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경제 장경순 경제칼럼]

▲ 1984년 전두환 정권이 학원자율화 정책을 실시하면서 경찰이 시위진압때도 교내 진입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2학기 서울대생들이 중간고사를 거부하자 6000명이 넘는 경찰병력이 서울대 교정으로 진입했다. 사진은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집회가 자주 열린 서울대 아크로폴리스 광장의 2010년 모습. /사진=뉴시스.


[IMF, 실패한 보초병의 일기. 6] 1995년 6월 한 달을 다닌 증권사는 원래 9월 산업은행으로 옮기기 직전까지는 다녀볼 예정이었다. 노느니 현재의 직장이 어떤 곳인지 좀 더 알고 옮길 것인지 결정하는 게 현명한 일이다.

그러나 6월말 갑자기 그룹의 전체 신입사원 연수에 참가하라는 연락이 왔다. 한 달 가까이 걸리는 연수였다. 몇몇 동기는 신입사원들하고 한데 모아 교육받으라는 게 불만인 듯했다.

사실, 나는 이런 연수를 싫어하지는 않는다. 서너 살 어린 친구들 틈에서 형 대접 받고 어울리면서 사무실 실적 의무에서도 벗어난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나중에 산업은행으로 옮긴 뒤 그해 신입행원들하고 연수를 매우 재미있게 받기도 했었다.

하지만 인간적으로, 그리고 도의적으로 생각해 볼 일이 있었다. 만약 내가 8월 그만두게 된다면 연수 받으면서 월급만 받다가 나가는 것이다. 이렇게 처신할 바엔 두 달을 다시 노는 게 더 올바른 일이라고 생각했다.

연수 입소 전날인 일요일 저녁 과장께 전화를 드리고 찾아뵙겠다고 했다. 과장은 “왜 오느냐”고 구박을 하다 집 앞 커피숍으로 오라 했다. 나를 보자마자 과장은 대뜸 “왜? 그만두려고?”라고 물었다. 노는 날 굳이 찾아오겠다는 것 아니면 그간 한 달간 행적이 이렇게 보이기 충분했던 모양이다.

다음날 사표를 들고 회사로 가니 부장은 창밖을 보고 있었다. 전날 과장의 보고를 받았을 텐데도 “왜 연수 안가고 회사로 왔어?”라고 시치미를 뗐다. 기대를 걸어주신 분한테 죄송할 뿐이라 다른 데로 옮겨간다고 차마 말을 못하고 공부를 더 하려고 한다고 말씀드렸다.

이것도 거짓말인줄 대충 짐작하신 분들이지만 부장은 “지금도 아주 늦은 건 아니니 택시를 타고 연수장으로 가는 게 어떠냐”고 권유했다. 이 말씀도 사람 참 미안하게 만들었다. 과장은 농담을 섞어 “어디 다른 회사 가 있다는 소리만 들려봐. 내 쫓아가서...”라고 엄포를 놨다. 과장은 연배의 직장인치고는 여전히 학생 같은 순진한 구석이 많은 분이었지만, 내가 입사했을 때 부장으로부터 집중 훈련 지시를 받은 것 같았다. 겁도 많은 분이 유독 나한테만 이런저런 잔소리를 한 달 동안 지속했다.

이렇게 해서 처음 출근한 직장을 한 달 만에 그만두고 다시 두 달을 놀다 9월이 되면서 산업은행으로 출근했다. 지하철 문이 열리자마자 사람의 열풍이 쏟아지던 여의도 출근길은 피하게 됐고 거리도 집에서 두 정거장에 불과했다.

1995년 당시는 ‘세계화’가 표어처럼 강조됐다. 회사에서 맡은 직무에 ‘국제’라는 말이 있어야만 큰일 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첫 출근 6명 가운데 5명이 ‘국제’로 이름이 시작하는 부서에 배치됐다. 나 또한 국제영업부로 발령받았다.

이름은 그렇지만 사무실을 가보니 오래된 나무기둥의 향기가 나는 외가집에 온 기분도 좀 들었다. 무척 큰 사무실이었는데 책상 같은 물건은 꽤 오래전에 튼튼하게 만든 물건을 계속 쓰고 있었다. 여의도 증권사가 신식 건물에 최신 사무용품을 쓰고 있던 것과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일하는 사람들 평균 연령은 증권사보다 10살은 더 많은 것 같았다. 부장이나 임원 대접 받아야 될 것 같은 분들이 차장 과장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심지어 사람들이 ‘아저씨’라고 부르는 초로의 신사도 있었다. 증권사 면접 때 본 사장 연배로 보이는 ‘아저씨’는 한국은행 관련 업무를 하는 분이라고 했다.

그러나 내가 제일 먼저 눈여겨 본 것은 ‘여성 문화’였다. 첫 출근한 3층 국제영업부 50여 명 중 여성이 대여섯 명 되는 것 같았다. 꽤 인상이 단정한 여성들이 있었는데 모두 기혼자임을 나중에 알았다. 유니폼 입은 여성은 아무도 없었고 무엇보다 여직원들을 “아무개야”라고 부르는 무례한 문화는 발 디딜 틈도 없었다. 최소한 이것 하나로 여의도 증권가를 벗어난 건 타당한 선택이라고 생각됐다.

이곳 3층은 국제영업 일선보다는 사후 관리를 담당하는 곳이었다. 나는 첫 출근만 이곳으로 하고 바로 15층 외화자금실로 갔다. 딜링룸이다. 15층은 출입카드가 있어야 문이 열리는 장치가 돼 있었다.

처음 배치된 곳은 조사반이었다.

은행을 다닌 기간은 2년에 불과했지만, 조사반에 배치된 것은 내 경력을 형성하는데 결정적 부분을 차지한다. 글 쓰는 일이 이곳에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담한 체격의 조사반장인 담당대리가 나를 환영하는 가운데 대리보다 상하좌우로 상당히 큼직한 사람이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지금 산업은행 금융공학실 이선호 팀장이다.

행원 시절 이선호 팀장은 국제금융 조사 전문가라고 소문나 있었다. 그는 국제금융부 국제영업부 등 국제 관련 부서를 여러 번 옮겨 다녔지만 가는 곳마다 그에게 금융시장 조사를 맡겼다고 한다. 내가 첫 출근할 때 그는 조사업무 5년째였다.

나하고 동갑인 그는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84학번이다.

우리 시대 풍속도를 전하는 것도 겸하는 이 연재물에서 서울대 경제학과 84학번 얘기를 잠시 하고 간다. 나는 다녀보지 못한 같은 시대 우수한 인재들의 산실이다.

이 사람들한테는 약간의 집단적인 인생사연이 있다. 상당히 많은 서울대 경제학과 84학번들이 전두환의 5공 시대 교련거부자가 돼서 병역혜택을 받지 못했다.

우리가 입학한 1984년은 5공 폭압통치가 다소 느슨해진 때다. ‘학원 자율화’라고 해서 경찰이 시위진압 때도 교내진입을 안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그러나 그 해 이 방침에 단 한 번의 예외가 발생했다.

서울대생들이 2학기 중간고사를 거부했다. 경찰이 대거 교내에 진입했는데 당시 일간지 톱 제목에 “40개 중대 6200명을 투입”했다고 밝혔다.

경제학과가 속한 사회과학대학에서는 교련거부까지 벌어져 상당수가 교련 학점 ‘F’를 받았다. 교련 ‘F’는 당시 학사 용어로 ‘교련 거부자’라고 했다. 교련은 교양필수 과목인 동시에 대학생에게 주는 입영연기, 복무기간 단축 혜택이 걸려 있었다. 교련 거부자는 당국이 마음만 먹으면 바로 군으로 징집할 수도 있었다. 5공 정권이 서울대 경제학과 전체에 대해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지만 현역복무한 사람들은 기간병 3개월, 단기사병 21일의 복무단축 혜택을 받지 못했다.

당시에는 석사장교 제도도 있었다. 서울대 경제학과에 다니는 수재라면 현역 복무할 일이 없을 것으로 보는 풍조도 있었다. 그러나 교련거부자인 서울대 경제학과 84학번은 넘볼 수 없는 것이 됐다. 이들이 1학년 때 집단적으로 시국상황에 휩쓸려 들어간 상황은 이 사람들 인생에 제법 갈림길을 만들었다.

이선호 팀장 또한 이런 처지였다. 부산에서 군 복무를 마쳤는데 마치 대학 못 다닌 사람처럼 동기들 제대하는 걸 보면서 한 달 가까이 복무를 더 해야 했다. 교련 거부자였기 때문이다. 제대 후 본인 표현에 의하면 그는 “무작정 상경했다가 운 좋게” 산업은행에 취직했다.

당시 은행원들의 출근 규정은 9시30분 업무 개시 10분전 착석완료였지만, 조사반은 해당이 안됐다. 8시까지 출근해 아침 일보를 작성해야 했다.

인터넷은 아직 폭넓게 쓰이기 전이지만, 상당히 비싼 돈 내고 보는 금융전용 인터넷이 있었다. 로이터와 텔러레이트였다.

일보 작성 업무가 끝나면 이선호 씨는 로이터 화면도 만지고 PC통신도 만지면서 뭔가를 계속 주물렀다. 때로는 전산부서 사람을 불러오기도 했다. 이 사람은 하루 종일 없는 일도 만들어낼 궁리만 하는 것 같았다. 덕택에 로이터에 등장하는 실시간 변동 환율 숫자를 바탕화면으로 끌어와서 엑셀로 작업하는 것도 가능했다. 지금은 당연한 이런 기능이 당시 전산환경에서는 아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1990년대 중반 당시 풍속에서는 직장인 회식 문화가 지금과 상당히 달라 호기심만 잔뜩 많았던 나는 그게 은행 다니는 낙(樂)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이런 자리에서 이선호 씨를 본 기억이 한 번도 없다. 밥 먹는 1차가 끝나고 여직원들은 밤도 늦었으니 서둘러 귀가하도록 권유(?)하는 동안 그는 사라졌다. 

요번만큼은 꼭 붙잡아둔다고 해도 없어졌다. 나중에 요령을 물어봤더니 그는 “일단 근처 건물 밑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내가 나중에 그 방법을 써보니 정말로 효과가 있었다.

때로는 파격의 맛도 있어야한다는데 이 사람은 그런 것도 마다하고 무슨 재미가 있어서 저렇게 몰두하나 궁금해졌다. 답은 별로 어렵지 않게 그의 책상 유리 밑과 데스크탑 화면에 있는 가족사진에서 찾았다.

은행일이란 기자와 달리 정의감이나 공명심이 작용할 여지가 별로 없다. 오로지 이자를 최대한 늘리고 줄이는 계산뿐이다. 대출부서의 기성고 조사가 아니면 출장 나가 바람 쐴 일도 없다. 하루 종일 사무실에서 화면보고 보고서 읽는 일이다. 집중하는 마음이 없다면 은행 다니는 일은 하루하루가 괴로워진다. 이런 집중력을 지키는 마음의 원천을 그는 가족에서 얻고 있었다.

아침 일보 작성에서 내가 맡은 것은 원달러환율과 미국 채권 부분이다. 두 개 모두 스무자 이내로 전날의 상황을 요약하는 것이었다.

이 일을 하면서 내 평생에 처음으로 경제에 대해 실감나게 공부했다. 한국은행 내리 3년을 상주기자로 출입한 것을 비롯해 오늘에 이르기까지 금융기자로 독자들께 감히 한마디 할 수 있는 공부를 이 때 시작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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