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1988년은 한국 사람들의 ‘때깔’이 변한 때다.

1988년 9~10월의 서울올림픽을 위해 시내 곳곳의 모습을 바꾸기 위한 정책이 다방면에서 펼쳐졌다.

그러나 이런 외형적인 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민주화 제2년이었다는 점이다.

앞선 1987년 6월의 시민대항쟁으로 대통령선거 직선제 개헌이 이뤄진 것은 군사독재 정권의 종식을 의미했다. 대통령 선거에서 군출신 인사인 노태우 민주정의당 후보가 당선되긴 했지만 독재 종식과 민주화를 막지는 못했다. 노태우 정권에는 독재에서 민주정부로 이행하는 과도기를 담당하는 의무가 주어진 것이지, 군부 정권을 지속하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상황이었다.

이는 1988년 4월 총선거에서 확인됐다. 집권당이 사상 최초로 과반수 의석 차지에 실패해 여소야대 정국이 도래했다.

이러한 정치적 변화는 88올림픽이라는 외형적 변화와 함께 한국 사회를 1988년 이전과 이후로 나누는 큰 분수령이 됐다.

이때까지 민주화운동에 큰 역할을 한 대학과 지식인 사회도 변화를 맞게 됐다. 1988년 이후입학한 대학생들은 5공식 독재자의 무자비한 탄압을 겪지 않게 됐다. 공권력과의 충돌에서 무고한 학생이 희생되는 일이 간간이 벌어지긴 했지만 강제징집이나 악명 높았던 녹화사업과 같은 반인간적인 탄압은 사라졌다.

‘가장 겁 없는 88학번’은 이렇게 탄생했다. 이들은 첫학기 문무대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자 마자 교련 거부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했다. 이렇게 해서 2학년 때 전방입소 뿐만 아니라 1, 2학년 때의 교련 과목이 모두 사라졌다. 이와 함께 교련을 모두 이수한 대학생들에게 주어지던 군복무 3개월 단축의 혜택도 사라졌다.

대학사회가 민주화를 달성해야 한다는 정치적 의무감에서 다소 해방되자, 88학번 이후 세대들은 좀 더 다양한 문화적 충동을 갖게 됐다.

1987년 이전엔 철학과 문학과처럼 사변적 경향이 강한 학과의 여학생들은 한겨울에 밀크로션 바르는 것조차 ‘산업사회에 굴복’하는 것으로 여겼다. 이 때 대학에선 노동자 농민보다 더 거친 모습을 한 여학생들이 흔했다. 1988년 이후는 유독 시선 끄는 짙은 화장과 옷차림이 캠퍼스에 크게 늘어난 반면, 산업사회에 저항하는 전사들의 모습은 갈수록 줄어갔다.

하지만 시민사회의 모습은 여전히 표현을 최대한 자제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던 전통사회의 모습을 버리지 못했다.

1988년 올림픽 때 시민들은 2002년 한일월드컵처럼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와 정부가 나서서 시내 곳곳에 다양한 공연을 포함해 여러 가지 행사들을 만들었지만 외국인과 올림픽 관련 근무를 하는 자원봉사자 아니면 시민의 발길을 찾기는 힘들었다. 행사 진행자들이 시끄럽다는 이유로 관람객을 야단치는 모습도 흔했다.

정부가 특별히 만든 자리도 아닌 곳에 수십만 시민들이 몰려나와 함께 즐거워하던 2002년과는 크게 다른 1988년의 모습이다.

민주화를 이룬 직후여서 대다수 국민들의 정치 관심은 매우 높았다. 주요 선거의 투표율은 지금과 비교할 수도 없었다. 이 때는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등 이른바 3김이 맹활약하면서 자신들의 지지층을 최대한 결집시키고 있었다.

88올림픽이 끝난 직후 5공비리를 심판하는 국회 청문회는 낮부터 심야까지 하루종일 공중파를 통해 국민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청문회 영웅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부각됐던 게 바로 이 때다.

장세동 전 안전기획부장을 구체적 증거로 추궁해, 하루종일 위풍당당하던 장 전 부장이 당황하는 모습을 전 국민 앞에 드러냈다. 또한 노 전 대통령은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과 전설의 토론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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