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경제 장경순 경제칼럼]

[IMF, 실패한 보초병의 일기 13] 1997년 외환위기에 이르는 과정을 지켜본 내 직장에서의 일을 써내려 가다보니 당시 이곳에서 벌어진 이런저런 일들을 언급하게 된다.

때로는 누구를 돋보이게 하는 글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문제를 지적하는 글이 될 때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1995~1997년 기간의 일을 쓰고 있는 것임을 분명히 해 둔다.

지금부터 9년 전 쯤에도 외환위기를 지켜본 글을 다른 곳에 연재한 적이 있다. 미흡했던 행태에 관한 글이 한 번 나가자 당시 해당 기관 홍보를 담당하던 사람이 우려 섞인 전화를 해 온 적이 있다.

전대미문의 경제 위기에 앞서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고 처신했는가, 또 금융계 전체의 풍토가 어땠는가를 지적안할 수가 없다. 또한 그것은 당시의 일을 언급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때로부터 20여년이나 되는 시간도 지났다.

이번 회의 제목 끝부분도 현재형이 아니라 “달랐는가”라는 과거형이다. 만약 과거의 아쉬운 점들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문제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시리즈에서는 그걸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예전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는데 그것이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면, 내가 그에 대해 지금도 비판을 지속할 것이라고 예측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 시리즈를 통해서가 아니라 별도의 취재를 한 후 다른 기사를 통해서일 것이다.

지금은 많이 사라진 의식이지만, 1995년 무렵만 해도 산업은행은 한국은행에 맞서는 존재란 인식이 있었다.

앞서 소개한 1995년 연세대 국제금융과정에서도 이를 주관하는 박 모 연세대 교수가 나와 한국은행에서 온 사람을 별도로 언급하며 “이 곳에서 사이좋게 지내라”는 농담을 했었다.

내가 성장과정에서 산업은행을 유심히 보게 된 계기는 지금 프로농구의 모태가 된 1984년 농구대잔치다. 대학 입학을 앞둔 겨울이었다. 현대와 삼성 양강이 실업농구를 지배하고 있어서 팬들은 당연히 두 팀의 결승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두 팀이 하마터면 4강 문턱을 못 넘을 뻔 했다. 산업은행과 한국은행에 혼쭐이 났기 때문이다. 산업은행이 뭐하는 곳인지 모르는데 상당히 한국은행 비슷한 곳으로 보였다.

산업은행이 한국은행에 맞선다는 논리는 풀어서 쓰면, 산업은행이 한국은행의 감독을 받을 이유가 전혀 없다는 얘기다. 당시는 금융감독원이 아니라 한국은행 산하의 은행감독원이 은행들을 감독하고 있었다.

그런데 산업은행은 돈을 조달하는 방식이 예금이 아니라, 자체 채권인 산업금융채권을 통해서다. 여기에 정부가 지급보증을 하는 것이다. 중앙은행의 본원통화를 받는 것이 아니니 한국은행 감독을 받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고 완전히 예금이 없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만큼의 지점도 없던 시절이다.

이런 풍토 속에 산업은행은 중앙은행에 복종하지 않는 특이한 은행처럼 간주됐다.

2000년 기자가 됐을 때, 전철환 당시 한국은행 총재가 한은 사람들과 함께 쓴 책에 산업은행의 방향을 제시한 내용이 있었다. 이것이 매우 이례적인 일로 여기는 분위기가 그 때도 남아있었다.

1996년 1월, 새해 첫 달에 은행 업무에 대해 특별히 기억나는 일이 없다. 왜냐하면 꽤 오랜 기간 신입행원 연수를 받았기 때문이다. 석 달 정도 근무하다, 그해 대졸 신입행원들이 입행하면서 이 친구들 받는 연수를 우리 동기 여섯 명이 같이 받게 됐다. 외화자금실을 벗어나서 은행 본연의 모습이 어떤지를 조금 더 알게 되는 계기가 됐다.

전년 여름 증권사를 두세 달은 다니려다가 신입연수 받으라는 바람에 바로 사표를 낸 적이 있지만, 연수받기 싫어서는 아니었다. 어차피 은행으로 이직할 텐데 연수만 받고 월급을 더 받는 처신이 마땅치 않다고 생각했었다.

개인적으로는 이 연수에 대해 은행에 평생의 고마운 일로 여기고 있다. 코스 따라 제대로 산행을 한 것이 지금껏 이 때가 유일하다. 우리보다 서너살 어린 친구들하고 상당히 친해지는 계기도 됐다.

이 연수 때문에 덩달아 고생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인사부 직원들이다. 산행 때도 꽤 많은 인사부직원들이 따라와서 안내와 안전 관리에 나섰지만, 그 가운데 세 명은 각종 견학 등 지방 활동까지 함께 다녔다.

내가 한국은행과 산업은행에 대해서 가장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바로 인사부다.

2000년 이후 한국은행 취재를 하면서 알게 된 것은 한은은 직군별 인사체제가 강하게 자리를 잡았다. 인사나 총무 관련 부서 사람들은 은행 경력에서 계속 이 분야 일만 해 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있던 1995~1997년의 산업은행 인사부는 전혀 다른 존재였다. 거듭 강조하지만 지금의 산업은행에 대해 하는 얘기가 아니다.

내가 있던 외화자금실에서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인사부에서 와 있었다. 파생상품팀에서 나를 채용하는 일을 기안하신 차장 한분은 내가 입행할 무렵엔 인사부 차장으로 옮겨 있었다.

한마디로, 은행에서 제대로 양성해야겠다는 기대를 걸고 있는 직원들은 인사부를 최소 한번은 거치고 있었다.

상식적으로는, 수 천명 은행 직원들의 인사파일을 관리하던 사람이 갑자기 국제금융 현장에 등장해서 첨단 금융업무에 투입되는 것이 효율적이냐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한편으로, 똑같이 은행원으로 입행해서 누구는 평생 각광받는 일을 하고 누구는 빛이 나지 않는 인사 총무 같은 후선 일만 해야 하느냐는 반론도 있을 수 있다.

나의 의견은 한국은행과 같은 직군제에 더 큰 점수를 부여한다. 특히 국제금융처럼 날고기는 선발주자를 따라잡아야 하는 한국현실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인사 또한 인사만의 전문성이 강조되는 분야다. 듣기로는 인사부 사무실 분위기는 좀 삼엄하다고 했다. 예를 들자면 잠시 자리 비울 때도 서류를 모두 서랍에 넣고 열쇠로 잠그는 것 등이다. 실제로 인사부 사람들이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한다는 ‘뒷담화’들을 많이 했다. 그런 뒷담화의 존재는 인사부가 많은 부서 중의 하나가 아닌 매우 특별한 곳이었다는 현실을 담고 있다. 말하자면 은행 내 별도의 사관학교 같은 인상을 풍겼던 것이다.

많은 인사부 사람들이 다음 인사 때는 국제부서로 옮겨와 있었다.

그러나 국제금융업무만 놓고 본다면 이는 매우 순진하고 무장해제된 풍토라는 게 나의 의견이다. 하루가 다르게 첨단 금융기법이 실전에 투입되고 있어서 끊임없이 이걸 따라잡아야 하고 또한 지금까지의 흐름도 파악하고 있어야 하는데, 인사부 아니라 그 어떤 업무든 전혀 다른 걸 하고 있던 사람이 새로 오고, 또 3~5년 지나면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풍토에서 무슨 경쟁을 제대로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나마 오늘날에도 한 가지 다행스러워 보이는 점은 있다. 요즘 산업은행의 인사 발령을 보면 1990년대 중반 딜러 공모를 통해 외화자금실에 왔던 사람들의 이름은 대부분 국제금융 현장에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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