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왕자의 난, 무인정사의 재구성 9] 왕의 깊어가는 의심... 공을 세운 장수들 처형이 반복돼

<9회>

[초이스경제 장경순의 만필세상] 고려 공민왕은 좋게 보면 중흥군주이고 나쁘게 보면 명나라 망국 군주 숭정제처럼 스스로 충신 명장을 살해한 의심의 군주다.

이런 임금이 40 중반에 시해되지 않고 60, 70살 이상을 살았다면 이성계 같은 백전백승의 명장은 갈수록 깊어가는 임금의 의심으로 끝내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 이성계(천호진 연기)가 위화도 회군을 선포하고 있다. /사진=SBS 화면캡쳐.

임금에게 의심은 필요악이다. 사람에 대한 의심은 절대 왕정에서 국정의 빈틈을 막아준다.

물론, 어느 덕목이나 마찬가지로 적정한 선에서다. 지나친 의심 또한 나라를 망친다.

이런 식의 논리는 ‘어느 정도까지 의심이 국가에 바람직한가’라는 질문의 벽에 부딪힌다. 누가 감히 정답을 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한고조 유방이 최전선에서 수도 없이 사신을 장안으로 보낸 것은 승상 소하를 의심했기 때문이다. 소하는 의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집안 장정을 모두 입대시키는 방법을 썼다. 그래도 황제의 사신이 수시로 장안에 나타나자 특단의 대책까지 썼다. 일부러 백성의 재산을 갈취해 자신에 대한 인망을 떨어뜨린 것이다.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해지면서 황제의 사신들도 점차 사라졌다.

이렇게 의심 많은 유방은 망국의 군주가 아니다. 중국사에서 서한 동한 400년의 유례없는 장수 왕조 개국태조가 됐다.

반면, 명나라 숭정제는 의심으로 망국을 앞당긴 사람이라 비난받는다. 청나라가 무서워하는 마지막 존재는 명장 원숭환이었다. 원숭환은 청나라와 싸우다 전사한 것이 아니다.

숭정제에게 체포돼 북경으로 끌려가 처형당했다. 처형방식도 잔인하기 이를 데 없어 원숭환에 대한 숭정제의 까닭 없는 의심과 적개심의 깊이를 알려주고 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명장으로 이름을 얻기 시작하던 때의 고려 공민왕은 일부에서 중흥군주의 재목이었다는 호평을 받는다. 그러나 그는 의심 많은 임금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공민왕 대에 전쟁에 나가 공을 세운 장수는 반드시 죽음을 당하는 모습이 반복된다. 1362년 홍건적의 침입을 격퇴하고 개경을 탈환한 정세운은 간신 김용의 흉계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고 전한다. 이어서 김용의 흉계에 동원된 안우 이방실 김득배도 처형됐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김용만의 모략인가, 공민왕과는 전혀 무관한 일인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김용은 다음해 흥왕사의 반란에 연루돼 목숨을 잃었다.

개별 사건의 자세한 내막과 별개로 큰 틀에서 보면 공민왕 때에 전쟁에서 공을 세운 장수는 영예를 누릴 틈도 없이 목숨을 잃고 그 장수를 죽인 사람 또한 다른 역모로 죽임을 당했다.

최소한 결과론에 있어서, 공을 세운 자는 반드시 죽여 후환을 없애는 의심의 제왕들과 비슷한 모습이다.
 

▲ 고려 공민왕(오른쪽)과 왕후 노국대장공주의 모습. /사진=뉴시스.

공민왕은 원나라로부터 완전한 국권을 회복한 임금이다. 원나라의 영향에서 벗어나고 보니 고려 왕실로서는 원나라 침략 이전의 폐단이 부활되는 것이 두려웠다. 바로 무인들의 권력 찬탈이다.

1170년 고려 의종 때 정중부와 이의방이 무신정변을 일으킨 후 1270년 원종이 강화도에서 나와 몽고와 강화를 맺기 위해 마지막 무신권력자 임유무를 살해할 때까지 고려는 무려 100년간이나 무신들이 왕권을 짓누르는 기형적 정치를 했다.

외세를 물리치고 나면 가장 먼저 의심을 해야 할 인물이 무인들이다.

무신정변 이전까지 고려는 철저하게 문신들이 무신을 통제했다. 역사에서 귀주대첩의 영웅으로 불리는 강감찬 또한 실은 문관으로서 장수들을 이끌고 전쟁을 지휘했다.

여진 9성을 정벌한 윤관도 문신이다.

이러한 문신의 무신 통제가 끝내 무신들의 불만을 일으켜 무신정변이 발생했던 것이다.

이런 역사에 비춰볼 때, 이제 막 국권을 회복한 공민왕으로서 무신들, 특히 공을 세워 민심을 얻는 장수는 의심대상이 됐다.

의심 많은 공민왕 치세에서 살아남은 두 명장이 최영과 이성계다.
 

▲ 옛 청주목 북면 금천마을의 기봉영당에 봉안돼 전해오고 있는 최영 장군 초상. 충청북도는 지난 2012년 이 초상을 충청북도문화재자료 제87호로 지정했다. 사심없는 충절의 상징 최영 장군은 한국의 민간 신앙에서도 깊은 추앙을 받고 있다. /사진=뉴시스.

두 사람이 살아남은 이유는 전혀 다르다. 최영은 훗날 그가 문하시중이 된 후에서 보여주듯 정치적 감각이 극히 적은 순도 높은 무인이다. 왕으로서 전혀 의심할 필요가 없는 명장 충신이다. 또한 최영의 출신은 고려의 오래된 문신가문이기도 하다.

이성계는 최영과 달리, 출신도 불분명하고 그 욕심의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만약 이성계가 조금만 더 고위 장수였다면 공민왕 치세에 어떤 이유로든 목숨을 잃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 또한 조선 개국의 천명이 내린 때문인지, 이성계가 치명적 의심을 받을 만큼 성장하기 전에 공민왕이 암살당했다. 1374년이다.

우왕이 즉위한 뒤론, 백전백승의 명장을 죽일 만한 지배력을 고려 왕실은 갖지 못했다.

이성계가 수문하시중이 되면서 고려 조정의 권신이 된 것은 1388년 위화도에서 회군한 뒤다.

이성계의 성장이 이런 정변을 거친 것이 아니라 공민왕 치세에서 착실히 승진을 거듭하는 과정에서였다면, 그 또한 공민왕의 의심에서 살아남기는 대단히 어렵지 않았을까.

공을 세운 명장의 최대 위협은 바로 그에게 병권을 맡겼던 임금이다. 한국과 중국사를 보면 고대로부터 최근세까지 변치 않는 정치의 속성이다.

무시무시한 권력자 밑에서 막대한 군공을 세우고 살아남으려면 두 개의 방법이 있다.

하나는 그 임금을 몰아내고 자신이 임금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용렬한 군주가 아닌 성군의 치세라면, 대부분 장수가 목숨을 잃었다. 이성계는 이미 기력이 다한 고려왕조를 근본부터 고쳐야 한다는 한국사 본연의 진보 에너지를 올라탔기 때문에 조선의 개국태조가 될 수 있었다.

두 번째는, 임금에게 절대로 야심을 품지 않을 인물임을 확신시키는 법이다. 웬만한 미사여구로는 불가능하다. 그래도 한 가지 방법은 있었다.

재물 욕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살아남은 사람이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나라의 왕전이다. 그가 섬긴 임금은 역사상 가장 무서운 임금 진시황제다.

왕전은 진의 천하통일 9부 능선에 해당하는 초나라 원정 총수를 맡았다. 60만 대군을 거느리고 출정하면서 진시황제에게 갖고 싶은 함양성내 알짜배기 부동산 리스트를 길게 만들어 건넸다.

초나라로 원정을 가면서도 수시로 진시황에게 사신을 보내 약속한 땅이 어떻게 됐는지 물었다. “너무 하시는 것 아닙니까”라는 수하 장수에게 왕전은 이렇게 대답했다.

“진나라 전군을 거느리고 있는 우리를 대왕께서 얼마나 믿을 것 같나? 내가 이렇게 재물이나 밝히는 사람이라는 확신을 줘야 우리는 의심으로부터 벗어나 소신대로 군사작전을 세울 수 있네.”

왕전은 지구전을 펼치면서 초나라를 공략해 마침내 초의 총사령관 항연은 전사하고 초왕 부추는 사로잡혔다. 개선한 왕전은 군권을 반납하고 약속한 재물을 받아 평온하고 풍요로운 여생을 보냈다.

하지만 재물 욕심을 보여준다고 누구나 다 살아남지는 못했다. 임금이 진작부터 죽이려 작정했다면 ‘백약이 무효’다. 청나라 세종 옹정제 때의 연갱요는 서부 정벌에서 개선한 직후부터 의심을 사서 끝내 정서대장군에서 항주장군으로 좌천됐다. 좌천돼서 이동하는 길에 재물을 실은 무수한 수레를 동원해 자신은 재물을 밝히고 야심 따위 없는 필부라고 간접 표현했다.

하지만 이는 황제가 그에게 ‘부정축재’의 죄목까지 씌우는 빌미가 됐다. 항주로 부임한 직후 18계급 강등으로 병졸이 됐다가 자결명령을 받았다.

결론은 역시, 임금을 섬기는 일은 호랑이와 동행하는 ‘반군여반호(伴君如伴虎)’다. 딱 부러진 정답은 없다는 것이다. 조선 사관들이 얘기하듯, 오로지 천명이 내리시어 개국태조를 보살폈다는 설명만이 정답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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