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경제 장경순 경제칼럼]

 

▲ 2015년 9월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고 전철환 총재 재임 때는 전 총재의 좌우에 통화신용정책을 담당하는 강형문 부총재보와 최창호 정책기획국장이 배석했다. /사진=뉴시스.


[IMF, 실패한 보초병의 일기. 7] 1995년 9월 산업은행 외화자금실의 조사반에서 처음으로 맡은 일은 40글자를 쓰는 것이다.

조사반은 매일 아침 국제금융시장 일보를 작성했다. 이 자료는 은행 내부 뿐만 아니라 외화자금실의 고객기업들에게도 전송됐다. 팩스를 이용해 200여 곳에 자료를 보냈다.

이 때 내 나이가 30세 될 무렵인데 LIBOR(런던은행간 금리)라는 단어를 처음 알게 됐다. 뒷면에는 JGB(일본국채), WTI(미국 서부 텍사스산 중질유 가격) 등의 숫자가 표로 정리됐다.

앞뒤 대부분은 조사반장 신배근 대리와 이선호씨가 쓰고 나는 첫 페이지 맨 아래, 미국 국채 시장과 원달러 시장에 대해 각각 20자씩 요약했다. 원달러 시장은 전날 인포맥스의 기사를 요약하는 정도였다. 우리 은행에 원달러딜러들이 있긴 하지만, 이들 얘기를 쓸 수는 없었다. 산업은행 원달러팀의 포지션을 노출할 우려도 있고, 또한 국책은행의 성격으로 인해 이것이 당국의 개입방침으로 와전될 소지도 있었기 때문이다.

한 페이지 분량 기사를 20자로 줄이는 일은 크게 어렵지 않아서 첫 번째 직무로 매우 마음에 들었다.

미국 국채시장을 요약하는 일은 첫 출근자 수준은 좀 넘어서야 했다. 로이터와 텔러레이트에서 미국 국채 시장을 움직인 원인들을 찾아서 이걸 요약해야 했다.

미국의 경제지표와 앨런 그린스펀 연방준비제도(Fed) 이사회 의장 발언이 중요한 뉴스였다.

시간이 지나다보니, 원달러 시장보다 미국 채권시장 요약하는 일에 더 재미를 붙이게 됐다.

원달러 시장의 요약은 거의 매일 “당국의 개입의지”였다. 1997년 외환위기 이전의 원달러 시장은 지금의 중국 금융시장보다 더 관(官)의 손바닥을 벗어나지 못했다. 지금 중국에서는 경제지표가 부진하면 오히려 주가가 올라가는 일이 자주 발생한다. 당국의 부양정책 기대가 커지기 때문이다. 시장 자체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관이 움직이는 경제의 흔한 모습이다. 1995년 한국의 금융시장 모습이 이랬다.

원달러 거래에서 경제지표로 거래에 임하는 딜러는 거의 찾기 어려웠다. 당국자들이 현재의 환율 변동을 마음에 들어 하는지가 더 관심사였다. 수급 요인이 있다면 주초 수입대금 결제수요, 월말의 네고장세(수출대금 유입) 정도였다.

여기에 비하면 미국채권시장은 배울 것이 넘쳐났다. 경제지표들이 왜 이렇게 발표되는지 그 이유를 여기서 실감했다. 채권 딜러들은 경제성장률, 무역수지에다 미국의 고용시장 지표들이 하루하루 돈벌이에 직결되는 사람들이었다. ‘임금 인플레이션(wage inflation)’이 Fed의 정책에서 진짜 중요한 요소인 것도 배웠다.

한 마디로, 미국 국채시장의 시스템은 거짓말을 할 수 없다는 점이다. 경제지표로 곧 드러날 사실인데 당국자들의 입김으로 좌지우지할 수가 없는 구조다. 그린스펀 의장의 발언은 경제지표들 사이의 중요한 연결고리 역할도 했다. 시장이 명백하게 오판하는 일을 바로 잡는 발언이 간간히 나왔다. 그의 발언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는 것을 6개월 후 보게 된다.

나를 지금의 금융기자로 만든 시작이 산업은행 외자실 조사반 근무다.

처음 조사반 근무는 3개월에 그쳤다. 조사반을 포함해 몇 차례 자리 이동을 하다가 입행 11개월쯤 돼서 다시 조사반으로 돌아와 퇴직 때까지 일했다. 나의 산업은행 시절은 곧 외자실 조사반 근무라고 보면 된다.

두 번째 미국으로 공부하러 갔다가 돌아와 기자가 됐을 때, 언론계에 적응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글 솜씨는 나중이고, 뭘 써야 될지 찾는 것이 더 급했다. 그 때 눈이 번쩍 뜨이게 희망을 본 것이 있다. 한국에 채권시장이 생겼고 미국과 같은 통화정책이 도입된 것이다. 1997년 ‘IMF 외환위기’의 영향이다. 5년전, 매일 보고 듣고 쓰고 했던 일이다.

조사반 경험은 기자가 된 나에게 환율과 채권 두 개 영역의 ‘본진’을 마련해줬다.

2000년 8월, 신생 언론사의 한국은행 출입기자가 된 나중의 얘기를 덧붙인다. 내가 속한 신문사는 아직 상주기자단 가입을 못해서 ‘툇마루’(기자실이 아닌 공보실 직원들 사무실)에 노트북 펴놓고 있었다.

퇴행적인 기자단 문화가 건재하던 시절이지만, 한국은행 기자단에는 이런 구태가 희석되는 독특한 문화가 있다.

전철환 총재가 금융통화위원회 회의를 마치고 기자회견을 했다. 회견장의 전철환 총재는 당국자이면서도 학자의 풍모가 여전했다. 경기 순환을 묻는 질문에는 “그게 바로 내 전공”이라며 매우 반가워했다. 답변이 아니라 젊은 후학들과 토론을 즐기는 선생님의 모습 그대로였다.

오고가는 문답을 받아 적다가 뭔가 속에서 계속 치고 올라오는 것이 있어서 질문을 했다. 원래 상주기자단이 아니면 질문을 못한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그래도 간사를 비롯한 다른 기자나 공보실 직원이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이런 것이 한은 기자단의 특성이란 얘기를 많이 했다.

당시는 물가안정목표의 대상 지표가 소비자물가(CPI)가 아니라 근원인플레이션이었다. 통화정책의 영향을 받지 않는 석유류와 농산물을 제외하고 편제하는 지표다.

나는 매달 노트북에 통계청이 발표하는 CPI와 근원인플레이션을 기록하고 있었다. 근원인플레이션이 달마다 높아지고 있는 추세가 뚜렷했다. 한은의 물가 안정목표 상한도 넘을 듯한 추세였다.

이 점을 전철환 총재에게 물었다. 총재가 구수한 미소 그대로 상당히 진지하게 답변에 응했다. 그는 “아직 물가안정목표의 범위에 있다”고 강조했다.

기왕 나선 거, 마저 물었다. 인플레이션은 선제적(preemptive)으로 대응해야 하지 않느냐는 질문도 했다. 금리를 올려야 하지 않느냐는 질문이었다. 총재가 나를 주시하면서 그런 면이 있다는 공감을 표시했다. 

이게 아마 당시 한은 집행부의 가려운 곳을 긁어준 듯 했다. 나는 예전 은행에서 매일같이 보고 듣고 정리하면서 배운 대로 생각난 것을 물어본 것인데, 제도 도입 초창기의 기자회견에서는 흔치 않은 문답이었던 모양이다.

기자회견을 지켜본 공보실장이 기분이 들떴는지, 내 팔을 붙잡고 “오찬장으로 가십시다”라고 끌고 올라갔다. 잡아당기는 바람에 따라갔더니 총재 부총재 간부들이 가득한 가운데 꽤 정갈한 식사가 마련돼 있었다. 국장들이 나한테 “장형 웬 질문을 그렇게 해요”라고 아는 척을 해주는 것이 나쁘지는 않았다. 속으로는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회사에서는 글 못쓴다고 쫓겨나기 일보직전입니다’라고 한탄했다.

그런데 이 오찬도 원래는 상주기자 아니면 못 오는 곳이라고 했다. 나야 공보실장이 끌고 오는 바람에 끌려왔지 내발로 왔나. 그리고 절대 민폐는 끼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다른 회사 기자들하고도 모나지 않게 지냈다. 내가 속한 회사는 그로부터 몇 주 후 투표를 통해 기자단에 가입했다.

한 달 후, 한은은 대대적인 금리 인상 시도를 펼쳤는데, 웃기게도 금융통화위원 과반수를 확보하지 못해 실패했다.

은행을 다니다가 어떻게 기자가 됐냐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그러나 내가 돌이켜보면 은행에서 짧은 글 한줄 쓰면서 시작한 일이 그때마다 하나의 계기로 이렇게 저렇게 연결이 되면서 지금에 이르렀다. 그 때 제대로 전하지 못한 얘기를 이 시리즈를 통해 전하는 것은 지금 있는 자리에서 해야 할 큰 일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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