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한 미모의 여배우 송선미가 파격 연기를 했다고 한다. 꼭 그래서 보게 된 건 아니지만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보니 마침 그 드라마, ‘꽃들의 전쟁’과 마주치게 됐다.

 
“이게 그 드라마야?” 하면서 야생 다큐하는 채널로 곧 돌리려다가 어떤 인물이 등장하는 화면에서 그대로 정지하게 됐다. 아직 설명도 없고 누군지도 모르겠지만 풍기는 분위기가 꽤 낯익은 카리스마였다.
 
 
 도르곤이었다. 아시아 역사상 최고의 명장이라고 여기는 바로 그 사람이다. 물론, 한국과 관련해서는 병자호란때 침략해 들어온 청나라 유력장수 가운데 한명이라는 악연이 있기는 하다. (중학교 다니던 1979년, 독일 팝그룹의 노래 ‘징기스칸’이 한국을 침략한 사람을 미화했다고 금지곡이 된 일을 지켜본 세대다. 그래서 도르곤에 대한 평가도 조심스럽게 내릴 수 밖에 없다.)
 
수년전 ‘대청풍운’이라는 중국드라마에 푹 빠진 적이 있다. 이 드라마는 지금까지 봤던 한국과 중국의 모든 사극을 한 번에 압도하는 괴력을 지녔었다. ‘대청풍운’의 도르곤은 이런 모습이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낯익은 얼굴이다. 영화 적벽대전에서 조조로 주연을 맡았던 초특급배우 장펭이(張豐毅)다. 이 정도 배역에서 알 수 있듯, 여기서는 도르곤이 주인공이었다.
 
도르곤은 청나라 개국태조 누르하치의 열네번째 아들이다. 이복형인 홍타이치가 누르하치를 승계한 후 그는 예친왕으로 봉해졌다. 1636년 병자호란에 종군해 몽고군이 30년 동안 접근못한 강화도를 단번에 함락시키는 놀라운 지휘력을 과시했다.
 
1643년 2대황제 홍타이치가 돌연사하고 그의 아홉째 아들 복림이 불과 6세 나이로 제위에 올랐다. 이 때만 해도 청나라는 아직 산해관 밖 만주에 머물러 있었다.
 
도르곤은 섭정왕의 지위에 올라 실질적인 황제 노릇을 했다. 지금 ‘꽃들의 전쟁’이 진행되는 것은 이 시기다. 따라서 정확하게는 ‘예친왕’이 아니라 ‘섭정왕’으로 불리는게 맞다.
 
1644년 그는 드디어 청나라 개국 3대의 숙원이 담긴 중원 정벌을 이뤘다. 7살 황제는 허울일 뿐, 산해관을 넘어 자금성에 입경한 주역은 역시 도르곤이다. 그러나 그는 태화전 옥좌의 유혹을 뿌리치고 섭정의 지위 이상을 넘지 않았다.
 
실질적인 아시아의 주인으로 군림했던 도르곤이지만 그의 마지막은 상당히 급작스러운 비극으로 이어졌다. 1649년 도르곤의 동복동생이자 핵심 측근인 다택이 천연두로 사망한 것은 갑작스런 비운의 시작이었다. 다음해 도르곤이 사냥 도중 사고로 중상을 입고 생을 마감한다.
 
도르곤 죽음과 함께 3대 황제 복림(세조. 순치제)의 친정이 시작되면서 도르곤 격하가 살벌하게 진행돼 도르곤의 시신이 부관참시까지 당할 정도였다. 그러나 많은 세월이 흐른 6대 건륭제 치세에 이르러 성종 의황제로 복권됐다.
 
조선 효종1년에 청나라로 시집간 것으로 잘 알려진 의순공주의 남편이 바로 도르곤이다. 의순공주가 시집간 그 해가 바로 도르곤이 죽은 때다. 의순공주와는 별도로 신분이 밝혀지지 않은 다른 조선여인과 사이에 딸을 하나 얻었는데 그녀가 도르곤의 유일한 혈육이다.
 
도르곤은 3대 복림의 후견인이 되면서 복림의 생모 효장문황후를 자신의 아내로 맞았다. 만주족 특유의 형사취수방식이라고 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한족에 동화된 만주족 황실은 이를 부끄럽게 여겼다. 도르곤 사후의 격하 운동은 여기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도르곤의 인생은 우리식 나이로 서른아홉 짧은 생애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의 이복형인 2대 황제 홍타이치 사이에 얽히고설킨 애증의 사연은 전혀 다른 주제의 장편 소설이 세 편은 나올 정도다.
 
언젠가 많은 독자들과 나누고 싶었던 도르곤 얘기다. 마침 생각이 이르렀을 때, 조선 역사 속에 드러난 도르곤의 모습, 홍타이치와의 애증을 나눠서 살펴보려고 한다.
 
사족: ‘꽃들의 전쟁’에서 도르곤으로 나오는 배우는 생소한 얼굴이 아닌 듯 하다. 전에도 많은 조연을 맡은 듯 한데, 이와 같은 카리스마 넘치는 분위기는 처음이다. 과연 배우는 천의 얼굴을 가졌다는 말이 맞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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