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죽으면 당신이 가장 먼저 달려올 것"이라던 '양 김' 시대의 종료

▲ 1985년 3월6일의 김대중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가운데)과 김영삼 신한민주당 고문(오른쪽). 왼쪽은 김대중 의장의 부인 이희호 여사. 그해 2월12일 총선에서 전두환 정권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압승을 거둔 직후 모습이다. 장소에 대한 설명은 없지만 두 사람의 회동은 지금은 사라진 남산의 레스토랑 외교구락부에서 자주 이뤄졌다. /사진=뉴시스 독자 정태원씨 제공.

 

[초이스경제 장경순의 만필세상] 1979년 봄, 나는 아침에 약간 정신 나간 짓을 하며 학교를 다녔다. 이 때가 바로 나의 중2 때다.

서울 연희동에서 계동으로 통학하는 길은 8번 버스를 타고 신촌 서울역 시청 중앙청을 거쳐 다니는 것이 정답이었다. 그해 여름 금화터널이 개통하고 나서는 543번이나 205번을 타고 바로 사직동 중앙청으로 다니는 것이 옳았다.

그런데 버스에 사람이 너무 많았다. 또한 봄에 8번만 타고 다닐 때는 정류장의 다른 버스에 비해 자주 오지도 않았다.

그 때 나의 눈에 반가운 버스가 들어왔다. 135번, 이곳으로 이사 오기 전 효자동 살 때 매일 보던 ‘내 고향의 버스’였다. 그 버스가 이 곳에도 오고 있다니, 이걸 타면 세종로 지금의 교보앞 까지 갈 수 있어서 통학의 대안이 될 만 했다.

종점 근처에서 타니 버스 안이 전부 내 자리고, 특히 이 버스는 신식 차량이 많았다. 그 때만 해도 드물던 문 두 개짜리 뿐만 아니라 매우 희귀한 엔진이 뒤에 달린 ‘고속버스’같은 차량도 있었다. 지금은 모든 버스가 다 ‘고속버스’지만 그 때는 대부분 차의 엔진이 운전석 옆에 있었다. 모든 자리가 다 차고 나면 엔진통 위가 마지막 ‘빈 자리’였다. 승객들 앉으라고 아예 덮개도 놓여있었다.

빈 자리도 많고 새 차도 많은 135번이지만 단점이 있다면, 동교동 서강대 마포 원효로 삼각지 서울역 시청으로 가는 이 노선은 정상 통학 때보다 20~30분은 더 걸린다는 점이었다. ‘널럴한’ 차안에서 편하게 앉아가며 책을 보면 시간 낭비가 아니다라는 지론으로 한동안 이러고 시내 유람을 하며 학교를 다녔다.

5월쯤 되는 것 같았다. 얼마 전에 이 곳으로 야당인 신민당이 이사 왔다더니 아침에 양복 입은 사람들이 잔뜩 나와서 사람얼굴이 있는 피켓을 들고 있었다. 어른들이 정치하는 모습을 처음 구경한 것이었다.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김영삼이 이철승을 누르고 당 총재 자리를 탈환한 날이었다.

이 날 이후, 신민당사의 아침 모습은 매우 이색적이었다. ‘민주회복’이라고 시작하는 현수막이 매일 걸렸다. 저런 소리하면 간첩이라고 해서 큰일 날줄 알았는데, 저래도 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이런저런 구경을 하면서 시사에 대한 관심 증대에 일조한 것은 아닌가 돌이켜 본다.

중학교 2학년이면, 시대 이데올로기를 전적으로 받아들일 때다. 지금까지 박정희 대통령 없으면 우리나라 망하는 줄 알았는데, 국회의원들의 대장 정도 되는 사람이 저런 얘기 하는 걸 보면 정치가 생각보다 복잡한 것 같았다.

가을 쯤 되면서, 나의 정신 나간 아침 등교는 교정이 됐다. 콩나물 같은 버스에서 꽉꽉 눌리면서 학교를 다녔다. 마음잡았다기 보다는 아침에 더 게을러져서 시간 여유가 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봄에 총재가 된 김영삼은 거의 매일 뉴스에 심각하게 등장했다. YH여공들이 신민당사에 들어갔다가 끌려나왔다더니 얼마 후엔 김영삼 총재가 의원제명당했다.

중학생이 뭐 그런 뉴스까지 보고 다니냐 할 수도 있지만, 우리 자랄 때는 신문을 보면서 특히 한자 공부하라는 가르침을 받으며 다녔다.

김영삼 총재가 제명된 다음 날 아침 신문의 사진이 기억난다. 모든 신민당 의원들이 의장석을 점령하고 있는데 김 총재 혼자 아무 말 없이 싸늘한 표정으로 자신의 의석에 앉아있었다.

나의 ‘정상화(?)’된 통학 길에서 야당당사와 같은 정치현장은 사라졌지만, 이제는 정치가 모든 국민의 아침 출근 통학길로 찾아왔다.

며칠 후, ‘부산 계엄령’이라는 호외가 집에 배달됐다. 그리고 며칠 후 호외가 또 왔는데 이번엔 대통령 서거였다.

학교 가는 길 중앙청 앞에 장갑차도 나타났다. 이 장갑차는 사라졌다가 12월12일 지나 또 한 번 나타났다.

다음 해, 중학교 3학년이 된 어느 날에는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데 버스기사가 더 이상 못가니 모두 내리라고 했다. 연대 앞이었다. 집까지 두 정거장 걸어가면 되니 요금 아낀다는 생각만 하며 내렸다.

연대생들 수십명이 교문 밖에 나와서 “유신잔당 물러가라 훌라훌라” 노래를 하고 있었다. 지금은 우정스포츠센터로 잘 알려진 입체교차로 근처로 와봤더니 더욱 복잡했다. 버스가 오던 길을 되돌아가고 차들은 꽉 막혀 있었다.

며칠 후부턴 길가로 나 있는 연대 운동장에 군용 차량이 가득 차 있었다. 그 때, 35분의1 크기 플라스틱 모델 조립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트럭 장갑차를 동네 근처에서 실물로 보게 됐다고만 여겼다.

여름 가을이 지나도록 그곳을 지키던 군용차량들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대학생이던 우리 형은 학교 갈일이 없는 느긋한 세월을 보냈다. 콩나물 버스를 타려고 매일 아침 대문을 나서는 나에게는 집에 신선이 한 명 있는 셈이었다.

뉴스에서 김영삼은 사라졌다. 상도동 사는 친구가 있었는데 어떤 넋 나간 사람이 김영삼 전 총재 집 앞에서 “영삼아 나와라” 소리 질렀더니 대문에서 사람들이 우루루 나와서 끌고 들어갔다는 얘기를 해서 한참을 깔깔거리고 웃기도 했다.

내가 1984년 대학생이 될 때까지 김영삼은 다시 뉴스에 등장하지 않았다. 고3일 때 ‘모 인사 현안’이라는 표현으로 그의 23일 단식투쟁 소식이 전해졌다는데, 그렇게까지 자세히 신문을 읽지는 않았다.

 

▲ 1987년 6월 직선개헌 투쟁에 나섰다가 연행되는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 연세대생 이한열 군의 최루탄 피격 사망으로 더욱 거세진 민심은 이 투쟁에서 마침내 직선개헌을 쟁취했다. /사진=뉴시스 독자 정태원씨 제공.

 

1979년 5월, 아침에 내가 신민당사에 사람 모인 모습을 지켜 본 김영삼의 총재 탈환도 한국 정치사에 약간의 미스테리로 남아있다.

박정희의 유신정권은 이철승의 당권유지를 희망했다고 한다. 당초 예상도 이철승 승리가 우세했다. 그런데 신민당의 바닥 민심이 역전을 일으켰다.

1차 투표에서 과반수가 없어 이기택이 탈락한 가운데 김영삼 이철승의 결선 투표가 열리기 전이었다. 김영삼이 이기택을 붙잡고 설득을 했다는데 이 때 창밖에서 김영삼을 연호하는 당원들의 모습을 이기택이 봤다. 그 열기가 4.19 혁명 주역인 이기택이 보기에도 대단했던 모양이다.

이처럼 당원들의 민심을 결집시킨 데는 신민당의 마지막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과의 합심도 큰 몫을 했다. 김대중은 당시 연금 상태였는데 어쩐 일인지 경비가 풀려 그가 이날 전당대회 현장에 나타날 수 있었다는 얘기도 전한다.

유신말기, 권력의 양대 축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차지철 경호실장의 각축 관계에서 김재규 중정부장의 입지가 약화된 또 하나의 사례로 간주되고 있다.

당권회복을 위해 합심했던 김영삼 김대중 두 사람은 다음해 바로 갈라져 극심한 내분을 벌였다. 신군부세력이 빌미로 삼은 것 가운데 하나가 됐다.

하지만 두 사람은 5공 통치에 맞서는 직선제 개헌으로 다시 의기투합했다. 부산역 광장에 운집한 부산시민들에게 김영삼 신민당 고문이 테이프를 틀어줬다. 그 테이프에서 연금을 당해 참석을 못한 김대중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의 목소리가 들리자 부산시민들은 우레 같은 함성으로 호응을 하며 기세를 올렸다.

김대중 김영삼 ‘양 김’은 서로 “나 죽으면 가장 먼저 달려올 사람”으로 상대를 여기며 애증을 반복했다.

두 사람은 모두 이제 세상을 떠났다. ‘양 김’ 시대의 성격을 어떻게 정의하느냐는 두 사람이 안고 가기보다는 남아있는 사람들의 몫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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