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곳 면접장에서 얽히고설킨 인연(?)

[초이스경제 장경순 경제칼럼]
 

▲ 2005년 한 대학에서 열린 면접 실전체험의 모습. (기사 내용과 무관함.) /사진=뉴시스.


[IMF, 실패한 보초병의 일기. 5] 취직 잘 되던 시절 얘기를 하니 당연히 좀 잘난 척한 결과가 됐다. 특별히 잘난 것 없는 사람이 잘난 척했으니 못난 시절 얘기도 해서 균형을 맞춰야겠다. 그래서 시간 흐름에서 잠시 벗어나 산업은행을 물러난 뒤의 일을 얘기한다.

원래 이 시리즈는 1997년 국난에 앞선 1995~1996년의 교훈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또는 그 시대 풍속도를 남겨두기 위한 것이다. 글 쓰는 사람의 자서전 비슷한 목적이 절대 아니다. 자서전 같은 것을 쓸 만한 사람도 못 된다.

이번 얘기는 어찌 보면 개인사로 여길 수도 있겠지만 남들에게도 생각해 볼 여지가 있는 사연이라 생각돼서 소개한다. 

미국에서 공부를 한 것은 두 차례다. 산업은행 가기 전과 산업은행을 그만 둔 후다. 전자는 산업은행에 해외석사로 입행하게 된 자격을 줬고, 후자는 은행 그만 다니는데 좋은 핑계가 됐다.

먼저 유학 때는 미국 서부의 학교에서 공부도 열심히 해 석사학위를 받았지만, 두 번째 유학은 동부에서 거의 한 일도 없이 1년간 이것저것 구경만 하다 왔다. 나는 두 번째 미국 학교에 대해서는 내 학력 란에 절대 언급하지 않는다. 경력 란에만 소개한다. 공부는 안했지만 연구조교로 매달 급여도 받고 세금환급도 받았었다.

덕택에 학비는 들지 않았는데, 이 또한 지금도 마음의 짐이다. 학업을 뒷받침해 주신 지도교수에게 죄송한 마음이다. 또한 한국 학생의 학업이 부진하면 그 학과는 한국 학생을 뽑는데 더 엄격한 잣대를 적용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어느 정도 사실일지 모르지만, 평생 후학들에게 보상해야한다는 책임감을 버릴 수 없다.

제대로 공부를 못한 것은 마음이 딴 곳에 있는 사람인 것을 나 스스로 알았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다. 네 살이 더 어렸을 때인 먼저 유학 때는 이런 생각 없었는데 2년 직장생활도 해 보고 나름 이런저런 세상에 대한 관점을 갖다보니 ‘고기 맛’을 봤던 모양이다. 학교에 도착한 첫날 학과 사무실 벽보에 괴상한 수식이 가득한 논문 초고를 보는 순간 답답한 기분이 가득했다. 생소한 것을 처음 봐서가 아니다. ‘이런 거 또 하러 왔구나’라는 뒤늦은 실감 때문이었다. 1990년대 중반 2년 동안 미국 학교생활도 크게 변해서 PC실이나 터미널실에서 한국 주요일간지를 모두 읽을 수 있었다. 내일 제출할 숙제는 저리 처박아두고 한국 신문의 모든 기사를 읽고 또 읽으면서 시간을 흘려보냈다.

이렇게 해서 집으로 돌아온 나는 4년 전 웬만한 면접을 평정(?)하던 내가 아니었다. 서류를 제출해도 면접오란 전화조차 걸려오지 않았다. 아직은 ‘글 쓰는 일’을 뚜렷이 생각 못하고 여전히 금융기관 위주로 응시하고 있었다.

금융 분야 국가기관에서 면접 연락을 받았다. “이번에는 분명히”라는 회심의 자부심으로 면접장에 들어갔다. 기관장이 몇몇 간부와 직접 면접을 진행했다.

내 소개를 하면서 어느 학교를 나오고 뭘 했는지 소개를 하는데 웬 시선을 느꼈다. 함께 면접을 보는 지원자 하나가 나를 쳐다보는 것이었다.

이번엔 그 사람이 자기소개를 했다. 어디 학교에서 통계학을 공부했다고 얘기하는 순간 나도 알아차렸다. 이 사람 전에 만났었다. 산업은행 면접장에서다.

4년 전, 김완정 부총재보가 “통계학을 공부한 분들이 우리 같은 채권 장사에 대해 뭘 알겠습니까”라고 얘기하는 것을 함께 들은 사람이다.

산업은행 면접에서 이 사람과 내가 한 자리를 놓고 다툰 것은 아니다. 그러나 통계학 석사 둘이 있었다는 점에서 분위기가 좀 그렇게 흘러갔었다. 산업은행에 출근해보니 그는 보이지 않았다.

그와 내가 상대의 학력 같은 사항에 대해 이렇게 시간이 흘러도 또렷이 기억하는 건 산업은행 면접 때 이에 대한 질문이 좀 많았기 때문이다. 그도 미국에서 20~50위권 대학에서 통계학 석사를 했는데, 그 학교 통계학 순위는 10위권에 들 정도로 경쟁력 있는 곳이었다. 만약 산업은행이 아닌 통계학 관련 기관 면접이었다면 내가 더 우위에 있다고 장담하기 어려웠다.

결과적으로 그 때는 내가 이긴 모양이 됐지만, 지금은 분위기가 정반대임을 깨달았다. 기관장이 그에 대한 면접지를 체크하는 것을 힐끗 보게 됐다. 모든 항목이 만점으로 돼 있었다. 이런 분위기는 ‘행간의 많은 것’을 설명해준다.

면접을 마치고 나와, 처음으로 그와 인사를 나눴다. 그는 증권사를 다니고 있었다. 면목이 좀 없었다. 기왕 이렇게 그만 둘 산업은행, 그 때 내가 지원을 안했다면 이 사람은 어떻게 됐을까 생각을 안 할 수 없었다.

집을 나설 때는 “이번만큼은”이라며 든든하게 나섰지만, 이번에도 아닐 것 같은 이유가 가득해서 돌아왔다. 과연 결과도 그랬다. 나한테 약간 짓궂은 면이 있는지, 그의 명함에 있는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봤다. 예상대로 “퇴사하셔서 안계십니다”라는 대답을 들었다.

이번에는 내가 진 것이다. 떨어진 건 아쉽지만 뜻밖의 소득이 있다고 생각됐다. 그 동안 세월, 본의 아니게 내가 빚을 진 것 같은 입장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번엔 그 사람이 이겼다는 것을 그도 알게 됐으니 이제 피장파장 아닌가. 맞은 사람이 발 뻗고 편히 잔다는 경우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개인적으로는 돌이켜볼 여지가 많은 일이었다. 학교를 막 졸업하고 이력서의 학력 등이 우선시되는 경쟁에서는 내가 이겼다. 그러나 다음번, 경력을 갖춘 사람으로서 만난 경쟁에서는 내가 졌다.

모 일간지 창간에 합류해 언론계에 입문하기 직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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