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 게으른 생활을 누리던 2년전, 대학시절 선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년 교수님이 정년퇴직하신다.”
 
나도 한번 외국가서 공부해 보고 싶다고 두번이나 태평양을 왔다갔다 하면서 박사 공부는 아예 등록금에다 생활비 지원받았다고 큰 소리쳤었다. 그러나 공부체질이 박사할 정도까지는 아니어서 1년 만에 짐 싸갖고 돌아오니 찾아 뵐 면목이 나지 않아 흘려보낸 세월이 16년이었다.
 
더 이상은 체면만 따질 계제가 아니어서 전화로 묵은 인사를 드리고 출근하시는 길 지하철 역에서 뵙기로 했다. 스승의 정년퇴직이 무서운 이유는 그 때까지 내가 이룩한 게 없다는 자각이 들기 때문이다.
 
개찰구로 사람들이 몰려나오고 한눈에 봐도 선비풍인 자그마한 노인 한 분이 걸어나왔다... 는 것은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흔히 연출하는 장면이고, 당연히 현실은 드라마와 달라도 한참 다른 법이다.
 
헬멧에 자전거를 번쩍 들고 내리는 분이 64세의 옛 스승이었다.
 
대학교 3학년 때인 1986년, 내가 다닌 학교에서 중간고사 거부 시위가 있었다. 전두환의 5공시대였다. 마침 대통령직선제 개헌 운동이 본격화돼 전국 곳곳이 반독재투쟁의 현장이었다. 대학은 특히 모든 투쟁의 최전선이었다.
 
중간고사 거부의 직접적인 원인은 또 다시 자행된 강제징집이었다. 전방 입소 교육을 거부한 12명의 학생에게 입영 영장이 떨어졌다. 평소 데모하지 않는 학생들의 분노까지 극에 달해 전교생의 시험거부로 이어진 것이다. 특히, 2년 전 입학 직후 5공 정권의 강제징집으로 6명의 학생이 사망한 사실로 대한민국의 그 때 현실을 뼈저리게 학습한 우리 세대다.
 
상대 6개 학과 중에서 가장 시국 문제에 둔감했던 통계학과지만 이 때 만큼은 동참해 시험장이 아닌 곳에 모였다가 스크럼을 짜고 노래를 부르면서 전교생 집회장으로 향했다. 언덕길을 내려가는데 교수 한 분과 마주쳤다. 조금 전까지 시험장에서 우리를 기다리던 담당과목 교수였다.
 
시험 봐야 될 녀석들의 행렬을 보더니 언덕길 한복판에서 울화통이 터진다는 듯한 한숨을 땅바닥에 토해내셨다. 우리 대열의 스크럼은 자동적으로 슬그머니 해제되고 발걸음도 멎었다. 연배의 어른들보다도 우람한 교수의 체구는 이날 더욱 굉장해 보였다.
 
“야. 3학년만 다 따라와.”
 
한마디에 우리는 풀이 죽어 근처 강의실로 들어갔다. 거기서 시험을 다시 본 건 아니다. 일종의 즉석 토론이 사제 간에 벌어졌다. 데모를 많이 하는 학교라서 정권이 학교 운명까지 위협한다는 최근 분위기를 전하며 자제하라는 당부가 있었고 몇 몇 친구들은 평소와 다른 용기를 내서 감히 반론도 제기했다. 출석부를 부르면 한 두명 정도는 늘 시국 수감중인 사회학과와 크게 다른 통계학과에서 이런 토론 자체도 매우 이례적이었다.
 
결론 없는 토론이 끝났지만, 대부분 집회까지 참석할 기세는 사라져 귀가 등 각자의 갈 길을 찾아 학교를 떠났다.
 
이틀 쯤 지나, 학교는 5공 정권 최초의 휴교령을 맞았다.
 
3일 휴교가 끝나고 거부했던 중간고사는 다시 치러졌다. 정치는 정치고 학교는 학교대로 돌아가는 듯 하던 어느 날 등교길, 대자보 앞이 상당히 부산했다.
 
교수들의 시국성명서였다. 정보 기관이 미리 첩보를 입수하고 상당한 반대공작을 펼쳤다고 하는데 마침내 우리학교와 한신대, 고려대 교수들이 방해 공작을 뿌리치고 뜻을 모았던 것이다. 교수 시국선언은 곧 전국 대부분 대학으로 확산됐다. 이러한 지식인 운동은 ‘겁날 게 없다’던 군사정권을 억제하는 큰 효과를 가져왔다. 바로 다음해인 1987년 6월 항쟁에서 저들이 또 한번의 무력진압을 꿈꾸지 못한 국민적 저력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성명서 내용이야 익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고 중요한 건 어떤 분들이냐는 것이었다. 장을병 심윤종 등 개혁성향 교수들 성함이 즐비한 가운데 단연 한 분이 통계학과 학생들 눈길을 잡아 끌었다. 지난 주 스크럼 행렬을 단신으로 해산시킨 바로 그 분, 허문열 교수였다.
 
수업 직전, 의견이 분분했다.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도 있나” “잘못 알고 서명한 거 같다”는 수다가 이어지다 교수께서 들어오셨다. 민주화 촉구 서명을 한 교수의 바로 다음 수업 시작 때는 학생들이 박수를 치는 관행이 있었다. 갈채를 보내는 학생들의 표정에는 ‘지금 맞는 박수를 치고 있나’는 의구심도 일부 담겨 있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데모하는 학생들에 대한 한마디 쓴 소리가 있었지만 분명한 것은 두가지였다. 첫째, 알고 서명한 것은 맞다. 둘째, 이 분 생각은 하나도 달라진 것은 없었고 본래 의도와 다른 행동도 전혀 없었다는 것.
 
나는 학생운동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었지만 그렇다고 공부를 잘하지도 못했다. 좀체 딱딱한 통계학에 재미를 붙이지 못하니 맨날 관심은 학교 바깥의 동아리에 집중됐다.
 
과락(F)난 과목도 많고 심지어 학사경고도 한번 경험했다. 한시간 내내 칠판에 적은 노트를 외워야 하는 교수가 계셨는데 이 분 과목은 도저히 맥락을 파악하지를 못했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유독 허문열 교수의 과목에서는 A B 학점이 나왔다. 이 과목들은 시험때도 책을 보면서 하는 ‘오픈북’ 테스트기 때문에 암기는 전혀 필요가 없었다. 수리통계 또는 전산 관련 과목들이었다.
 
허 교수께서는 간혹 나한테 “너는 공부좀 하는 줄 알았는데 왜 학사경고 받고 그러냐”고 질책하곤 했다. 따끔하긴 하지만 잠재력을 일깨우는 말씀이니 감사히 여기고 가던 길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지 말자는 계기로 삼았다. 이렇게 지내다가 병역을 마친 4학년 한 해의 심기일전(개과천선이라고도 한다)이 겹쳐, 선동렬 방어율을 다투던 내가 대학원을 가서 지도교수로 모시고 또 유학가볼 엄두까지 내게 됐다.
 
학부시절을 개판으로 보낸 사람이 유학을 갈 때 문제가 되는 게 추천장이다. 그냥 지구상에 대학 간판만 달고 있는 곳을 찾아가는 거야 문제가 아니지만, 나름 좋은 학교 욕심을 내서 이런 곳 추천장 받으려면 참으로 얼굴이 두꺼워져야 한다.
 
추천장을 쓰시는 분 입에서 “야 너도 여기 가냐”라는 말이 나오면 내용은 볼 수 있어도 보고 싶지 않게 된다.
 
내가 꼭 가고 싶었던 학교 추천장을 들이밀자, 허문열 교수께서는 느닷없이 책상에 있던 웹스터 사전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구체적인 내용이라야 설득력이 생기니 그에 딱 맞는 어휘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공부도 못하는 놈을 끊임없이 동기부여해서 이런저런 세상 구경을 하며 오늘에 이끌어주신 분이 강단을 떠난 지 벌써 두 해가 지났다. 이런 경우 드라마에서는 인삼제품을 사들고 연로해진 스승을 찾아가곤 하지만, 드라마는 역시 드라마, 현실은 전혀 딴판이다.
 
우리 스승께서는 지금 페이스북 담장을 올 여름 유럽 자전거 여행 계획이 담긴 지도로 채워놓고 계시다.
 
이렇게 강건 활달하신 모습을 자꾸 강조하는 것은, 스승이 아직 건장하시니 나는 조금 더 개판 칠 여유가 있다고 강변하려는 심보인지도 모르겠다.
 
저작권자 © 초이스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