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사극은 과연 역사를 어디까지 ‘요리(?)’할 수 있나.

중국의 2006년 사극 ‘대청풍운’은 국내에서도 꽤 많은 인기를 모은 완성도 높은 사극이다. 도르곤 역의 장펑이와 효장문태후로 나온 쉬칭이 남녀 주인공이지만 또 하나, 스토리 전개의 핵심 인물이 있다.

범호정이다. 그런데 이 인물은 가공인물이다. 가공인물임에도 스토리 전개의 핵심 역할을 담당한다. 범호정이 없었다면 청나라 3대 황제 세조 순치제는 도르곤 손에 죽었을 것이다. 가공인물이 역사를 바꿀 정도였는데도 왜곡이란 시비는 전혀 없고 탁월한 극본이 극찬받을 뿐이다.

사극의 장점이 이런 것이다. 특히, 실제 역사의 아쉬움을 달래줄 때 그 장점이 더욱 발휘된다.

명나라 패망 때, 많은 한족들은 명장 홍승주가 청나라에 투항한 사실에 깊은 한을 갖고 있다. 이기지는 못했어도 충절의 상징으로 남았더라면 후손들에 큰 긍지가 됐을 것이란 아쉬움이다.

그런 정서가 이 드라마에서 범호민 범호정 형제로 각색됐다. 투항 전 홍승주에 해당하는 범호민은 생포된 후 자결해 충성을 다한다. 그러나 그의 동생 범호정이 형의 충성심을 이어받아 청나라 체제에서 한족을 대변하는 명신으로 활약한다. 범호정이란 이름은 범문정이란 실제 인물과의 관련성도 나타낸다. 범문정은 한족 문신으로 청나라에 투항해 태종 홍타이지의 지극한 신뢰를 받았다.

잘 각색된 인물 구성으로, 만주족이 한족을 지배하는 이 드라마는 대부분 한족인 시청자들로부터 최고 인기를 끌었다.
 

▲ '육룡이 나르샤'의 분이(신세경)와 이방원(유아인). /사진=SBS 홈페이지.

 

SBS의 ‘육룡이 나르샤’는 사극 중에서도 ‘팩션사극’임을 내세우고 있다. ‘정통사극’들과 달리 더욱 더 파격적인 연출이 가능한 장르이므로 장면 하나하나를 역사 왜곡인지 아닌지 시비하는 것이 거의 무의미하다.

기자 개인으로는, 여주인공 분이(신세경)가 낮은 신분임에도 훗날 태종이 되는 이방원(유아인)과 어린 시절 친구의 감정을 유지하는 모습이 제일 친근감 넘치는 장면으로 아끼고 있다.

기자는 현재 이 시대 역사를 토대로 만필을 연재하고 있어서, ‘이방원이 옳았냐, 정도전이 옳았냐’는 주제의 정사(正史) 토론을 누군가 청해오면, 지금까지 원고지 500장을 쓴 것 이상의 토론에도 응할 용의가 있다. 하지만 드라마까지 모든 작품이 실록 기록에 얽매여야 한다는 주장에는 절대 반대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상식이나 국민적 기본 교양을 가지고 있는 역사를 관련한 작품인 만큼 아주 민망할 장면은 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최근, 신하들이 대화하는 몇몇 장면에서 자신을 ‘소신’이라고 부르는 듯하게 들은 적이 있다. 정말로 그랬다면, 남의 집 아저씨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망발이다. 임금이 아닌 사람들끼리는 자신을 ‘소생’ ‘시생(이 사람이란 뜻)’ 등으로 부르기는 해도 ‘소신’은 절대불가다. 임금 앞에서나 자신을 일컫는 말이기 때문이다. 너무 뻔한 상식이고 상당수 연기자들은 많은 사극 출연경력이 있어서 설령 이런 대본의 오류가 있어도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한 번도 아니고 몇 차례 ‘소신’이란 단어를 들은 듯하다. 이 드라마는 아직 임금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아서 ‘소신’이 나올 수가 없다.

홍인방을 체포하는 최영이 자신을 ‘무민대장군’이라고 칭한 것은, 감독이 괜히 더 공부해서 흠을 낸 경우다. 무민은 최영이 처형된 후 그래도 공을 기려서 받게 된 시호다. 생전에 받을 수가 없다. 더욱이 무민의 민(愍)은 죄도 있는 사람이란 뜻에서 붙인 글자다. 최영 스스로 입에 올릴 글자가 못 된다.

물론, 이런 류의 바로잡기를 ‘육룡이 나르샤’에만 혹독하게 들이댈 필요는 없다. 정통사극을 표방하는 작품들도 당시 시대와 너무나 어긋난 실수를 저지른다.

높은 완성도로 격찬을 받은 2014년 KBS 드라마 ‘정도전’에서 목은 이색이 제자들을 “몽주야” “도전아”라고 부르는 것은 이색 대감의 인품에 생각도 못할 일이다.

옛날 사람들에게 오늘날에 비해 참으로 쓰일 새가 없었던 것이 이름이다. 이름은 높은 사람앞에 자신을 낮출 때, 또는 죄를 논하는 자리에 불리어 나갈 때 정도로 쓰였다.

관례를 치른 성인을 관직이나 당호가 아닌 이름으로 ‘함부로’ 부른다는 것은 매우 무례한 일이다. 당시 감독이 시청자의 친근감을 높이기 위해 그렇게 각색한 것 아니냐는 추측은 든다.

‘당여(黨與)’라는 말도 남발의 경향이 있다. 이 말 자체는 불의한 패거리다. 유학자들의 사회에서는 붕당 결성 자체가 소인배의 행위여서 자신들의 당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도 현실적으로 정파를 언급한다면 ‘진실한 사람’이나 하다못해 ‘우리 사람’으로 쓸 수는 있어도 ‘패거리’란 낮춤말인 당여를 자신들에게 직접 쓸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낯 뜨거운 것은 다른 몇몇 작품의 ‘국본’의 남발이다. 언젠가 어느 드라마 감독이 이 말을 주워들었는지 남발되기도 했다. 마치 국본은 세자의 동의어로 다뤄서 세자 스스로 “내가 국본이다”라는 대사도 남용됐다.

그러나 실록 등에서 용례를 보면, 국본은 누구 한 ‘개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세자를 세워 대통의 흐름을 정함으로써 국가의 근본을 정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간혹 언어 구사에 제약이 별로 없는 임금의 발언이 축약돼 “세자는 국본이라”는 표현이 백번에 한 두 번 나오기는 하지만, 이렇게 남발될 단어가 아니다. “세자를 세우시어 국본을 정하소서”라는 말은 중언부언이 아니라, 앞은 개인에 대한 조치, 뒤는 그런 조치의 의미를 설명한 것이다.

세자 개인을 뜻하는 비슷한 말로 더 많이 쓰인 것은 ‘원량(元良)’인데 어쩐 일인지 몇몇 감독들이 ‘국본’은 남용하되 ‘원량’은 쓰는 적이 없다. 별로 폼이 나 보이지 않아서인가 추측한다.

외화 ‘300’에서는 고대 그리스의 스파르타인들인데도 이들은 현대 미국인들이 건들거리는 말투의 영어를 쓴다. 이것을 트집잡는 사람은 없다.

그래도 역사를 배경으로 만든 작품인 이상 분명한 한계는 있다. 길게 설명할 것도 없고 남녀 최정상의 드라마를 투입했음에도 실패로 끝난 한 작품을 생각하면 된다.

왕비가 되기 전, 처녀시절의 인현왕후를 “인현아”라고 부르는 장면에서, 많은 사람들이 “볼게 못 되네”라면서 채널을 돌려버리고 말았다. 모든 사극 감독들이 뼈저리게 되새겨야 할 교훈이다.

기발한 파격이냐, 시청자의 채널이 바로 돌아가느냐 그 갈림길은 사극 만드는 사람들이 고민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도전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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