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경제 장경순 경제칼럼]

▲ 지난 2010년 역대 국민은행장 모임에 참석한 신명호 전 재정경제원 차관보.(뒷줄 왼쪽에서 두번째.) 그는 1995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등 세계화 정책을 추진했다. /사진=뉴시스.


[IMF, 실패한 보초병의 일기. 9] 현재 이 일기장을 읽는 독자들은 ‘실패한 일기장’이라는 제목과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국가가 부도나는 상황이라면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전화통이라도 붙잡고 매달려 다급히 일하는 정황을 상상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은행에서 보낸 시간의 대부분은 이래야 할 상황 판단을 거의 못하던 때다. 1997년 당해년 3월만 해도 유난히 화창한 봄 햇살에 TV에서 흘러나오던 한보청문회가 기억을 차지할 뿐 외환위기 같은 건 생각도 못했다. 1996년부터 뭔가 지지부진하고 생각했던 것만 못하다는 느낌이 이어지고 있을 뿐이었다.

1995년은 이보다 더 한층 밝은 분위기였다. 이때는 ‘패망 직전의 정상을 누리던’ 기분 비슷한 것이 있었다. 저마다 얼굴에 성취감이 가득했다.

소득 1만 달러, OECD, 세계화. 이런 것들이 1995년의 상징들이었다. 은행에서는 국제부서의 선호도가 높아졌고 내가 있던 외화자금실은 그중 최고였다.

산업은행은 고유한 인사체계의 벽이 높아 외부인이 들어올 수 없었다. 들어오려면 경력을 단 한해도 남기지 말고 포기하는 신입행원으로만 가능했다. 해외 석사 채용은 그래서 더욱 유례없던 것으로 강조됐다.

딜러 또한 산업은행은 은행 내부에서 채용했다. 이를 위해 딜러 선발과정도 실시했다.

은행내 딜러 채용이 말처럼 간단한 것은 아니었다. 채용이란 어떻든 우수한 사람을 뽑는 것이기 때문에 기존 부서와 약간의 마찰이 생기기 쉬웠던 것이다. 붙잡고 싶은 사람이 다른 부서 가겠다는데 이걸 환영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당시 산업은행 사람들은 성격상 대체적으로 ‘마음 떠난 사람 어떻게 붙잡냐’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국제화가 국가방침이 된 마당에 국책은행 마인드로는 이에 맞서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틈날 때마다 국제 금융화면을 보고 모의 딜링 프로그램을 하는 것을 보고 붙잡기 힘든 걸 알게 돼서 보내주고, 주위에 얘기하지 않고 딜러에 응시했다고 담당 부장이 불러서 한바탕 야단을 친 후엔 외화자금실 아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이 친구가 괜찮은 사람이니 잘 봐 달라”고 추천했다는 얘기들이 많다.

그래서 당시 서울 종로구 관철동 삼일빌딩 15층 외화자금실에는 또 한 차례 선발과정을 거친 사람들이 모였다. 나는 자부심 높은 사람들 틈에 섞이니 일이 서투르거나 보탬이 안 되는 경우도 대충 섞여서 지낼 수 있었다.

다른 해외석사 동기들은 모두 MBA인데 나만 통계학석사였다. 은행 업무에서 출발선이 상당히 처졌다. 그래서 증권사 한 달 다니던 때와 비슷한 일을 또 맡게 됐다. 각종 연수를 다니는 것이다.

원래 연수는 고생한 직원들에게 재충전과 휴식으로 선호되는 것들이 많았다. 그런데 이는 해외 연수나 상당한 자격증이 부여되는 출퇴근 연수다.

내가 다닌 연수는 업무시간 중 시내연수였다. 증권사나 은행이나 마찬가지였다. 입행한지 한 달도 안 된 사람이 노고를 위로받을 일은 전혀 없고 전공공부 불리한 점을 이렇게라도 만회하라는 취지였다. 현실적으로, 지금 당장 일하다말고 연수받으러 갔을 때 업무 공백이 가장 적을 사람이라면 외화자금실 50여명을 통틀어 나라는 점에 대해 나 또한 공감하고 있었다. 10월부터 12월까지 일주일에 사흘, 오후마다 연세대학교 국제금융 과정을 다니게 됐다. 박진근 교수를 비롯한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들이 개설한 것이다.

여기서 나는 사설기관 연수의 숨은 현실을 알게 됐다. 무조건 배우는 건 다 좋다고 직장에서 연수를 무한정 보낼 수는 없는 일이다. 일 할 시간에 사람 보내기도 어렵지만 연수비용도 만만치 않다.

내가 가게 된 국제금융 과정도 연수비가 꽤 비싸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됐다. 예산의 제약이 있는 금융기관들로부터 연수생을 받기 위해 학연이 꽤 동원됐던 모양이다. 당시 연대 출신 행장이 있던 은행에서는 4명이나 연수를 받으러 왔다.

이런 값비싼 연수도 1995년 분위기니까 생긴 것이라고 보면 된다. 뭔가 성과를 이룩한 나라니까 더욱 공부도 열심히 하고 쓸 돈도 좀 쓰자는 분위기였다.

열 달 만에 다시 강의실에 가서 앉게 됐다. 오후에 수업을 들으니 눈이 감기기도 했다. 그런데 여기 교수 가운데 한 사람은 누가 졸기만 하면 칠판을 두들기면서 깨웠다. 좀 무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통계학 역사를 바꾼 현존 최고 통계학자 강의도 들어봤지만 저런 행동은 상상도 못한다. 내 강의 듣고 싶으니 왔을 테고 잘 배워 가는 건 너희 몫이라는 듯 교수는 강의에만 집중했다. 학생 중에는 점심 소테를 사들고 들어온 사람도 있었지만 교수들이 이조차 뭐라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지금 저 교수는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기에 저런 행동을 하나? 더구나 지금 이 연수에 사람 불러 모은 건 누군가? 남의 직장 사람들 불러와서 마치 자기 학생 다루듯 한다는 불쾌감이 생겼다.

그래도 인상 깊었던 장면도 제법 있었다. 통계학을 십년 넘게 공부하면서 시계열분석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는데 짧은 시간이나마 유병삼 교수로부터 멋진 강의를 듣게 됐다.

유병삼 교수는 첫 인상부터 수업에 대한 열정이 넘쳐 났다. 그는 우리 과정의 강의 시간을 다소 조정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며 “제가 학부 수업을 마친 후 이곳에 5분 내에 도착할 방법이 도저히 없어서”라고 말했다. 바깥세상 사업에만 치중하는 교수는 이럴 때 가차 없이 학부 수업을 희생하던가, 특강 강의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교수는 몇 분 늦게 나타나는 걸 별 일 아닌 것으로 여기지만, 유병삼 교수는 수업은 어느 수업이나 최후의 1분까지 팍팍 채우는 모습을 보여줬다.

덕택에 나는 좋은 강의를 들었다. 이 뿐만 아니다. 5년 후 다른 경제 관련 기사를 쓸 때 유병삼 교수와 전화 인터뷰한 내용을 포함했다. 이 기사가 내 생애 최초 1면톱 기사가 됐다.

제법 비싼 수업료를 받으며 외부 인사들을 초빙했으면 주최 측은 비중 있는 인사를 강사에 포함시킬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해서 우리 앞에 등장한 사람이 신명호 당시 재정경제원 차관보다. 아직 뉴스에 어두웠던 나는 어떤 사람인지 잘 몰랐지만, 외환은행에서 온 비교적 나이가 많은 사람이 상당히 뜻  깊은 강의가 될 거라고 기대를 하고 있었다.

나중에 이런저런 얘기를 들으니 그는 재경원, 즉 지금의 기획재정부에서 대단히 소문난 천재라고 했다. 하지만, 지역적 한계라는 것 때문에 더 이상 높은 자리로 갈 수 없다는 얘기가 많았다. 그는 차관보를 마치고 주택은행장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이는 나중의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눈이 초롱초롱해서 그와 문답을 나눴다. 지금 기억나는 그의 얘기는 딱 두 가지다.

“민간에서 이상과 의욕이 넘쳐날 때 관에서는 그것을 통제하는 역할을 해줘야 합니다.”

아마 개방이 진행되던 자본시장 문제가 아니었을까한다. 이어서 그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에 대해 얘기했다.

“OECD는 가입해야 합니다.”

이 부분에서만큼은 나는 천재로 소문난 차관보 또한 이상과 의욕이 넘쳐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당시 나의 재정경제 지식수준은 어린아이보다 특별히 나을 게 없었다. 그런 눈으로 보이는 어른의 모습이 그랬다는 얘기일 뿐이다. 단지, 민간이 이상에 빠졌을 때 관에서 통제를 해준다면, 관에서 그럴 때는 또 누가 통제해 줄 것인가, 이런 의문은 지금도 갖고 있다.

물론, 지금 와서 OECD 회원국이 아닌 한국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세계화의 선봉장으로 평가되던 신명호 차관보는 김영삼 정부에서 OECD 가입이 완전히 마무리되기 전인 1996년 3월 주택은행장이 되면서 관에서 물러났다.

 

[10회] 산업은행이 독학으로 마련한 한국 파생상품의 교두보

[8회] 행원 한사람의 퇴직이 가져온 충격

 

 

저작권자 © 초이스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