간 마지막 세부사항 조율 장면이다.
 
용골대: 그대 나라가 명나라의 칙서를 받을 때의 의례(儀例)는 어떠하였소?

홍서봉: 칙서를 받든 자는 남쪽을 향하여 서고 배신(陪臣)은 꿇어앉아 받았소이다.

여기서 의거하여 주고 받은 뒤에, 용골대는 동쪽에 앉고 홍서봉 등은 서쪽에 앉았다.
 
용골대는 칙사의 예를 마치고 청 황제의 신하된 처지로 돌아갔다는 얘기다. 무장인 그는 생소한 외교 의전분야지만 예전의 명나라 칙사들보다 예법이 소홀해서는 안된다고 의식하는 듯 하다.
 
용골대: 요즈음 매우 추운데 수고스럽지 않소?

홍서봉: 황상께서 온전히 살려주신 덕택으로 노고를 면하게 되었소이다.
 
용골대: 삼전포(三田浦)에 이미 항복을 받는 단(壇)을 쌓았는데, 황제(청태종)가 서울에서 나오셨으니, 내일은 이 의식을 거행해야 할 것이오. 몸을 결박하고 관(棺)을 끌고 나오는 등의 허다한 절목(節目)은 지금 모두 없애겠소.
 
열국지에 흔히 나오는 웃통을 벗거나 소매를 드러내고 생명을 구하러가는 참패는 면하는 상황이다. 삼국지 손권의 자손 손호처럼 함차에 실려 나가는 경우도 면했다.
 
홍서봉: 국왕(인조)께서 용포(龍袍)를 착용하고 계시는데, 당연히 이 복장으로 나가야 하겠지요?

용골대: 용포는 착용할 수 없소.
 
한숨 돌리는 분위기가 되자 홍서봉은 한걸음 더 나아가 용포 착용을 타진 해본 듯 하다. 드라마 속의 출성장면은 1976년 TBC 드라마 ‘별당아씨’에서 인조가 삿갓에 선비 복장으로 나간 것이 오늘날의 드라마보다 정확하다고 보인다.
 
비록 군사력이 형편없어 참패를 당했지만, 조선의 외교관들은 살아있어서 항복의 순간에도 임금의 체면을 높이는 모든 방법을 강구하는 모습이다.
 
이미 강화도가 함락돼(이 또한 청천벽력이었다. 몽고 30년 침략에도 굳건하던 강화도가 단번에 제압되다니) 소현세자 봉림대군이 모두 포로가 된 상태였다. 조선이 더 이상 버틸 여지가 없었지만 청나라 또한 아직 배후에 건재한 명을 의식해야 했다.
 
20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에 들어온 청태종 홍타이치로서는 명나라 생각에 하루하루가 다를 수 밖에 없었다. 비록 정예하지 못하지만 가끔씩 출현하는 조선의 근왕병도 있는데다 임진왜란처럼 의병들이 청군의 보급로를 끊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
 
말 그대로 빈털털이로 협상장에 나간 조선 외교관들이지만 홍타이치의 이런 처지 하나를 최대로 활용해 나라를 지켰고 임금을 지켰고, 또한 임금의 최소한의 체면도 보전했다. 왕에게 오직 용포 한벌을 못 입혔을 뿐이다.
 
당시 궁인이 기록한 산성일기에 따르면 청나라 사람들 눈에 겨울철 인조의 용포 벗은 옷차림이 너무나 허술해 보인듯 하다. 용골대가 인조에게 와서 청태종이 주는 털옷을 건네면서 “정의(情意)를 표하기 위해 주는 것이지만 귀국의 의복제도가 우리와 같지 않아 억지로 입으라 하는 것은 아닙니다”고 하자 인조는 사의를 표하고 위에 걸쳐 입었다고 한다. 추워서 였을 수도 있고 지금 사정이 오랑캐 옷이라고 못 입겠다 할 처지가 아니어서 였을 수도 있다.
 
삼전도에서 두 아들을 인질로 데려가는 청태종 및 예친왕 도르곤과 헤어지는 대화는 청 지도자들의 인조에 대한 태도를 엿보게 한다.
 
인조: 가르치지 못한 자식(소현세자, 봉림대군)이 지금 따라가니 대왕의 가르침을 바랍니다.
 
도르곤: 세자 연세가 이미 저보다 많고 일에 대처하는 것을 보니 제가 가르칠 바가 아닙니다. 황제께서 후히 대하시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세자가 가더라도 틀림없이 멀지 않아 돌아올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오랑캐라고 멸시하고 끝내 패전의 전쟁까지 벌였으니 인조에게 뒤늦은 후회가 몰아닥쳤을 것이다.
 
▲ 한명회, 설인귀, 이의방에 심지어 전두환으로까지 보여준 이덕화의 선이 굵은 연기는 인조로 나와서도 여전하다. 다만 그가 삼전도에서 머리에 피를 흘리는 장면이 과연 신빙성이 있느냐는 의문이 있다. 실제 장면이 아니라 인조라는 인물의 의식을 드러낸 장면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세간에서는 인조가 머리에 피를 흘리며 항복했다는 얘기까지 덧붙여 ‘삼전도의 굴욕’이란 말을 지어냈다.
 
정작 굴욕을 당한 것은 인조가 누구고 광해군이 누구고 조차 알지 못하고 살아간 전쟁 한복판의 조선백성들이다. 이들의 분노를 누그러뜨리자니 왕 또한 “나도 너희들 못지않게 고생했다”고 할 수밖에 더 있겠는가.
 
삼궤구고에 대한 설명을 겸해 사족으로, 청나라 5대 옹정황제를 소재로 한 소설 속 장면을 덧붙인다.
 
일자무식이지만 옹정의 최측근 신하로 상황판단이 빠른 이위가 지방근무 중에 황제를 알현하러 자금성에 입궁했다. 어전에서 서있을 곳을 정해주는 태감(환관)에게 이위가 윽박을 지른다.

“너희들이 평소에 바닥을 다 확인해서 머리 댔을 때 잘 울리는 자리 봐 둔거를 다 알고 있다고. 촌지 주는 사람한테만 그런 자리를 알려주고 다른 사람은 세게 들이받아도 아무 소리 안나는 곳으로 골라주지?”

이위의 사나운 명성을 잘 아는 태감은 “천만의 말씀입니다요. 소인을 못 믿겠다면 이따 폐하를 알현할 때 확인해 보십시오”라며 도망쳤다.

옹정이 어좌에 오르고, 이위가 바닥에 머리를 대자마자 과연 태감의 말처럼 건청궁 전각이 쿵쿵 울려나갔다.
 
삼궤구고가 좀 우스꽝스런 예법인지는 몰라도 머리에 피나게 자해할 정도로 심각한 것은 아니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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