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경제 장경순 경제칼럼]

▲ 산업은행은 1995년에는 서울 관철동 삼일빌딩에 본점을 두고 있었다. /사진=네이버지도.


[IMF 실패한 보초병의 일기. 4] 산업은행 면접 통지를 받은 것은 증권사를 출근한지 2주일 쯤 됐을 때로 기억된다. 점심을 이용해서 겨우 시간을 맞춰서 면접을 오게 됐다.

은행권, 특히 산업은행의 직제가 다른 금융기관과 매우 다르다는 것을 면접에서부터 알 수 있었다. 대개 면접에서 실무진이 아닌 고위간부 면접 때는 임원이나 사장단이 면접관이었다.

H그룹의 경우 1차 면접 때, 꽤 나이 들어 보이는 분이 면접관 한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2차 면접 때는 이 분이 말석에서 질문도 안하고 다른 분들과 우리들 간의 대화를 열심히 기록만 하고 있었다. 아마 인사담당 부서장이 아니었나한다.

산업은행 고위간부 면접은 부총재보 한 분과, 부장, 부부장 이렇게 진행됐다. 부장과 부부장이란 직급은 다른 회사에서는 실무진 면접에 나올 분들이다. 그러나 산업은행의 이분들 나이는 증권사 임원들과 비슷하거나 더 위였다. 김완정 부총재보, 허종욱 인사부장, 이윤우 부부장이었다. 김 부총재보와 허 부장은 석 달 후 내가 출근했을 때 부총재, 부총재보로 승진해 있었다. 이윤우 부부장은 나중에 산업은행 부총재도 지냈다. 통계학 등 금융공학 관련 인력 채용을 주도하신 분이 이윤우 부부장이었음을 나중에 알았다.

그 무렵, 나는 많은 면접을 보고 다녔다. 지금하고 다른 한참 나이 때고, 청년실업 문제는 거의 없던 시절이라 면접 성과는 꽤 좋았다. 미국에서 공부할 시간에 TV도 열심히 보고, 짧은 영어에도 저녁식사 클럽에 매일 참석해서 한 구석에서 못 알아듣는 대화에도 열심히 끼어들었더니 우선 얼굴 철판이 상당히 두꺼워진 듯 했다. 거기다 영어는 실력보다 기선 제압하는 요령이 출중해진 모양이었다.

앞선 H그룹 면접 때는 국내 초일류 대학 출신자들하고 같이 들어간 영어면접에서 10점 만점이라면 2~3점은 더 얻었겠다는 느낌까지 받았다. 물론, 생각나는 대로 닥치는 대로 쏟아 내다보니 ‘accident’와 ‘incident’를 구분 못했음을 나중에 깨달았다. 하지만 같이 면접을 본 사람들이 너무 얼어있었다. H그룹은 나중에 산업은행 출근할 때까지 출근 권유를 했다.

두어 군데 회사에서는 아버지 고향이 개성이라고 하니, 나한테 개성 말투가 좀 있다고 하는 얘기를 들었다. “이렇게 했더랬습니다”라고 얘기한 것을 두고 하는 말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 분들의 그런 얘기가 내 점수에 보탬이 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개성사람들의 인상이 세밀히 따지고 꼿꼿한 ‘딸깍발이’라고 하지 않는가. 친우관계에서는 좀 피곤한 것이다.

이런저런 면접을 다니다보니, 이 연배의 어른들한테는 어떤 것이 통하는 것인지를 터득하게 됐다. 사실 전적으로 바람직한 얘기는 아니다.

산업은행 고위간부 면접에서는 다른 곳에 비해 면접관들의 말씀이 많은 편이었다. 어찌 보면 만만하게 보일 수도 있는 상황인데, 거기서 면접자들 실수를 유발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유독 한 분, 절대 편해 보이지 않는 표정을 가진 분이 있었다. 김완정 부총재보였다. 1년 후, 산업은행의 부총재로서 김시형 총재와 함께 한보그룹에 대한 추가 대출을 막게 되는 분이다.

저 연배에 어떻게 저렇게 인상이 귀한 분이 있을까 싶으면서도 깐깐한 표정을 가진 이 분은 하필 나한테만 꽤 난처한 질문을 던졌다. 나한테만은 아니고 나하고 또 한 사람 통계학을 전공한 사람이 있었다. 우리 둘에게 김 부총재보가 질문을 했다.

“우리는 사실 채권장삽니다. 그런데 통계학을 하신 분들이 채권에 대해 뭘 안다고 우리 은행에서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솔직한 내 느낌은, 김 부총재보는 통계학 인력 채용에 비판적이 아니었을까 라는 추측을 지금도 하고 있다. 그 때 질문의 어감도 나한테는 “어디 한번 좋은 대답 해봐라”라는 차원이 아니라 그냥 “네가 뭘 할 수 있겠니”라는 한탄 같았다.

이럴 때 가만있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후자의 한탄인 경우라면 이미 정해진 결과에 상관없는 넋두리 일 수 있지만, 설령 그런 경우라도 앞으로를 위해서 이런 계기를 활용하는 것이 나의 천성이었다.

“제가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에서 군복무 할 때는 주로 문서 복사를 많이 했습니다. 그 때 복사한 문서들을 맞춰보고 하면서 부서 업무를 많이 익혔습니다. 어디서든 처음에는 어깨너머 배우는 자세로 다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주어진 질문에 맞는 대답을 한 것은 아니다. 만약 부총재보의 우려에 그 때 가진 지식으로 정확하게 대답을 하려 했다면 블랙슐즈 모형을 얘기했어야 한다. 미국에서 마지막 학기 박사 레벨 확률론을 들을 때 옵션 가격을 정하는 블랙슐즈 모형이 연습문제로 한 번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과목 자체가 너무 어려워서 들어본 수준 이상은 알고 있지 않았다.

이 자리는 신입행원 채용 면접도 아니었다. 전년에 이어 두번째라고 하지만 산업은행이 유례없이 학력을 경력인정해서 채용하려는 자리였다. 인성을 내세우기보다 얼마나 준비된 프로인가를 보여줘야 마땅했지만, 사실 나는 그 때 금융에 대해 정말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지금 다니고 있는 증권사보다는 여기가 좀 더 ‘국가적’이라는 추상적인 생각 뿐이었다.

엉뚱한 대답을 하니까 김 부총재보는 씁쓸한 표정을 하고 넘어갔다. 이런 식의 대답을 처음 듣는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이 때 내 대답으로 점수를 좀 더 얻었다고는 하는데 이미 나를 채용하려던 분들의 입장을 편하게 해 줬다는 의미 일지도 모른다.

간부들 면접에 앞선 실무진 면접에서도 뜻밖의 원군이 있었다.

대리에서 과장으로 승급(당시 은행 인사적체가 심해서 대리가 연수를 채우면 자동으로 과장으로 호칭이 바뀌고 있었다.)한 분들의 면접인데 간부 면접에 비해서는 상당히 면접장이 활기찼다.

한 분이 나한테 “블랙잭에서 어떻게 하면 승률 높이는지 알아요?” 라고 물었다. 다른 면접관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실없는 질문한다는 의미였다.

나는 원래 친구들의 포커는 물론 고스톱에도 끼질 않는다. 집들이를 가면 나는 할 일이 없어서 그 집 애하고 놀아주거나 TV만 보다 오는 일이 많다.

그런 내가 원래대로면 블랙잭을 알 리가 없겠지만, 이건 정말 통계학이 나를 살려줬다.

학부 마지막 학기에 김성주 교수가 강의하는 시뮬레이션 과목의 마지막 과제가 블랙잭 전략을 프로그램하는 것이었다. 버클리에서 수학한 김성주 교수는 직전 학기 학사경고를 맞은 열등생도 수업에 몰입되게 하는 명 강의를 했다. 나도 한번 유학 가보자는 의욕을 갖게 된 것도 김성주 교수 강의를 많이들은 데 상당한 이유가 있다.

김 교수께서 과제를 내주면서 블랙잭에 관한 이런 저런 얘기도 들려줬었다. 그 얘기를 그대로 면접관들에게 반복했다.

“과제로 한번 해봤는데, 프로그램을 정확히 짠 건지는 모르겠지만 40% 승률도 나왔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요, 미국에서 블랙잭 승률이 50%를 넘는 사람이 세 명이 있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은 도박장이 합법적으로 입장을 거부할 수 있다고 해요.”

면접관들이 “우문현답이네”라면서 질문자를 쳐다봤다. 질문한 사람은 민경진 과장, 지금의 산업은행 부행장이다. 민 과장은 질문을 던져놓고 체면 깎이는 일을 했나 싶었는데 답변 덕택에 전화위복이 됐다고 한다.

점심시간을 틈타서 도망 나오듯 치르는 면접에 회사 돌아갈 생각에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가고 있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면접 진행자들에게 나는 이제 그만 돌아가 봐야 될 거 같다고 얘기했다. 고위 간부 면접 시간을 앞선 그룹으로 당기고 건강검진은 다음날 별도로 받기로 하고 그대로 면접을 진행했다. 그러고도 회사로 돌아오니 두 시 반은 된 듯 했다. 사무실의 부장 과장께서 못 본 척 하는 것이 무척 송구했다.

다음날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동원돼서 점심시간을 이용해 나를 데리고 신체검사장을 다녀왔다. 이것도 상당히 시간을 잡아먹어서 이날도 한 시가 훨씬 지나 사무실에 돌아왔다. 부장께서 이 날 만큼은 뭔가 주의를 주시는데, 그 조차 상당히 배려하는 듯 했다. 뭔가를 알고 저러시는가 싶었다.

산업은행 면접에서 잠깐 마주쳤던 또 다른 통계 전공자가 있다. IMF와는 무관한 것이지만 나로서는 상당히 의미심장한 사연으로 여기게 됐다. 다음 이야기의 말미에 이 사람과의 인연(?)을 간략히 소개한다.

 

[5회] 나 때문에 떨어진 사람, 나를 떨어뜨린 사람

[3회] "명동에서 볼품없는 노인 함부로 무시하지 마라"

 

 

저작권자 © 초이스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