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왕자의 난, 무인정사의 재구성 7] 실패를 다른 실패로 덮는 무리함의 귀결

<7회>

[초이스경제 장경순의 만필세상] 정도전이 무엇을 잘못 했나라는 질문은 두 가지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유학을 하는 선비로서 본분을 과연 다했느냐라는 도덕적인 질문이 하나다. 다른 하나는 옳고 그름과 무관하게 과연 정권을 가진 사람이 무슨 실책을 해서 패망했느냐다.

만필자는 대학 1학년의 교양 수준에서 유학을 배운 정도이니 첫 번째 도덕적 의미의 질문에는 답할 수 없다. 그러나 무슨 실책으로 망했느냐라는 두 번째 질문은 그간의 만필에서 계속 살펴오고 있는 것이다.


정도전, 출발에서부터 독이 든 성배를 받아 쥐었다

▲ 삼봉 정도전 표준영정.

승자인 태종 이방원의 시대에 조선의 사관들이 공식적으로 기록한 태조 실록으로만 보면, 정도전은 출발선에서 커다란 승부의 제약을 안고 있다.

방석의 세자 책봉이다. 이것은 이방원의 사관들도 정도전의 책임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배극렴 조준 정도전은 “나이와 공로로써 세자를 세울 것”을 청했지만 “임금이 강씨를 존중하여” 방석을 세웠다. 강씨는 신덕왕후로 이방원에게는 계모뻘이고, 방번과 방석의 생모다.

정도전은 다른 두 공신과 함께 적장의 원칙을 내세우기는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정성이 부족했다. 실록을 통해 이방원은 정도전에게 이렇게 따지고 있다.

“장자(長子)로써 세워야만 되고, 공로가 있는 사람으로써 세워야만 된다고 간절히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정도전의 ‘죄’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그것이 곧 죽을죄는 아니었다. 여기에는 배극렴과 조준도 연루되는데 이들 모두 방원에게 죽은 것은 아니다.

배극렴은 세자를 정한 1392년 8월20일에서 3개월 후 죽었으니 논외지만, 조준은 1398년 방원이 왕자의 난으로 정권을 잡은 후에도 조정의 수반 자리를 지켰다.


정도전 필승의 길은 둘째 영안군에게 있었다

1980년대 정통사극을 홀로 만들다시피한 신봉승 작가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정도전이 태조 이성계의 둘째 아들 영안군 방과(정종)와 손을 잡았다면 절대 패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밝혔다.

만필자도 이에 동의한다. 적장자 진안군 방우가 사라진 마당에 차자 방과를 제칠 만큼 공을 세운 왕자는 아직 없었다.

태종 이방원은 다섯째다. 묘호는 태종으로 똑같지만 개국 과정의 공로는 당 태종 이세민에 미치지 못한다.

조선 건국 시점에서의 방원은 공이 높기 보다는 이름이 가장 많이 알려진 이성계의 아들일 뿐이었다. 정몽주를 암살한 때문이다.

방원의 둘째 형 방과는 이성계 아들 가운데 유일하게 아비를 따라 종군하며 공을 세운 기록을 남기고 있다. 무난한 승계를 할 만한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말하자면, 왕이 될 천명을 받은 둘째아들 영안군이다. 이것을 방해한 사람이 아버지 이성계다. 계비 신덕왕후 강씨와 그 소생에 대한 사랑이 넘쳐나 기어이 적장계승을 저버리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이것이 방원에게 왕이 되는 길을 열어줬다. 역사가 적장의 순리를 준수하며 진행됐다면 다섯째 방원은 왕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아비의 파행이 다섯째 왕자의 패권 야심을 살려주는 밑바탕이 됐다.

거기다 방원이 등에 용의 날개를 단 것은 명과의 외교관계가 최악일 때 사신을 가면서다. 무수한 사신이 요동의 관문을 넘지 못할 때 방원은 명 태조 주원장을 만나고 막혔던 외교 길을 뚫고 돌아왔다. 더욱이 이 때 요동을 거치면서 주원장의 넷째아들 연왕 주체(훗날의 성조 영락제)를 만나 의기투합했다. 방원과 주체가 모두 정변에 성공해 등극한 후 조선과 명은 전례 없는 한중 우호를 누리게 된다.

한편, 방석의 세자 책봉도 결과적으로는 영안군 방과에게는 정치적 화를 피해가는 복을 안겨줬다. 어찌됐든, 비록 실권 없는 2년의 짧은 기간이나마 방과 또한 정종으로 임금을 지내 왕의 천명을 입증했다. 또한 그 자손들은 정치의 격변에서 안전한 거리를 두고 오늘날까지 가업을 이어오고 있다.


병권마저 쥐었다는 점이 마지막 생존 기회를 날렸다

주군이 맡긴 어린 세자를 보필하는 신하는 목숨을 다해 그를 지켜야 한다. 명나라 연왕 주체는 방원보다 4년 후 명나라 정권을 차지했다. 조카인 건문제 주윤문을 보호하던 유명한 선비 방효유에게 즉위문을 지어달라고 요청했다. 방효유는 즉위문이 아니라 “연나라 역적(주체)이 제위를 찬탈했다”는 글을 지었다. 주체는 방효유에 대한 미련을 접고 그의 ‘십족’을 멸했다.

주체는 비록 자신에게 적대행위를 한 방효유지만 그 명성을 이제는 자신을 위해 써달라고 제안했다. 과거의 적대행위 또한 건문제에 대한 충심이라는 것이다.

정도전에게는 이런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뜻밖의 기습을 받은 정도전이 오히려 정몽주 암살할 때의 우정을 되살리자 청했으나 싸늘한 대답만 돌아왔다.

방원은 “네가 조선의 봉화백(奉化伯)이 되었는데도 도리어 부족(不足)하게 여기느냐? 어떻게 악한 짓을 한 것이 이 지경에 이를 수 있느냐?”고 꾸짖었다. 이 부분은 앞선 만필에서 자세히 논했다. 투항하자는 방원의 제의를 뿌리치고 시 한 수를 짓고 의연하게 최후를 맞았다는 몇 몇 드라마의 묘사가 그 날밤의 현실성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고 지적했다.

태종 이방원은 정치적 실리 판단에 절대 예외를 두지 않는 인물이다. 정도전을 살려두는 이익이 조금이라도 죽이는 이익을 앞선다면 감정을 충분히 누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날 죽은 사람 가운데 유독 정도전만큼은 이방원이 스스로의 의지로써 목숨을 빼앗았다. 적은 병력으로 벌인 정변에서 유일한 승산은 관군의 수뇌부를 제거해야 바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도전이 군권까지 쥐고 있었다는 점은 방원에게 사소한 인정마저 베풀 여지를 없앴다. 과연 한 나라의 병권이란 것은 생과 사를 모두 지닌 양날의 검이다.


병권은 있으되 군심은 얻지 못했다

앞선 만필에서 언급했지만, 군사적 측면에서 제1차 왕자의 난, 즉 무인정사는 황당하기 이를데 없는 정변이다. 살기 싫은 사람이 아니고서야 이렇게 군사적으로 허술하게 반란을 일으킬 수가 없다.

그러나 방원에게는 용비어천가 98장의 기적을 일으킬 만큼 믿는 구석이 있었다. 주요 지휘관들이 정도전의 위세에 굴복할 뿐, 그를 매우 혐오함을 간파했다.

방원의 안목이 출중했다기보다 당시 조정의 흐름에서 이건 너무나 명백해졌다. 실효성 없는 진도 훈련을 한다며 탄핵, 체형 등 처벌의 수위가 갈수록 높아졌다.

정도전 한 사람만 사라지면 이 모든 고난의 세월이 끝날 것이 분명했다. 방원은 이런 시각에서 주요 장수들과 눈높이를 맞췄다.

경복궁의 도진무 조온이 무수한 수비병을 거느리고 이방원에게 투항한 것, 비상 호출로 대궐로 달려가던 경복궁 정예갑사 지휘관 이천우가 노상에서 소식을 듣고 바로 방원에게 가담한 것 등은 이런 군심을 보여준다.


실수를 인정치 않고 다른 실수로 덮어버리려던 패착

조선 건국의 거대한 청사진을 작성한 천재적 모습과 달리, 패망 직전의 정도전은 조급함에 쫓기는 권력자의 패하는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조선 건국의 결정적 계기가 위화도 회군이었음에도 현실을 무시한 요동정벌은 고려 우왕과 정도전을 다를 바 없는 인물로 만들었다. 오로지 세자 반대 세력을 말살하는 데만 혈안이 됐다는 비난을 초래했다.

정도전의 무리수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요동정벌 추진 만으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 어렵게 되자, 왕자들의 8도 분봉을 시도했다. 어처구니 없는 발상이다.

이미 1600여년 전에, 한고조 유방의 책략가 장량이 분쇄해 버린 역이기의 발상이다. 후대 5호16국 시대 ‘오랑캐’ 계몽 군주 후조의 석륵 또한 장량의 지혜를 격찬하고 있다.

수 천 년 전, 폐해가 지적된 계책을 정도전이 들고 나올 정도로 그는 지혜의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장수들을 매질하고 멀쩡한 나라를 제후국들로 쪼개려는 무리수들로 방원은 정도전을 죽이는 것 말고 다른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최소한 그 때까지 정도전에게 역심은 없었다

조정과 군의 민심을 잃은 정도전은 이미 보이지 않는 패배자가 되고 있었다. 그것이 1398년 8월26일 입증됐을 뿐이다.

그러나 그가 인심을 잃었다는 것은 절대 용상을 넘볼 욕심은 없었다는 증거가 된다.

곳곳의 요직에 정도전이 심복처럼 믿는 인물들만 앉혔다면 그렇게 제대로 된 전투 한 번 없이 세력전체가 패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태조 생전에 충성을 다하는 것과 그 이후는 별개다.

이성계 뜻대로, 방석이 왕위를 이은 뒤에도 정도전이 사심 없는 충신이었을 것으로 장담할 근거를 누구도 제시하기 어렵다.

나라망친 간신의 대명사로, ‘지록위마’의 고사를 남긴 진나라 조고 또한, 진시황제 생전에는 임금의 목숨을 구한 충신이었다. 연나라 자객 형가가 진시황제를 죽이려고 단검을 휘두르는 동안, 무수한 진나라 무사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 황제를 구하려는 생각보다 무기를 지니고 황제에게 접근했다는 혐의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무시무시한 자객에게 일개 환관이었던 조고가 약주머니를 집어던지며 유일하게 항거했다. 덕택에 진시황제가 목숨을 구했다.

진시황제의 카리스마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조고가 충신중의 충신이었다. 그러나 2세황제 호해의 시대에 이르러 조고는 황제를 바보로 만든 간신이 되고 곧 나라도 망했다.

정도전은 이성계가 살아있는 시대부터 세자 아닌 다른 왕자들을 견제하는 무리한 정책을 남발했다. 이것이 목적을 달성하기커녕 정도전의 반대파를 이방원 중심으로 모아주는 역할만 했다.

정도전에게 영안군 방과를 선택하는 것이 정답이라고 해도, 임금이 정해준 방석의 후견인을 버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방석의 보호자로서도 애매모호하지만 나름 지켜야할 선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드라마의 각색처럼, 이방원이 그를 살려주고자 했다면, 과연 그날 밤 방원과 생사를 함께 하는 다른 장수들이 이를 용납할 수 있었을까. 정도전 자신이 스스로의 운명을 선택의 여지없는 곳으로 몰아가지 않았는가를 살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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