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의 와중에 인조를 더욱 괴롭힌 것은 오랑캐에 대한 공포다. 조선의 임금과 왕자들이 수도 없이 읽었을 역사 책 속 오랑캐 모습은 오로지 잔인무도함 뿐이다.

 
미녀 포사에게 푹 빠졌던 주나라 유왕은 침략해 온 견융병들에게 살해됐다. 중국의 삼국시대를 통일한 진나라는 3대 황제 회제가 5호16국 시대에 흉노족의 포로가 돼 살해됐다. 뒤를 이은 효민제도 포로가 돼 흉노 임금의 술시중을 드는 모욕을 당하고 살해됐다.
 
▲ 도르곤의 이복형이자 청나라 2대황제인 홍타이치(皇太極). 그는 병자호란에 20만의 만주-몽고-한군 연합군을 이끌고 친정해 삼전도에서 인조로부터 직접 항복을 받았다.
이제, 인조가 오랑캐들에게 항복하러 나갈 차례가 됐다. 이미 강화도가 함락돼 두 아들마저 포로가 됐으니 더이상 버틸 여력도 없었다.
 
하지만, 강화협상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조선의 외교관들은 이 무시무시한 ‘오랑캐’들이 상당히 말이 통하는 사람들임을 발견했다. 협상장에 나타난 청의 대표 용골대는 명나라와 조선사이의 외교 의전에 준거하려고 노력하는 모습도 보였다.
 
잔인무도해야할 오랑캐의 본분을 무시(?)한 이들의 면모는 뒷날 자금성 입성 때 더욱 여실히 나타난다. 명나라 황족을 몰살하기는커녕 이들은 이자성 반군의 침략직전 자살한 숭정황제의 위패를 모시고 그를 추모하면서 들어갔다. 그리고는 명황제의 복수를 명분으로 이자성 반군을 물리치고 대륙을 차지해 버렸다. 이 명분은 이후 300년의 대륙 통치가 가능할 정도로 제대로 중국 민중들에게 먹혀들었다.
 
인조의 뒷통수를 강타하는 ‘오랑캐의 반전’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 도르곤이다. 그는 병자호란 때 이미 2인자의 위상을 굳혀가고 있었다.
 
앞선 글에 밝힌대로, 인질로 잡혀가는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생각하며 인조가 도르곤에게 “가르치지 못한 자식이 따라가니 대왕의 가르침을 바랍니다” 말을 건넸다. (이렇게 자식 염려한 아비가 뒷날 스스로 세자를 헤치리라고는 도르곤도 상상치 못했을 것이다.)
 
“세자 연세가 이미 저보다 많고 일에 대처하는 것을 보니 제가 가르칠 바가 아닙니다. 황제께서 후히 대하시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세자가 가더라도 틀림없이 멀지 않아 돌아올 것입니다”라고 도르곤은 인조를 안심시켰다.
 
소현세자가 인질에서 돌아온 것은 청황제 홍타이치가 급서하고 도르곤이 섭정왕으로 실권을 장악한 직후다. 그는 정권을 잡자마자 소현세자를 풀어줬다. 인편에 다음과 같은 서신을 인조에게 보냈다.
 
“섭정 친왕(攝政親王)은 조선 국왕께 글을 올립니다. 지난날 선제(先帝)께서 생존하셨을 때에는 번왕(藩王)이 제왕(諸王)에게 선물을 주는 일이 있을 경우 반드시 선제께 알리고 받았으나 이제는 황상(皇上)이 어리시어 일체의 정무를 모두 우리들이 거들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어린 군주를 섬겨 국정을 거들면서 외번(外藩)의 선물을 받는다는 것은 매우 옳지 않다고 생각하니, 앞으로는 귀국에서 번거롭게 예물을 보내지 말기 바랍니다.”
 
미녀들을 옆에 끼고 기름진 고기를 먹으면서 항상 뇌물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오랑캐의 모습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내용이다. 이미 치세의 지혜까지 풍겨 나오는 도르곤의 국서다.
 
얼마 후 그는 산해관을 넘고 북경에 입성해 넓고넓은 대륙을 10살도 안된 어린 조카황제의 손에 쥐어줬다.
 
▲ 대청풍운에 등장한 도르곤의 모습.
 
세계사에서 가장 유명한 아시아 장수라면 칭기스칸이다. 그러나 그건 인지도에서 그렇다는 얘기다. 
 
14만의 군사력으로 300만 한가(漢家)의 대군을 제압했을 뿐만 아니라 300년을 흔들리지 않는 왕업을 이룬 건 도르곤이다. 장수로서 뿐만 아니라 통치자로서 그는 웬만한 모든 영웅을 압도한다. (병력의 숫자에서는 조선 또한 만주의 청나라를 압도했다는 사실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생소하게 여긴다.)
 
▲ 중국 드라마 대청풍운에서 청나라 8기중 최정예인 정황기 기병들이 도열한 모습.

섭정왕으로서 그의 통치를 보면, 만주족들은 상당히 오래전부터 중국 대륙을 통치하게 될 때를 연구하고 대비한 듯하다. 이민족 통치자들에 대한 거부감이 어느 정도인지를 헤아렸고 효율적인 통치와 한(漢)족 정체성의 보장이 해결책이란 해답도 미리 찾아놓고 있었다.
 
약탈만 하고 만주로 돌아가자는 일부의 주장을 일축하고 자금성의 주인이 된 도르곤은 “머리카락 빼고 모든 것을 관용한다”는 정책을 폈다. 한족의 고위직 등용 뿐만 아니라 모든 전통을 존중했다. 단, 만주식 변발은 철저하게 강요했다. 중국 대륙이란 엄청난 크기의 맹수를 변발이란 작은 고삐를 통해 마음대로 통제하는 효과를 누렸다. 19세기 서구 열강의 침략이라는 세계사의 급변이 없었다면 청나라 만주족의 통치는 300년을 훨씬 더 넘겼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로 도르곤의 얘기가 심금을 파고드는 건 이런 정치, 군사분야가 아니다.
 
도르곤을 끝도끝도 없는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만든 건 그의 생모와, 이복형, 그리고 이복형의 아내. 두명의 남자, 두명의 여자가 애증이 얽히면서 삶과 죽음을 가른 기구한 인생사다.
 
사족: 여진족 지도자들이 상당히 오랑캐 때깔을 벗었다는 점이 병자호란 때 이 땅의 민중들이 겪은 참혹한 고난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청나라는 민간 약탈을 오히려 의도적으로 활용한 측면이 있다. 당시 청군이 동원한 군대는 팔기병 뿐만이 아니다. 앞서 항복해 온 몽고의 여러 왕들과 공유덕, 경중명 등 명나라 항장들도 종군했다. 원군으로 동원한 이들의 충성심을 앞으로 명나라와의 전쟁에서도 지속적으로 보장받으려면 경제적으로 보답하는 길 뿐이다. 호란 때 특히 몽고군의 이동경로에서 더욱 처참한 약탈이 벌어진 이유다. 또한 민간의 이같은 고난은 향후 인조가 숭명주의자들에게 기울어지지 않게 묶어두는 측면도 있었다. 삼전도의 굴욕이란 말이 허황되고, 고난은 오로지 민중들의 몫이었다고 강조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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