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8일 미국을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과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끝내고 공동성명을 가진 자리에서 “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와 관련된 내용이 나올 법도 했다. 그동안 미국은 일본은 물론 한국에도 TPP가입을 희망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국이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효과를 극대화하는데 노력키로 했다는 내용이 발표 됐을 뿐 두 정상의 입에서 “TPP"얘기는 나오지 않았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거론될 법 한 의제였는데 공식 언급은 없었던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첫 방문과 관련해 새삼 TPP얘기를 꺼낸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다. 지금 미국은 일본에 이어 우리나라에 대해서도 TPP가입을 촉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우리측에 공식 요청할 가능성이 있는 이슈이기도 하다. 이번 박대통령 방미 기간중 이 문제가 조금이라도 흘러나올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 여겨졌던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번엔 TPP까지 거론 된 건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안심할 상황은 아니다. 미국은 언제든 우리에게 이의 가입을 촉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미국의 요구를 선뜻 받아들이기도 조금은 어려운 상황이다. 중국의 눈치도 봐야하고 미국의 입장도 존중해야 하는 한국의 경제적-지정학적-외교적 입장 때문이다. 중국 또한 미국의 TPP에 맞서 한중일 FTA를 추진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론 우리에게 RCEP(아시아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에 가입할 것을 촉구하고 있는 까닭이다. 하지만 중국경제가 쇠퇴하고 미국경제가 다시 급부상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TPP가입 타임을 놓쳐서는 결코 안될 것이다.
 
급변하는 무역패턴-동시다발적 소규모블록화 초래

최근 세계 각국은 ‘근거리 무역 확대’에 역점을 두고 있다. 각 지역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주요 수입국들이 이제 물류비용이 절감되는 근거리 국가 간 교역을 통해서만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고 있는 것이다. 주요 다국적 기업의 현지화비율이 크게 높아진 것도 근거리 무역확대를 촉발하고 있다. 
 
이에따라 당장 유럽연합은 중국에서의 수입을 줄이고 동유럽이나 아프리카와의 무역을 확대하고 있다. 미국도 중국대신 중남미나 캐나다 등지에서 필요물품을 수입하고 있다. 
 
이처럼 각국은 무역에서 실리를 최우선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면서 이제 소규모 블록화움직임이 여기저기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한국은 그간 이런 추세에 대비하기 위해 각국과 FTA체결에 만전을 기해 왔지만 그것만으로 해결되기는 어려운 형국이 되어가고 있다. 특정국과 FTA를 체결해도 무역강국들은 또다른 다자간무역협정에 가입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이중삼중의 체제 가입을 강요당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을 힘들게 하는 ‘멀티블록화’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은 그동안 FTA에 관한한 타국의 추종을 불허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다른 건 몰라도 외교 통상분야에선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한-미 FTA에 이어 한-EU(유럽연합) FTA, 그리고 여러 아시아 및 남미국가와의 FTA를 성사시킴으로써 FTA와 관련해선 일본 등 다른 나라보다 몇 발짝 앞서는 외교통상적 성과를 달성했다. 여기에 對중국 FTA문제와 관련해서도 밑바닥 작업을 어느정도 해 논 상태였기에 이쯤 해놨으면 무역해 먹고 살기는 큰 어려움이 없을 만큼의 교통정리를 끝냈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복잡한 소규모 블록화추세는 한국의 상황을 다시 궁지로 몰아넣고 있다. 글로벌 무역시장에서 여러 블록화가 동시 다발적으로 진행되면서 기존의 FTA만으론 각국의 통상압력에서 벗어날 수 없는 또다른 상황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우선 한국이 새로운 가입을 놓고 고민해야 할 이슈만도 3가지에 이른다. 한중일FTA와 TPP, 그리고 RCEP가 그것이다. 
 
우선 미국으로부터는 TPP가입을 종용받고 있다. TPP는 지난 2005년 싱가포르 브루나이 칠레 뉴질랜드 등 4개국 주도로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미국 호주 캐나다 멕시코 베트남 페루 말레이시아가 동참하게 되었고 이제 드디어 일본이 가입을 눈앞에 두고 있다. 게다가 미국은 이모임에 일본을 끌어들인데 이어 한국마저 가입을 희망하고 있다. 
 
어쨌든 일본이 TPP에 선뜻 가입키로 하면서 한국도 다급하게 됐다. 일본이 미국 호주 뉴질랜드 등이 주도하는 TPP에 가입하면 한국이 미국과 체결한 FTA선점효과가 사라질 뿐 아니라 일본은 호주와 뉴질랜드 등 자원부국에 대해서도 한국보다 먼저 FTA를 체결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국은 TPP가입국을 위주로 향후 셰일가스를 공급할 예정이어서 이 문제 또한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형국이다. 아울러 일본이 TPP에 서둘러 가입하면서 이제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나홀로 가입압박을 받는 나라가 되었다.
 
반면 중국은 우리에게 FTA는 물론이고 RCEP가입까지 희망하고 있다. 특히 지난해 11월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개최된 동아시아 역내국간 정상회의 및 장관회의에서 한중일 FTA와 함께 RCEP 공식협상 개시가 선언되면서 한국으로서도 이를 외면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RCEP엔 아세안 10개국과 한중일이 포함돼 있다. 아세안+6개국 등 총 16개국이 참여대상이다. 호주 라오스 미얀마 인도네시아 필리핀 태국 인도 한국 중국 등이 그들이다. 역시 주도국은 중국이다. 
 
하지만 RCEP와 TPP를 각각 주도하는 중국과 미국이 경제적 적대관계에 있기 때문에 한국은 이들 체제 가입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상황이다. 특히 센카쿠 열도 문제로 중국과 척을 지고 있는 일본은 중국의 견제에도 견딜만한 굳건한 경제력이 있는데다 일찌감치 미국의 용인아래 대대적인 양적완화정책까지 추진하면서 한중일 FTA나 RCEP엔 형식적으로 응하면서 미국이 주도하는 TPP에 본격 합류키로 선언한 상태다. 다시말해 일본은 중국이 아닌 미국의 줄에 서기로 작심한 상태다. 
 
그러나 한국이 처한 상황은 이런 일본과는 또 다르다. 우선 미국과는 이미 FTA를 체결한 상황이어서 TPP가입을 당장 서둘지 않아도 된다. 아울러 한국은 중국에 대한 경제의존도가 일본보다 훨씬 큰 게 문제다. 그래서 한국은 일본과 달리 중국과의 FTA에도 신경쓰면서 RCEP 및 TPP가입과 관련해서도 신중한 행보를 거듭하고 있다. 한국이 어느줄을 서야 옳은 것인가를 놓고는 통상전문가들조차 서둘지 말고 시간을 두고 신중한 선택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을 정도다.
 
한중일 FTA둘러싼 동상이몽

한국과 중국 일본은 ‘한중일 FTA’협상을 둘러싸고 미묘한 시각차이를 보이고 있다. 우선 일본의 태도가 남다르다. 일본은 3개국FTA협상엔 응하되 적극성은 보이지 않고 있다. 큰 비중도 두지 않는 분위기다. 
 
일본의 이같은 태도 뒤엔 센카쿠 열도를 둘러싼 중국과의 피할 수 없는 갈등도 한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 뿐 아니다. 일본의 경제는 지금 미국의 완전한 영향권내에서 움직이고 있다. 우선 대규모 양적완화추진만 해도 미국의 용인아래 이뤄지는 것이다. 게다가 엔저정책 또한 미국이 허용해야만 추진할 수 있는 정책이다. 아베 신조총리가 올 2월 미국을 방문해 오바마 대통령을 만나 엔저와 양적완화확대정책에 대한 양해를 구한 것이 이를 입증해 준다. 게다가 최근 워싱턴에서 열린 G20재무장관회의에서조차 일본은 미국의 우산아래에 들어감으로써 양적완화와 엔저를 용인받을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일본 입장에서 보면 중국이 주도하는 FTA나 RCEP 따윈 큰 고민거리가 아니다. 미국의 튼튼한 우산아래에서 아베 정부는 양적완화와 그에 따른 경제 활성화,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한 지지율 상승을 만끽하고 있다. 다만 미국이 좀 봐준다고 해서 지나친 우경화정책을 펴다가 약간 혼쭐이 나는 정도다. 
 
그러나 한국의 상황은 일본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데 고민이 있다. 우선 중국은 한국의 최대 수출시장이다. 게다가 일본처럼 중국과 민감한 영토분쟁을 벌이고 있지도 않다.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지정학적 위치 또한 중국과 마냥 멀리할 수도 없는 형편이다. 또한 일본과 달리 한국은 미국 EU 주요남미국가 등과 일찌감치 FTA까지 체결해 놓고 있어 TPP가입이 아주 다급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의 공통점도 있다. 둘 다 미국의 우산 밖으로 튕겨 나가서는 먹고 살기 힘든 나라들이란 점이다. 안보는 물론이고 경제 또한 미국의 우산아래에 들어가지 않고는 배겨날 수 없는 게 한국이 처한 상황이다. 따라서 한국은 중국과 미국사이에서 묘한 줄타기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한국도 결국은 TPP가입해야 할 것

하지만 한국도 종국적으로는 일본처럼 TPP에 가입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우선 RCEP가 갖는 한계성이 그 첫 번째 이유다. RCEP가 제구실을 하려면 역내 국가간 높은 수준의 FTA효과를 이끌어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게 쉽지 않다. 무엇보다 TPP는 높은 수준의 지적재산권(IPR)과 정부조달의 투명성, 비관세장벽철폐, 포괄적인 시장접근을 통한 강력한 경제통합달성을 기치로 내세우고 있지만 RCEP는 이정도의 강도 높은 결속력을 갖기 어려울 전망이다. 
 
두 번째, RCEP가 주로 개발도상국간의 모임이라는 점도 결속을 어렵게 하는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아울러 RCEP는 한중일FTA와 TPP의 진전상황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RCEP멤버국중 일본과 싱가포르 브루나이 말레이시아 베트남이 이미 TPP에 참여하고 있고 대만 필리핀 등 다른 동아시아국들도 TPP가입을 고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 역시 한중일FTA와 RCEP를 염두에 두되 TPP에 적극 가입해야만 종국적으로 대세의 흐름을 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한국이 TPP를 외면해선 안되는 결정적 이유가 또 있다. 최근들어 갈수록 약화되고 있는 중국경제의 위상이다. 
 
실제로 중국의 경제는 많은 의심을 받고 있다. 중국이 위안화를 기축통화로 육성하기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역부족인 현상이다. 러시아등과 연합해 국제금융기구를 만들겠다고 호언하겠지만 실현될지도 미지수다. 중국의 경제력이 갈수록 약화되고 있는데다 미국의 견제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2000년대 초반 중국은 미국을 누르고 당장 G1이 될 것처럼 큰 소리쳤지만 이젠 그런 호기는 중국 경제의 성장성은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무엇보다 중국의 최대수출지역인 유로존의 침체가 아주 심각하다. 유로존은 비용절감 차원에서 중국 수입을 줄인 채 인근 동유럽이나 아프리카와의 거래를 확대하고 있다. 게다가 미국은 셰일가스 제공을 무기로 유럽과의 FTA를 추진하고 있다. 
 
국영기업이 중국 경제의 대부분을 이끄는 점도 중국이 처한 암울한 상황이다. 중국 대기업 대부분이 그간 방만한 경영으로 죄다 구조조정이 시급한 상황에 몰려있다. 또한 중국이 거대 국영기업을 구조조정하는 덴 미국의 도움이 필수적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수년내에 중국 경제가 폭삭 쪼그라들지도 모른다는 우려마저 제기되고 있다. 최근 중국에선 8%안팎의 성장이 지속되고 있다고 발표하고 있지만 조작된 통계를 감안하면 5~6%성장에 머물러 있다는 진단도 나오고 있다. 2030년쯤엔 중국경제가 1%성장에 머물수 있다는 진단도 나온다. 미국은 셰일가스라는 아주 큰 무기가 있지만 중국엔 그런 무기가 없다는 점도 약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미국이 다시 G1의 위상을 찾아가는 분위기다. 이 또한 한국이 TPP를 외면할 수 없는 이유다. 중국만 믿고 TPP를 무작정 외면했다간 큰일 날 수도 있는 게 한국이 처한 상황이다. 다만 우리는 중국의 미움도 받지 않으면서 미국경제의 우산 밑으로 들어가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우리가 군사적으로 미국의 핵우산 속에 있듯이 말이다. 특히 미국은 최근 필수 수입품을 중국 대신 캐나다나 중남미에서 조달하고 있어 중국 역시 수출여건을 개선하기 위해선 미국의 눈치를 봐야 할 상황이다. 우리가 신중은 기하되 조만간 TPP가입에 신속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의 수출산업 명암

한국은 수출로 먹고 사는 나라임에도 경쟁력있는 수출상품이 갈수록 줄고 있는 게 문제다. IT와 자동차가 대표 수출상품이지만 IT도 스마트폰을 빼면 다른 특출난 수출 상품이 별로 없다. 반도체도 우리의 주력상품이긴 하지만 부침이 너무 심하다.자동차 수출은 현대 기아차의 잦은 노사 불화, 엔저타격, 외국자동차의 분발등으로 불안하긴 마찬가지다. 차라리 현대 기아차에 묻어가지 않고 독보적으로 움직이는 자동차 부품업체들의 수출을 더 눈여겨봐야 할 것 같다는 얘기가 많이 나온다. 아울러 삼성전기, LG디스플레이 등도 경쟁력있는 디스플레이 수출업체로 꼽히고 있다. 하지만 이것만으론 안된다. 그 강하던 선박수출이 줄어들고 있고 철강수출도 움츠러든지 오래다. 동시다발적인 소규모 블록화추세에 대비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새로운 먹거리사업을 빨리 도출해 내는 노력이 병행돼야 할 때다. 무역장벽이 높을수록 독보적인 상품을 많이 갖고 있어야 살아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의 ‘창조 경제’도 이에 초점이 맞춰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저작권자 © 초이스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