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이 제대로 효과를 보려면 시장의 신뢰가 필수적이다.

 
고 전철환 총재가 역대 최고의 총재로 평가받는 것은 전 총재가 즐겨쓰던 “시장 친화적”이란 표현대로 끊임없이 시장과 소통하고 공감했기 때문이다. 금융시장 참가자들은 금통위 회의 열흘 전 쯤이면 이미 전 총재의 생각을 대부분 파악할 수 있었다.
 
같은 날 한강을 사이에 두고 전 총재와 진념 당시 경제부총리가 상반된 전망을 내놓을 때도 금융시장은 전 총재의 경계론에만 반응하고 부총리의 장미빛 전망을 일축했었다.
 
통화정책의 신뢰가 있어야 0.25%포인트에 불과한 금리 인상․인하가 금융 시장에 정책기조적인 힘으로 전달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은행 통화정책의 신뢰는 우선적으로 김중수 총재를 비롯한 한은 스스로의 노력이 절실하지만 한국의 경제 현실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백해무익한 정치적 입김을 배제해야 한다는 점이다.
 
금통위원들이 순수하게 물가불안의 위험성을 발견하지 못했고 국제적 완화기류에 편승해야 한다고 판단해서 내린 0.25%포인트 인하가 시장에 혜택을 주는 것이지, 한은 총재가 자리 보전할 목적이라면 1%포인트를 내려도 나라 경제만 축날 뿐이다.
 
지난 4월의 사례다. 집권당인 이한구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나서서 김중수 총재의 임기까지 거론하며 금리 인하를 촉구했다. 금통위원 개개인에게는 상당한 압박 요인이 됐는지 세 명이나 되는 위원이 금리 인하를 주장했다. 그러나 결과는 금리 동결이었다.
 
정치권의 간섭이 한은의 반발심을 초래한 흔적이 강하다. 중앙은행이 무조건 정부하고 따로 가는 걸 잘한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번 정치적 압력에 굴복한 사례를 남기면 앞으로 모든 정책이 효과를 내기 어렵다는 절박한 판단으로 한은을 몰아간 언동은 과연 무슨 이익을 가져왔는지 자성이 절실하다.
 
이제 한국은행이 통화완화 정책으로 정부의 부양정책에 힘을 보탰다. 김중수 총재가 금통위 회의 직전 자신의 발언을 뒤집는 불명예를 자처하면서 까지 꺼낸 카드다. 그는 또 한번 일관성을 무너뜨리는 처신을 남기게 됐지만 중요한 것은, 기왕의 정책에 대해 최대한 효과를 살리는 것이다.
 
 
한은이 기준금리를 인하하자마자 이한구 원내대표와 현오석 기획재정부 장관이 기다렸다는 듯이 “환영한다”고 나서는 것도 백년을 내다보는 관점에서 사라져야 할 태도다.
 
올리든 내리든 중앙은행 결정에 일체 언급을 않는 것이 좋다는 경제의 기본교훈을 굳이 깨는 태도는 개인의 존재감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로 볼 수 밖에 없다. 티나지 않게 수면 아래 얼마든 대화가 가능한데 왜 자꾸 기자 불러 모아서 마이크를 잡아야 하는가. 이런 것이 시장친화적 마인드의 부재를 드러낸다.
 
통화정책에서는 “금리를 필요할 때 언제든 올릴 수 있다는 전제 하에, 내리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얘기를 흔히 한다. 올려야 할 때 올릴 수 있다는 전제 자체가 현실적으로 극히 어려운 한국이기 때문에, 특히 정부나 정치권 관계자들의 입처신이 더욱 요구되는 것이다.

1989~1990년 발권력 남용의 사례가 10년 넘게 경제 발목을 잡았던 교훈까지 잊는다면 후손들에게 두번 죄를 짓는 일이다.
 
저작권자 © 초이스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