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경제 장경순 경제칼럼]

▲ 화려한 축제가 벌어지고 있는 홍콩의 밤 모습. 아시아 금융의 중심지인 이 곳은 많은 금융인들이 뜻을 품고 도전에 나서는 곳이다. /사진=뉴시스.


[IMF, 실패한 보초병의 일기. 8] 요즘 중앙선데이에 홍콩 트위터를 연재하는 김문수 액티스 캐피털 아시아 본부장은 한국에서 국제 금융하는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다 아는 ‘마당발’이다. 무슨 로비를 하고 다닌다는 좀 부정적 의미의 마당발이 아니다. 특이한 경력으로 많은 금융인들이 오고가는 전 세계 주요 거점을 돌아다녔다는 얘기다.

한국의 은행원으로 출발해서 치열한 국제금융의 한복판에서 살아남은 당연한 결과다. ‘온실’같은 한국의 은행을 등지고 실적으로 죽고사는 외국계 투자은행으로 청운의 뜻을 품고 떠나는 사람들에게 그는 ‘선구자’가 됐다.

1995년 10월에는 김문수 본부장도 내가 근무하는 산업은행 외화자금실 딜러였다. 보다 더 정확한 인사기록으로 표현하면 행원이었다.

1991년 입행한 그의 동기들은 산업은행의 1세대 ‘인사 고민’에 해당하는 사람들이다. 정책금융을 위주로 하던 산업은행에 어느 날 갑자기 소매금융을 하겠다는 바람이 불었다. 50명 정도만 채용하던 신입행원이 몇 년간 200명으로 불었다.

문제는 소매금융을 하겠다는 방침이 일관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잔뜩 뽑아놓은 인력을 해소할 곳이 없어졌다. 장차 수 백 명씩 뽑힌 동기들이 대리 승진해야 할 때 인사적체를 어떻게 할 것인가, 산업은행의 1990년대 중반 최대 고민은 여기에 있었다.

산업은행은 2000년대 들어서도 또 한 차례 소매금융을 하겠다고 나선 적이 있다. 장기적으로 내다보지 못하는 한 두 사람의 판단이 여러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이런 허약체질부터 뜯어고쳐야 할 것으로 본다. 따지고 보면 은행 사람들만의 일도 아니다. 외부에서 막강한 힘을 가진 사람들이 들어와 안목도 없이 이렇게 흔들어대면 그걸 누가 막아줘야 할 것인가.

김문수 본부장은 군 미필자로 입행했다. 군필 신입행원은 5급에서 출발하지만, 미필은 6급부터 시작했다. 여직원들과 같았다. 여기에는 석사장교를 다녀온 대학원 졸업자들도 해당됐다.

석사장교는 복무기간이 6개월이어서 군복무 경력이 호봉에 반영되지 못한 것이다. 또한 대학원 졸업도 경력에 적용되지 않았다. 이 점은 해외 석사로 입행한 나와 동기들에게는 제법 심적 부담이 되는 점이었다. 이러한 전통적 인사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은행이 해외 석사에만 틀에서 벗어난 경력인정을 해준 것이니 일 못하면 말 나오기 딱 좋은 여건이었던 것이다.

김문수 씨는 고려대 경영학과 학부를 졸업하고 바로 입행해 근무하다 입대했다.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와 외화자금실 본드과에서 근무했다. 미국 채권 거래를 하는 곳으로 외환위기 이전 딜러들이 가장 선호하던 곳이다.

입행한지 얼마 안 된 나의 눈에 그는 산업은행 딜링룸에서 독보적으로 다부진 ‘멘탈’을 가지고 있었다. 저 정도 전투력이면 증권사에 보내도 막대한 예탁자산을 유치해 올 것 같았다. 군인정신이 여전한 듯한 그의 헤어스타일은 제대한지 얼마 안 돼서 인줄 알았는데 홍콩에서 맹활약하는 지금도 짧은 머리는 여전하다.

후선 부서에 있는 사람이 해외에 영어로 전화 걸 일을 어려워하고 있으면 그를 불러와서 해결하기도 했다.

10월 어느 날, 그가 사라졌다. 홍콩의 골드만삭스로 옮겨간 것이다.

한 달 정도 있었던 증권사에서는 사람 떠나는 일이 흔했다. 그러나 이 곳은 반응이 아주 달랐다. 당시 풍토에 비춰볼 때, 산업은행에서 국내 다른 금융기관으로 옮긴다는 건 극히 드물었지만, 유명한 외국회사라면 또 다른 얘기 아닌가. 하지만 여기 사람들 반응은 그게 아니었다.

어느 날 준수한 용모를 가진 분이 나를 찾아왔다. 직원들이 무척 반가워하며 그분에게 인사했다. 인사부의 인호 차장이었다. 나중에 부총재보와 헝가리 산업은행장을 지낸 분이다.

내가 채용될 무렵, 외화자금실에서 근무하다 인사부로 옮겨가 있었다. 통계전공자를 채용하는 실무기안을 한 분이었다. 덕택에 내가 채용된 것인데, 이날 저녁 “잘 지내냐”며 격려한다고 나를 찾아왔던 것이다.

또 어느 날은 외화자금실장이 직접 나를 불러 인사부에 문서 하나를 전달하라는 심부름을 시켰다. 실장께서 나한테 뭔가 직접 지시하는 일이 없었는데 그럴 만한 일인가보다 생각했다. 또한 면접 때 부총재 앞에서 “어깨너머 배우는 것부터 하겠다”고 큰소리치지 않았는가.

문서를 들고 인사부를 갔더니 이윤우 부부장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간부 면접 때 있었던 분이며 나중에 부총재까지 지내고 산업은행을 떠났다. 지금 하는 일이 만족스럽지 않아도 인내를 가지고 기다려 달라는 격려였다. 사실 직무에 대해 불만은 전혀 없었다. 사람들은 앞으로 프런트 들어가면 더 좋을 거라고 얘기는 하지만, 좋은지 나쁜지는 가봐야 아는 일이고 지금 일이 마음에 들면 그게 최고인 것이다.

이 부부장과 인 차장 모두 갓 입행한 나까지 따로 염려하게 된 계기는 모두 김문수 씨 퇴직이다.

은행 내 월간지는 더 이색적이었다. 한 간부가 김문수 씨 퇴사를 개탄하는 글을 썼다. 그런데 그 내용이 점잖은 은행간부들 모습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수많은 사람들이 청춘의 뜻을 품고 홍콩 국제시장을 노크하지만 또한 수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짐을 싼다 이런 내용이었다. 이 글은 은행 외부에도 전문가로 상당히 명망이 높은 분이 쓴 것으로 돼 있었다.

그런데 그게 미스테리였다. 당사자는 그렇게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누가 썼던지간에 홍콩의 금융시장은 산업은행 외자실보다 치열한 것은 옮겨가는 김문수 씨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독한 마음으로 살아남겠다고 다짐한 것은 오늘날 그가 건재한 모습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처음 골드만삭스에 가서도 그는 산업은행에서의 습관이 남아있었다. 이면지를 복사용지로 쓰려고 모아뒀다. 그의 보스는 “네가 이면지 모으러 다니라고 우리가 너를 채용한 줄 아느냐”고 핀잔했다고 한다.

다음해가 되면 산업은행을 떠나는 빈도가 좀 더 높아진다. 대부분 외국계 회사로 옮겨갔다. 이때는 아직 1997년 외환위기가 오기 전이다.

항아리 같은 기형적 인사구조는 직원들 마음속에 쇳덩어리가 되고 있었다. 어차피 예전 선배들처럼 지내지는 못한다는 생각들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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