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왕자의 난, 무인정사의 재구성 10] 최영과 이성계, 주고받은 배신의 감정, 마지막 눈물에 실어

<10회>

[초이스경제 장경순의 만필세상] 조선 건국 일대기를 다룬 드라마들은 이성계와 최영이 부자지간과 같은 인간관계를 가졌다고 묘사한다.

최영은 1316년생, 이성계는 1335년생이니 19살 차이다. 그 정도 나이에 무슨 부자지간이냐 할지 몰라도, 이성계의 진짜 아버지 이자춘이 1315년생이다. 최영보다 한 살 위다. 그 시대는 정말로 19, 20 나이에 아들 낳고 집안을 꾸렸다.

하지만, 이성계가 실제로 최영을 아버지처럼 여겼다고 말한 기록을 아직은 찾지 못하고 있다.

이성계가 아버지처럼 여겼다는 실제 기록을 남긴 사람은 따로 있다. 공민왕 때의 문하시중 경복흥이다.

조선 임금이 된 6년, 이성계가 임진에 머물 때 남쪽에 경복흥의 묘가 있었다. 태조는 “경 시중은 강개 청직하고 시중 벼슬에 있어서 나를 보기를 자식 같이 하고, 나도 또한 아버지 같이 섬기었다”고 말했다.

이성계가 변방 출신의 배경 없는 젊은이로 고려 조정에 출사할 때, 경복흥 시중을 찾아갔다. 경복흥이 그의 아내와 함께 반갑게 맞으면서 환대했다. 경복흥은 “나의 어리석은 자손을 자네가 장차 비호해야 되니 행여 잊지 말기 바라네”라며 앞날을 예견한 듯한 당부를 했다.

이 당부가 조선의 태종까지 이어진 모양이다. 경복흥은 이인임 임견미 일파의 모함으로 귀양간 중에 수명을 다했지만, 그의 아들들은 조선 왕조에서 계속 우대 받았다. 경의는 평양윤을 지내다 태조 4년에 죽었고, 경보는 찬성사를 지내고 태종 11년 83세 나이로 죽었다. 두 사람 모두 사후에 조선 조정으로부터 시호를 받았다.

이성계가 고려의 장수로 출정을 나갈 때마다 경복흥은 그에게 “동한(東韓)의 사직이 장차 손안에 돌아갈 것이니 전쟁의 괴로움을 꺼리지 말고 능히 나라를 지키는 공을 이루게”라는 당부까지 했다고 한다.

아버지 이자춘이 1361년 세상을 떠난 후, 개경에 등장한 이성계의 외로운 심정을 든든하게 위로해 준 사람이 아버지같은 경복흥이었다. 이성계가 앞장 서 이인임 일파를 숙청한 장면은 이래서 더욱 의미가 깊어진다.
 

▲ 2014년 KBS 드라마 '정도전'에서 최영으로 등장한 배우 서인석. 앞선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최영이 2회 초반에 하차한 것과 달리 여기서는 중반 이후까지 등장하는 주요 인물이다. 서인석이 이성계(유동근)에게 "이것이 자네를 아들처럼 여긴 나에 대한 보답인가"라는 대사는 너무나 완벽하게 극에 녹아들었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 이성계가 아버지처럼 여겼다고 한 사람은 경복흥이다. /사진=KBS드라마 유투브 화면캡쳐.

우왕 때에 이르러, 고려군을 대표하는 ‘원투펀치’와 같은 존재는 최영과 이성계다.

고려사가 전하는 최영의 모습은 벌이 지나친 가혹함이 섞여 있다. 조선 사관들이 기록한 고려사라고 몰아붙이기에는 상당히 일관되게 이런 모습들이 드러나고 있다. 작은 죄라도 일벌백계의 죽음으로써 다스려 군의 기강을 세우는 일들이 자주 벌어졌다.

1388년, 고려가 요동을 정벌하기 위해 편성한 정벌군은 병력만으로는 그리 대단하지는 않다. 말이 10만 대군이지 실제로는 좌우군 합계가 3만8830명, 사역 인원이 1만1634명이다. 예종조 윤관의 여진 정벌 병력이 17만인 것에 비하면 매우 작은 편이다. 혹자는 이런 점에 대해 최영이 이성계를 사지로 보내려던 것 아니냐는 의심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5만여 병력이지만, 동원된 말이 또한 2만1682필에 이르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기동력 있는 공격군을 편성하면서 숫자보다도 정예함에 힘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가서 싸우다 죽으라는 군대가 아니라 정말로 싸워 이기라고 보내는 군대임을 나타낸다.

나중에 정벌군이 회군해 개경을 공격할 때, 최영의 방어군이 극도의 숫적 열세에 몰린 것을 보면 최영은 정말로 이성계가 요동 땅을 얻어 오기를 바라고 고려의 핵심 군사력을 모두 내줬던 것이다.
 

▲ KBS 드라마 '정도전'의 위화도 회군 장면은 한국 사극에서 유례없이 웅장한 영상을 남겼다. /사진=KBS드라마 유투브 화면캡쳐.

그렇다면 최영은 무얼 믿고 이성계에게 절대적 군사력을 내줬나란 의심을 갖게 된다. 그는 아마도 고려의 장병들에 대한 그의 카리스마를 절대적으로 자신하지 않았을까.

이미 70을 넘긴 고령이지만, 군의 신망은 한참 나이 이성계가 자신을 못 따라온다는 자부심도 있었을 법하다. 왕명이 더해진 자신의 지시를 정벌군이 어긴다는 건 현실 불가능으로 여긴 모양이다.

그러나 아무리 오랜 세월 자신의 손때가 묻은 고려군이라도, 사람은 죽음 앞에서 어떤 변화도 가능하다는 점을 최영은 가볍게 여겼다.

이성계에게 거듭 압록강 도강을 강요하는 모습에서 최영 특유의 통솔방식, 겁먹고 머뭇거리는 자는 본보기로 처형하면서 진군하라는 제안이 엿보인다. 이성계는 이 지시를 거부하고 군대의 방향을 반대로 돌림으로써 오히려 정벌군의 사기를 드높였다. 물론 더 이상 정벌군이 아니라 반란군으로 돌변한 뒤다.

어떤 사람은 이성계가 요동정벌의 우군도통사를 맡으면서 반란을 기획하게 된 것으로 추론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성계 또한 회군의 결단 이전까지는 딴 마음이 없었다는 유력한 근거가 있다. 4대불가론이다.

이 가운데 여름이라서 활에 아교가 풀어진다는 주장은 고려군 뿐만 아니라 명나라 군에도 해당되는 얘기다. 4대불가론을 나쁘게만 해석하려는 사람에게 “어떻게든 싸우러 가기 싫어 저런다”는 비난을 초래할 만한 것들이 섞여 있다.

이 군대를 기반으로 반란을 일으킬 이성계였다면, 이렇게 조목조목 반대를 늘어놓기 보다는 군권을 받아들이게 마련이다.

따라서 요동정벌의 가부를 두고 논란을 벌인 시점의 최영과 이성계는 두 사람 모두 고려의 충신 명장의 심정을 버리지 않았다고 본다.

두 사람이 모두 배신감을 쌓기 시작하는 건 이성계가 위화도에 진을 치고, 최영은 우왕과 함께 서경(평양)에 진출한 때다.

거듭된 회군 요청의 거부는 이성계에게 “이 많은 병사들과 함께 죽으러 가라”는 강요로 해석되기에 충분했다. 이것은 이성계의 견제와 감시를 맡았을 수도 있는 조민수를 설득하는 계기도 됐다.

조민수가 회군에 동의하기에 앞서 정벌군 진영에는 소문이 돌았다. 이성계가 친위군을 거느리고 이탈해 동북면으로 돌아간다는 것이었다. 이성계 없는 조민수 단독의 지휘는 여러 역량으로 보아 정말로 죽으러 가는 것 이상의 의미를 찾기 어려웠다. 조민수가 놀라서 이성계를 설득하러 찾아갔다가 이성계에게 회군의 설득을 당하게 된 것이다.

쏟아지는 빗속에 역병에 쓰러지는 병사들을 보면서 거듭된 회군 거부까지 겹쳐 이성계의 배신감은 마침내 고려에 반역하는 결단으로 이어졌다. 물론, 오랜 세월 이성계 내면에 잠재한 야심이 근본에 깔려있기도 하다. 더 큰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이성계의 그러한 잠재성을 키워간 것은 한국사회 변혁의 에너지가 여러 단계의 경로를 거쳐 작동한 것이다.

요동정벌군의 뛰어난 기동력을 가졌지만, 이성계는 서둘러 서경의 우왕을 따라잡으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는 “너무 급히 진격하면 필시 전투가 벌어질 것이고 그리되면 많은 사람이 죽게 된다”며 장수들을 자제시켰다.

또한 “너희들이 만일 주상 일행에게 해를 끼친다면 내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또 오이 하나라도 백성의 재물을 빼앗는다면 또한 벌을 받을 것이다”라고 엄명을 내리면서 행군 도중에 일부러 사냥을 하면서 진격 속도를 늦췄다.

요즘 스포츠로 골프에 해당하는 사냥을 하면서 일부러 속도를 늦춘 것은 최영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이성계의 정치적 감각으로 보인다. 군사적으로는 관군이 태세를 갖추기 전에 공격하는 것이 맞는다.

그러나 영토가 아닌 정치를 목표로 하는 싸움은 이와 다르다. 민심이 관건이다. 싸움을 최대한 피하는 모습으로 명분을 얻기도 하지만, 팽팽한 긴장분위기를 장기화하면 두려움에 지친 민심이 충신 역적 따지기보다 조속히 사태 해결되기를 바라게 된다.

▲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의 최영으로 등장한 전국환. 앞선 드라마 '기황후'에서의 악역 연철 대승상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고려를 필마단기로 지키려 한 충신의 모습을 보였다. /사진=SBS 홈페이지.

서경에서 급히 왕을 모시고 개경으로 이동하는 최영은 ‘내 지시를 거부하는 고려 군대는 없다’란 신념으로 살아왔다. 그에게 이성계의 회군 소식은 생애 첫 번째 최대의 배신을 겪은 순간이다.

그래도 그의 마음속에 마지막 한 가닥 믿음은 남았다. 진의 선두에 서 있는 자신을 보고 반란군 장병들이 역심을 거두게 되리라는 거였다. 이 마지막 믿음은 자신이 서 있는 숭인문과 선인문으로 반란군의 첫 번째 화살이 날아오는 순간 무너졌다.

하지만 최영은 진정으로 타고난 전사였다. 믿음이 무너진 순간 적에 대한 살기가 더욱 높아졌다. 이런 점은 최영이 정치를 하지 말아야했던 또 하나의 이유가 된다.

이처럼 승산 없는 싸움의 전쟁터가 특히 인구가 밀집한 도성이라면, 대개의 ‘위정자’는 성문을 열고 패한 자들을 최대한 살리는 타협에 나서게 된다. 그러나 최영은 오로지 한 명이라도 더 죽이고 패하는 길을 택했다.

반란군이 궁에 진입해 최영을 붙잡아 나왔다. 이성계는 “이와 같은 사변은 나의 본심이 아닙니다. 그러나 요동을 공격하는 일은 대의에 어긋날 뿐 아니라 국가를 위태롭게 하고 백성들을 괴롭혀 그 원망이 하늘까지 이르렀기 때문에 부득이 이런 사변을 일으킨 것입니다. 부디 잘 가십시오” 라고 하면서 마주 보고 울었다.

서로 배신감을 주고받은 두 사람이 마지막 순간엔 흐르는 눈물에 그간의 감정을 떠내려 보냈다.

의심 많은 고려 임금들에게 언제든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칼 위의 인생을 살아온 이성계다. 이제 그에게 군권과 정권을 포함해, 고려 권력의 51%가 들어오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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