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개월 시차 두고 다닌 두 직장의 너무나 다른 여성문화

▲ 서울 여의도 증권가의 모습. /사진=뉴시스


[초이스경제 장경순 경제칼럼]

[IMF, 실패한 보초병의 일기. 2] 1995년 증권사 근무 시절 내가 속한 부서에 10여명의 직원이 있었다. 그 가운데 세 명이 여성이다.

여성 직원이라기보다, 그 시절 타자 치고 문서 정리하는 별도 직군의 여직원들이었다.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취직한 사람들이다. 대학을 갔으면 1~3학년이었을 나이의 이들은 평사원인 우리를 “주임님”이라고 불렀다.

유니폼을 입고 근무하는 이들은 오후 5시45분 쯤 되면 퇴근을 위해 사복으로 갈아입으러 일제히 사라지는 모습까지 학생 같았다.

유니폼 착용은 고졸 여직원들만의 의무가 아니었다.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제법 높은 직급 이하 여직원들은 모두 유니폼을 입어야 했다. 고졸 대졸 영업점 본점 영업부서 후선부서를 가리지 않았다.

사장실 비서에 꽤 맵시 있는 여성이 있었는데 이 사람도 예외가 아니었다. 어떤 동료가 아침 출근길에 사복 차림의 그녀를 봤는데 정말 굉장했다는 얘기도 했었다.

당시 증권가에 간부급 이상의 여성은 극히 드물었다. 여의도 증권가 여성은 거의 모두 유니폼을 입고 업무 출장도 나가고 점심도 먹으러 다녔던 것이다.

3개월 후 옮겨가게 되는 산업은행의 문화는 이와 상당히 달랐다. 산업은행 본점이 있던 서울 종로구 관철동 삼일빌딩에서 유니폼을 착용해야 하는 사람은 1층 영업부의 여성 텔러들 뿐이었다. 그 외는 말단 직원조차 사복 차림으로 근무했다.

산업은행에는 고졸 여직원을 채용하는 제도부터 사라져 있었다. 은행 여직원들이 예전에 유니폼 갈아입는 공간으로 썼던 곳은 그들만의 전용 휴식공간이 됐다. 차 심부름은 여전히 이들이 담당하고 있어서 부장 손님 접대용 음료수는 이 공간에 보관했다.

직장문화에서의 성 평등이 그때 어느 정도 수용이 됐지만 공공기관이 앞서고 민간기관은 여전히 과거 관행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생각된다. 여직원들에 대한 남성들의 호칭도 증권가와 산업은행은 너무나 달랐다.

지금은 어떨지 모르지만 1990년대 중반의 유니폼은 디자인부터 수동적 업무에 임하는 사람을 뚜렷이 표시했다. 이런 유니폼을 입은 여직원을 대할 때 무의식으로도 내가 더 윗사람이라는 의식을 갖게 된다.

내가 증권사를 들어간 것은 미국에서 돌아온 지 석 달 후다. 미국생활 좀 하다 온 사람들은 뭐라도 자꾸 티를 내려는 경향이 있다. 지하철이나 공공장소에서 사람들이 무신경하게 툭툭 치고 지나가는 것이 되게 거슬린다는 것 등이다.

솔직하게 몸집이 크지 않은 나는 그렇게 부딪친 적이 별로 없어서 그건 잘 모르겠다. 그러나 증권가 사방에 가득한 여직원들의 유니폼은 뭔가 되게 부조화스럽게 느껴졌다.

사람에게 저런 복종적 옷을 입히는 것도 그렇지만, 그것이 오직 여성들만의 의무라는 것이 쉽게 말해 상당히 원시적이라 생각됐다.

유니폼에 대한 작은 ‘성 평등’ 토론도 상투적인 진보와 보수 말다툼 형식이 개입된다. 변화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변화의 수혜자들부터 그걸 원하지 않는다는 논지를 내세운다.

여직원 유니폼 없애면 여직원들은 사복 비용이 늘어나서 반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같은 시기 산업은행에 근무한 여직원들 가운데 부담이 될 정도 옷차림으로 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있다면 증권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고위직 여성정도였다.

여직원부터 유니폼을 원한다는 건 새로운 걸 해 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기존 논리를 방어하려고 옹색한 논리를 갖다붙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영업점이야 고객들이 직원을 쉽게 찾기 위해 유니폼이 필요하겠지만, 본점 후선부서에 고객이 찾아올 일은 없다. 이런 곳에서의 유니폼은 누가 확실히 아랫사람이란 인식을 주는 것 말고는 다른 의미가 없다. 그것도 오직 여성에게만 강요되는 것이었다.

인간관계를 첫 대면부터 누구를 아랫사람으로 단정 지으면서 출발하면 그에 따른 왜곡이 생긴다. 물론 사람 본연의 의지가 중요한 것이지만, 제도와 형식이 분위기에 영향을 미치는 것도 분명히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여성에 대해 공격적으로 보도록 조장하는 분위기가 여의도 증권가에 존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회사 공문철에서 본 내용, 누가 여직원을 성추행했는데 아래 직원이 그 사실을 알고 격분해 그 사람을 구타했고 관련된 세 사람이 모두 징계를 받은 일은 드문 일이 벌어진 것이란 느낌도 들지 않았다.

또래 사람들이 모여 맥주 한잔 할 때는 이런 뒷얘기들이 단골 화제였다. 어느 회사에서는 차장이 실적이 너무 좋아 부장 앞에서 기고만장해도 부장이 아무 말 못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 차장이 복사하는 여직원 몸을 슬쩍 건드리고 가더라는 것이다. 나중에 직원들 회의에서 이 얘기가 나왔는데 마침 차장은 없었고 부장은 듣기만 했었다고 한다.

술 한 잔 하는 자리에서 입심 좋은 사람이 지어낸 얘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느낌으로는 그런 직장분위기가 도사리고 있을 가능성은 충분해 보였다.

우선 여성에 대한 존중의 자세라고는 정말 찾아보기 힘들었다. 아무개 씨라는 호칭은 열 번 중에 한번이나 나올까, 그냥 “아무개 야”라고 불러댔다. 이런 모습은 산업은행에 옮겨간 후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증권사 생활이 나의 첫 사무실 경험은 아니다. 1987년 6월부터 1988년 11월까지 서울올림픽대회조직위원회 기자촌국에서 군지원요원으로 일했었다.

기자촌국 4개과에 ‘타자수’로 분류되는 여직원들이 있었다. 나하고 비슷한 또래의 여성들이었는데 고교 졸업 후 바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서기관급인 과장들의 비서 역할도 겸했는데, 직원들이 이들을 이름만으로 부르는 일은 있을 수도 없었다. 지금은 사라진 “미스킴” “미스리” 등이 쓰이던 시절이다.

이런 호칭이 수동적 여성을 의미하고 영어에서도 Miss가 Ms. 로 대체되는 등으로 인해 미스킴 미스리가 오늘날 사라졌지만, 이 또한 함부로 이름을 부를 정도의 무례함에 비할 만큼은 아니었다.

직장생활에서도 딱딱한 말투보다 형동생처럼 지내기를 좋아하는 분위기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함께 웃고 함께 울면서 벽이 없어진 사람들 사이의 반말과 일방적인 우열이 존재하는 속에서의 반말은 전혀 다르다. 대형 금융프로젝트를 맡아 수개월간 함께 야근하면서 저녁밥을 같이 먹어야 했던 ‘야전의 동지’에게 형이라 부르고 반말하는 것과 오후 5시 반 먼저 옷 갈아입고 퇴근하는 어린 아가씨들에게 함부로 반말하는 자세는 절대 같을 수가 없는 것이다.

증권사 시절 내 기억에 세 아가씨가 모두 김씨였다. 한 번도 이들을 “아무개야”라고 부르지 않았다.

같이 근무했던 분들이 교양이 부족하거나 학식이 부족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이들은 그저 증권가에 강하게 퍼져있는 분위기에 맞서지 않은 것이라 여겨진다.

솔직하게 나 혼자 여직원들한테 매번 “김 아무개씨”라고 부르는 것도 시간이 오래되면 좀 눈길 끄는 일이 될 듯싶었다.

매사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는 내 천성에 이 곳의 문화가 이런 데는 ‘돈 많이 버는 것이 최고’라는 생리 때문일 것으로 여기려고 했다. 다만, 내가 오래 지내기에는 너무나 불편한 곳이라고 여기게 됐다. 내가 지금 있는 자리도 여기에 더 맞는 사람에게 내주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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