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대 경제대국, 국가부도 위기로 떨어지는 과정 매일 지켜보고도...

[편집자 주] 2016년 한국 경제가 위태롭다. 미국 금리인상, 중국 경제 불안, 유가 불안에 따른 신흥국 위기 심화, 한국 부채 폭증 등 우리 경제를 위협하는 요인이 사방에 깔려 있다. 이에 다시 한국 경제가 20년 전의 위기 상황으로 돌아가는 것 아니냐는 걱정이 팽배하다. 한국 경제에 제 2의 IMF 위기가 시작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이에 2016년 연중 기획 시리즈로 20년 전 도래했던 한국 경제 위기 상황을 재조명 하면서 향후 한국 경제의 현주소를 진단코자 한다. 초이스경제 장경순 편집장이 1990년대 발생한 위기 상황을 연재 칼럼을 통해 되돌아본다.

 

[IMF, 실패한 보초병의 일기. 서문] 직업을 택하는 가장 큰 원인은 누구나 뭔가는 해야 살기 때문이다. 이런 기본 전제에 저마다 각자의 특별한 의미를 추가한다.

먹고살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몇 가지 있었는데 지금의 이 길을 선택한 것에 대해 사람들은 의미를 되새기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세워간다.

이 일이 그래도 가장 해 볼만한 것이었다고 여기는 정도면 현재 자신이 가는 길에 대해 여한은 없는 것이다. 나는 지금 내가 경제기자로 글을 쓰는 것에 한 가지 이유를 더하고 있다.

반성문이다.

19년 전에 내가 좀 더 현명했다면, 일종의 경보를 낼 수도 있었지 않냐는 생각이다. 물론 그 때 내 위치가 무슨 심각한 소리를 한다고 해서 누가 들어줄 형편은 아니었다.

정확하게 말해서 19년 전이다. 많은 사람들은 18년 전인 1997년만 생각한다. 이른바 ‘IMF 외환위기’라는 것이다.

그러나 1996년 여름, 돌이켜 생각하면 우리나라는 이 때 이미 돌아가기 힘든 수렁에 깊게 발을 담그고 있었다. 그걸 매일 지켜보고 일지를 쓰던 사람이 나다.

비록 학교에서 경제나 금융이 아닌 통계학을 전공했어도, 1년여 딜링룸 경력에 이미 30을 넘은 나이와 그에 따른 판단의 깊이를 앞세웠다면 뭐가 잘못됐다는 소리를 낼 수 있지 않았을까. 일개 행원이 나라는 커녕 내가 속한 은행에 일침을 가한다는 건 터무니없는 얘기고, 그래도 내 주위 사람들한테 이대로 가면 큰일 난다고 경고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내가 좀 더 안목이 깊었다면 말이다. 그런데 전혀 그런 생각을 못했다.

 

▲ 사진 출처=TV조선-tvN '위대한 이야기'

 

1995년 9월부터 1997년 6월까지 나는 은행원 생활을 했다. 길지 않은 기간이지만 감사하게도 내가 가진 학위(스탠포드 대학 통계학 석사)가 우대받아서 출근 첫날부터 은행에서 가장 선망 받던 외화자금실의 일을 보게 됐다. 퇴직하는 날까지다.

첫 출근하던 날은 한국 경제의 자본시장 자유화 노력이 꽃을 피우던 때다. 4개월 전 스탠더드앤푸어스(S&P)는 한국의 신용등급을 AA-로 올렸다. 1997년 이후 약 18년 동안의 꾸준한 노력으로 지난해 9월15일 달성한 등급을 이미 1995년에 달성했었다는 얘기다.

1995년 한국의 활기찬 모습은 그해 연말 결산 날 밤, 은행의 들썩거리던 분위기로 기억에 남아있다. 내가 처음 본 은행의 연말 결산이었다.

지금은 무슨 도덕적 해이처럼 간주돼서 사라진 모습인데, 당시에는 일종의 은행원간 인정으로 남아있던 풍경이다.

연말 결산업무가 너무 많아서 전 직원이 대기해서 결산부서 사람들을 도와줘야 하는 것이다. 혹시 숫자가 안 맞으면 자료를 찾아서 확인해줘야 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별로 없었다. 이미 전산이 정착된 결제업무에서 오차가 날 일은 거의 없었다.

그래도 전 직원이 남은 것은, 결제부서 사람들만 적막한 사무실 지키면서 철야근무하지 말라는 정서였다. 그러나 특별히 할 일이라곤 없으니 사무실 곳곳에서 서넛씩 모여 포커를 쳤다. 은행 건물 전체가 카지노가 된 것 같이 들썩거렸다. 평소의 근무기강과는 전혀 무관한 얘기다.

2000년 이후 은행생활을 시작한 사람들은 믿기 힘든 얘기일 것이다. 이런 문화는 2000년을 전후해서 사라졌다고 한다. 연말결산 때 카드 치는 모습이 일부에 의해 ‘은행에서 도박’이라는 식으로 물의를 빚은 것도 한 원인이 됐다.

1997년, 은행원들이 국가 부도의 고통을 맨 앞에서 뒤집어쓰고 은행들이 퇴출·합병되는 피바다를 겪고 이후에도 구조조정의 압박에서 벗어날 틈이 없었다. 이런 은행업에 연말 기분 같이 나누는 옛날 정서는 점점 찾기 힘들어지고 있다.

어떻든 1995년 12월31일 밤, 은행 건물 전체의 신나는 분위기는 이제 선진국 금융에 발을 들인 사람들이 누릴 자격이 충분한 것처럼 보였다. 밤 12시를 전후해 하나 둘씩 “새해 복많이 받으십시요”라는 인사를 나누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해 연말 환율이 1달러에 775.7원이다. 1년 전에는 800원을 줄곧 넘던 것이 이렇게 내려와 있었다. 민간 연구기관에서는 “1달러에 300원 시대도 대비해야 한다”는 보고서까지 내놓고 있었다.

1달러 300원이 아니라 그 후 외환위기 때 1995원으로 치솟는 파국은 갑자기 온 것이 아니다.

시련이 닥치기 전에 한국에는 1년여에 걸쳐 단계적인 경고장이 날아왔다. 800원, 820원, 840원...

그 때마다 나는 경보를 내지 못했다. 비록 일개 은행원이었지만 외환시장 일보라는 ‘작은 미디어’를 통해 기업의 외환담당자들과 소통하고 있던 나다. 여기에 조금이라도 ‘이대로는 안된다’는 얘기를 넣을 생각을 전혀 못했다.

기자가 된 지금, 글을 쓸 때 제일 많이 생각하는 것은 “다시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때 말단의 은행원으로 보고 들었던 것들을 다시 연재하기로 한다. 내 나라가 11대 경제대국에서 외환위기로 떨어지는 1년10개월의 이야기다. 정책 당국의 핵심에 있었던 분들이 보는 현실과는 다를지도 모른다. 어떻든 금융 최전선의 보초를 서던 사람이 본 것을 그대로 옮기고자 한다.

 

[1회] 증권사 입사하니 "A4 한 장짜리 회장 어록 외워라"

 

외환위기의 실질적 진행은 21회부터 본격적으로 다뤘다. 그 이전의 내용은 한국의 금융업이 앞날의 고난을 상상도 못하고 잘 나가던 시절 풍속도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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